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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철학 교과서 - 현대 실재론 입문
이와우치 쇼타로 지음, 이신철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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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서라고 부르기 조금 힘들 정도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실재론 관련 담론들 중에서 이렇게 쉽게 풀어 설명한 책도 없다. 높이와 넓이의 유비가 책을 견고하게 지탱하는 가운데 저자의 요약과 나름의 의견이 흥미롭다. 소장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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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문지 스펙트럼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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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집 <모자>(문학과지성사, 2020)를 읽었다. 독서가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단편 소설 선집인데 같은 계열 속에 다른 항으로 배치된 이야기 속에서 무기력, 자연의 공포, 대화 불가능성이 계속 감겨 나와서 지겨웠다. 끝에 작은 반전이 있지만 반전이 유의미하게 제시된다기 보다 지독하게 반복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한번이라도 쾌적하게 만들까 고민하다 들어간 것처럼 어색했다. 그래도 몇 가지 소설의 단상을 적어보자.

<두 명의 교사>는 새로 부임한 교사와 계속 학교에 근무하던 '나'의 산책으로 시작한다. 신임 교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도저히 들려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터저나오는 고백의 아슬함에 비해 본격적인 이야기는 한참 후에 등장하며 두 교사의 '대화 없음' 혹은 '(대화의 반대말로서) 언급'이 이어진다. 소재와 발화는 있되 소통은 없었던 그들의 '언급'은 주로 날씨의 변화, 책, 음식, 오솔길이었고 이런 언급들은 진정한 되려 "대화 욕구를 파괴한다." 그들은 "대화를 피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시작하려한 대화는 자꾸 "다시 언급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실상 이 단편의 메인 테마는 그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의 무기력이다. 신임 교사는 몇 주간의 불면 끝에 잠들었다 짐승 때문에 다시 깨서 그것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훨씬 많은 비중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혹은 가능하더라도 언급으로 무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차지한다. 그 공포는 불면으로부터의 해방을 방해한 짐승을 비롯해 "이기적"이고 "광포"하고 "갑작스"러운 자연에 기반한다. 그 이유는 모든 대화를 언급으로 환원하는 힘이 자연의 날씨, 오솔길과 음식에 있기 때문이다. 수면을 방해한 짐승을 죽이는 것은 발화를 시작했고 진정한 대화를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방해하는 존재에 대한 공포의 반작용으로 읽힌다.

그런데 정작 그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다른 생각을 한다. 신임 교사의 대화보다 산책로의 방향에 더 신경을 쓰고 그 방향 선택에 대해 "과감하게 왼쪽으로 가지 못한다"거나 "갑자기 왼쪽으로 갈 용가가 그에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곧 "그는 나보다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성립했다고 생각했을 때 역시 그들은 만날 수 없다. 오로지 반대 항(자연, 수면을 방해한 짐승)을 제거할 때, 그러한 폭력의 순간만이 대화의 전부가 되 버렸다.

그러므로 이 단편의 끝에 신임 교사가 자신의 불면과 짐승 죽이는 이야기와 함께 "벌써 새로운 재앙의 징후를 감지"했다며 용서를 구하는 이유는 '나'를 향한 살인 충동을 예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프랑스 대사관 문정관>에서 '나'는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 숲속으로 사라진 숙부를 걱정한다. 살인이나 실종처럼 끔찍한 범죄 피해의 가능성을 점치며 밥을 먹는데 식사 시작 30분만에 돌아온 숙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젊은이를 만나 정치, 문화, 산림경영햑과 예술에 상당한 내공을 소유한 그 젊은이와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러나 그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젊은 이는 며칠 후(이 단편은 일기 형식이라 날짜가 있다.)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소설(집) 전반에 말라가는 대화의 진정성과 부풀어 오르는 혐오의 폭발을 대비시킨다. 그는 한번도 대화가 성공하리라 예상하지 않는다. <야우레크> 역시 외삼촌과 한 마디도 말을 섞지 못한 '나'의 이야기다. 외삼촌은 '나'를 철저히 무시한다. 도시의 과잉에서 벗어나 시골의 한적함을 누리려했던 그의 삶은 외삼촌의 채석장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무기력으로 우회한다. "외삼촌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내게는 이미 불가능하다." '나'는 외삼촌의 무관심을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시키니다. 예전에 어머니를 외롭게 해 자살을 유도한 것처럼 '나'를 고립시키는 전략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종종 채석장에 찾아오는 코미디언을 따라가며 퇴근 후 시간을 소소하게 보낸다. 그럼에도 "나는 사실 가장 절망한 사람이어야 하고", "극심한 절망에 빠져야 한다."면서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입식 절망은 이제 "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닿았고 "살기위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직원들에게 웃긴 말을 해준다. 소설의 말미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나는 코미디언이 아니다"는 말은 코미디언이 된 '나'의 현실 부정으로 해석된다. 즉, 고립된 '나'는 웃음거리로만 겨우 존재한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다"는 '나'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뻗어가지 못한다. '나'가 편지를 쓰되 그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비극과 희극을 오가는 순환선에 올라탄 코미디언이라는 하나의 항, 숫자('나'는 채석장에서 회계사로 일한다), 배우에 불과하다.

<야우레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모두를 비난한다"는 문장은 따라서, 겨우 절망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소확행'적 인간이 자기 기술(self-description)적인 공간을 만들다 타버린 피드백-루핑(feedback-looping)의 과열로 보인다. 정지돈은 소설 <은뢰>에서 자기 기술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지만 내가 아닌 나와 내가 아니지만 나인 나로 나눠져 등장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모든 서술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는 행동이었고, 우리의 모든 인식은 구성된 것이며 객체와 주체는 분리되지 않고 우리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피드백 속에 있다는 사실은 인간 행위의 가장 기본이 되는 틀이라고 나는 평소 생각했기에(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이다!)

정지돈 <은뢰>

정리하자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닫힌 비극론을 펼친다. 그건 비극이기 때문이 아니라 닫혔기 때문이다. 대화는 자연이 잡아먹고, 자연은 공포의 반작용으로서 폭력이 구속하는 상황은 서로 꼬리를 문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모두를 비난"하고 코미디는 비극으로 수렴하고 비극은 코미디로 다시 흘러들어 삶을 지속하는 생존의 기술이 된다. 그런데 생존 방법 역시 일종의 비극이디어 세계는 순환을 되풀이 할 것이다. 서로를 물로 늘어지는 이 과정은 영원히 원심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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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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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예상을 뛰어넘는 통찰을 줬다. 일주일 간 서문과 1부를 읽었다. 그 비판의 핵심은 과학지식의 환원주의다. 과학이 낚아챈 지식장의 권위는 자연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삶의 자급적 상태를 부정하고 비지식으로 취급한다. 잉여 자본이 생산되지 않고 따라서 시장에 들어오지 않는 자급(subsistence)은 비노동이다. 비지식과 비노동으로 취급되는 여성의 모든 존재적 성격은 폭력 상태로 내몰린다. 에코페미니즘은 자연 파괴와 여성 폭력을 연동 상태로 보고 동시적 성찰을 요구한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자연의 유한성에 기반한다. '성장' 모델은 자연의 한계 때문에 '성장'의 토대 파괴로 수렴될 것이다.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자원 강탈은 강간의 문화를 낳는다. 지구에 대한 강간, 자족적인 지역 경제에 대한 강간, 여성에 대한 강간이다."

16쪽

에코페미니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 통계를 걸러내고 폭력의 강도와 범위를 수치화하며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강단에 서서 강의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먼저 거리로 나갔고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집을 요구했다. (중략) 이 투쟁은 이후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경험과 투쟁이 이론적 연구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32쪽)

에코페미니스트의 경험우선주의는 과학 연구 윤리에도 적용된다. 우선 과학과 자본주의의 가부장적 성격을 언급한다. 가부장제 과학지식의 환원주의는 자신을 전문가 집단으로 호명하며 장 외부를 소외시킨다. 과학은 자연을 원자론으로 집어넣고 파편화하며 자연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창조 능력을 단일성으로 끌어내린다. 수동적 형태로 제시되는 자연은 생산성과 성장, 개발의 관점에서 착취 대상으로 분열, 통제, 배치된다. "현대의 식물재배는 일차적으로 시장성에 장애가 되는 생물학적 요인들, 즉 재생하고 증식하는 내재적 능력을 종자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이다. 자체 번식하는 종자는 무료이며 공동의 자원이고 농민들의 통제 아래 있다. 반면 기업의 종자에는 가격이 있고, 기업이나 농업연구소의 통제에 놓인다."(91쪽)

그러나 이 상황에서 여성학은 주류 연구 방법론과 차별점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방법론은 여성학을 강단화하고 순수 지식으로 추구하려고 한다. 이런 방법론 아래에서 여성은 연구의 대상으로서 객관적 시선에게 관찰되거나 책과 언어로 추상화되어 관조된다. 즉 해방의 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성학이 여성해방의 도구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증적, 양적 연구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110쪽)"

마리아 미스는 페미니즘 연구를 위한 방법론적 지침을 정한다. 총 일곱 가지 지침의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야 하며 되려 편향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연구 대상과의 부분적 동일시로 가능하다. 둘째, 첫째 지침에 의해 연구 대상이 곧 연구 도구를 쥔 연구 주체가 되기 때문에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와 행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셋째, 이 행동은 집단화, 역사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남성 학자들을 추동하는 출세주의, 경쟁을 극복해야 한다. 이 지침의 결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이다. "새로운 과학의 중심에 놓일 것은 주체-주체의 상호성이라는 원칙이다."(121쪽)

주체-대상의 연구 방법론은 "베이컨 이후 수 세기 동안, 인간과 어머니 자연 그리고 인간의 어머니 사이의 공생관계의 파괴가 곧 자유와 해방의 과정으로 치부되어왔다." 이 관점은 단순히 과학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역시 주체-대상 방법론으로 탄생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공생적인 관계를 일방적인 주종 관계로 바꾸지 않았따면 부르주아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민족들과 그들의 땅을 백인 남성들의 식민지로 바꾸어놓지 않았다면 자본주의경제는 발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 간의 공생관계를 폭력적으로 파괴하지 않았다면, 여성을 단지 인간 이하의 동물이라 부르지 않았더라면, 새로운 남성들은 자연과 여성의 군주로 부상하지 못했을 것이다."(114쪽)"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에코페미니즘은 남성이 부여한 어머니 대지 혹은 자연 관점을 투쟁의 기호로 사용한다. 에코페미니즘은 남성과 동등한 자유와 평등권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법과 종교, 문헌을 토대로 여성을 사회적 구성체로 파악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서구의 돌진에 희생된 다른 이들과 전지구적 정치적 연대를 구축하는 데 대체로 도움이 안 된다"(9쪽)고 본다. 에코페미니즘이 보는 문제의 핵심은 소비주의와 과학의 환원주의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 방식은 따라잡기식 개발 중지와 자급 경제다.

에코페미니즘은 차라리 문화적, 영적 페미니스트들과 일부 입장을 공유하는 편이다. "문화적, 영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가치' 중 많은 부분이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어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여성적 가치가 사람들을 해방할 잠재력이 있다고 해서 높이 평가한다."(8쪽) 이는 여성을 타자화하는 시선을 되려 등에 뒤집어 업고 자신의 방식으로 갱신하여 반대로 사용하는 일종의 전략이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13)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를 경유하여 이렇게 말한다. "[보부아르는] 성판매 여성을 그 사회의 성적 관습에 도전하는 여성으로 본다. 성판매 여성은 타자, 대상, 착취당하는 여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 주체, 착취자라는 것이다. (중략) 가부장제 사회에서 타자인 여성은 일방적으로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타자성을 활용한다."(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13) 229쪽) 따라서 어머니 자연을 호명하는 에코페미니스트의 발화에는 가부장제 과학지식의 남성 과학자를 초과하는 충만한 마녀와 함께 막스 베버의 근대화가 가져온 탈주술화에 맞서는 투쟁의 기술로서 주술적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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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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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다윗과 골리앗』, 『블링크』의 저자 말콤 글레드웰의 신작이다. 책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의 책을 처음 읽어봤다.(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가제본으로 받아서 읽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물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천일야화처럼 이어진다. 그렇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전혀 상관없이 따로 놀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고 충분히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된다. 목차를 따라가며 책을 정리해 본다.

이 책의 구조는 수미상관적이다. 아마 미국에서는 꽤 잘 알려진 사건 같은 샌드라 블랜드 자살 사건을 앞에 배치하고 다시 끝에서 결론으로 활용한다. 샌드라 블랜드 자살 사건은 샌드라 블랜드라는 흑인 여성이 깜빡이를 키지 않고 차선 변경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딱지를 끊으며 시작한다. 어쩌면 간단하게 딱지를 끊고 끝날 사건이었지만 블랜드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그에게 차에서 내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정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블랜드는 사흘 후 구치소에서 자살을 한다. 차량에서의 대화는 블랜드의 녹음기에 녹음이 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다. 흑인 여성이었던 블랜드와 백인 남성인 경찰의 대립 구도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말콤 글레드웰은 그 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위해 350페이지를 소모한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블랜드는 이미 수천 달러의 자동차 딱지를 끊었었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했다. 그 첫날에 경찰에게 딱지를 끊겼으니 그녀는 매우 불안했고 이 불안에서 비롯된 행동이 경찰에게 잘못된 근거를 줬다. 마약이나 총기와 관련된 범죄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잉 진압도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타인을 오해할 수밖에 없으며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질문해야 한다. 타인을 파악하는데 실패하는 이유로 말콤 글레드웰이 제시하는 첫 번째는 진실 기본값 이론이다.

진실 기본값 이론이란 우리가 타인이 전하는 메시지를 항상 진실로 놓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판사들은 재범률이 높은 용의자를 보석으로 풀어주고 금융사기범은 승승장구하며 히틀러를 두 번이나 만난 영국 총리 채임벌린은 히틀러를 전쟁을 일으킬 만한 야심가로 보지 못한다. 이 모든 이유는 인간이 타인을 볼 때 항상 그가 말하는 것을 진실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진실 기본값의 근거는 타인의 표정과 행동이다. 슬프면 슬픈 표정을 거짓말을 하면 이상한 순간이 거짓말쟁이에게 찾아온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은 내면과 외면이 항상 투명하지 않다.

타인의 행동은 맥락과 함께 살펴야 한다. 켄자스시티의 범죄 소탕 작전은 1.7제곱 킬로미터인 144구역에서 시의 대부분의 범죄가 발생하기에 이 구역만 순찰을 매일 돌면서 일군 성과를 보여준다. 시 전체를 무작위로 순찰 도는 게 아니라 범죄율이 높은 구역만 집중한다. 적극적인 순찰은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 국한해야 한다는 게 켄자스 시티의 범죄 소탕 작전의 핵심이다. 인간 행동과 맥락은 결합한다. 켄자스 시티 순찰 모델은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은 빠뜨렸다. 바로 맥락의 결합에 대한 순찰 집중이다.

샌드라 블랜드 사건에서 경찰의 실수는 맥락을 살피지 않았다. 범죄율은 너무나도 낮고 총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문 도로에서 무작위적으로 차량 딱지를 떼던 경찰은 메뉴얼에 맞춰 블랜드를 새웠다. 파국은 그렇게 시작한다. 몸을 숙이고 안절부절하며 담배를 피는 모습에서 경찰의 의심은 극도로 증가한다. 이제 블랜드는 거의 총기와 마약 소지자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우선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 행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타인을 신뢰하는 속성을 조롱하고 처벌해서는 안 된다. 처벌은 보수적 선택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신뢰의 포기, 곧 불신 말이다. 온갖 의심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비극은 없기 원한다. 애초에 타인을 꿰뚫어 보는 능력 같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필요한 자질은 기다리며 겸손하게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실패할 가능성에 말이다.

이 불완전한 우리의 시선과 판단은 가능성을 하나로 줄인다. 바로 맥락이다. 산드라 블랜드 사건은 흑인 여성과 나쁜 백인 경찰의 대결구도로 축소돼서는 안된다. 경찰은 켄자스 시티 모델을 따라 훈련 메뉴얼을 만들었고 경찰관은 그 메뉴얼을 열심히 지켰다. 그 결과 엉뚱하게도 범죄율이 낮은 지역에서 열심히 차량 검문을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관념을 만드는 하나의 제도의 실패가 누군가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읽으면서 말콤 글레드웰이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아주 작은 주장을 위해 굉장히 많은 양의 자세한 이야기를 제물로 바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재료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주석으로 근거의 질도 확보한다. 그런데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 자세가 과잉되었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긴 하지만 핵심으로 가는 길이 너무 길다. 그래도 베스트셀링 포인트로 글 쓰는 스타일을 배워서 좋긴 하다. 잘 읽히게 쓰고 싶다거나 재밌게 쓰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모델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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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 -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한 7가지 질문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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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토론이 허무해 보이는 이유는 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치열하지 않은가. 토론이 아니라 곡해와 억지로 들어차기 때문이다. 왜 토론이 발생하지 않고 엉뚱한 비난이 오가는가. 단어와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토론하기 때문이다. 공동이 합의한 개념이 부재하거나 각기 다른 정의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 토론의 방향은 상실되고 따라서 토론에서 승리하려면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효율적이다. 그게 자신의 지지자를 결속시키는 더 좋은 방법이다. 나름의 전략적 선택이다. 그렇게 점점 토론은 내용의 질보다 발언의 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런 토론은 지겹다. 건물을 짓는데 재료도 없이 사람을 고용해놓은 꼴이다. 답답하다. 어떤 대화이건 상대방과 맥락을 공유하고 개념어를 정의하고 시작해야 대화가 옆으로 새지 않는다.

『페미니즘 앞에 선 그대에게』는 페미니즘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전 공통 기반을 확립할 때 필요한 책이다. 무엇보다 소통의 생산성을 방해하는 개념의 오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목처럼 페미니즘 앞에서, 페미니즘을 내뱉기 전에, 관련된 질문을 가볍게 훑으며 그 내용을 맛보는 책이다.

편집부에서도 이 점을 고려해 챕터마다 Key Ideas Box를 마련해 속성으로 개념을 복기할 수 있게 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각 챕터는 이미 짧은 편이다. 대부분 다섯 장을 넘지 않으며 가장 긴 챕터가 15장 정도 된다. 달리 말하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많은 것이다. 게임을 하다가도 세이브 포인트가 나타나면 게임을 종료했다가 다시 시작해도 그 부분에서 시작할 수 있듯이 책을 읽다가 언제 덮어도 다시 읽기 시작할 수 있는 지점이 수북하다. 짧은 챕터만큼이나 스트레이트한 단문으로 한 번 더 진입장벽을 낮췄다.

강남순이 사용하는 설명의 도입부는 대체로 개념과 이론의 최초 출처로부터 현재적 의미를 갖추게 된 경위다. 약간은 어원학적인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예를 들면 1837년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샤를 푸리에와 어원으로서 라틴어 fémina를 언급하면서 이때의 페미니즘은 "생물학적인 여성의 자질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요즘 사람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즘처럼 정치적 입장을 담은 개념이 아니었다."(61쪽)는 사실을 밝힌다. 이후 페미니즘이 여러 정치적 입장으로 분화하면서 의미의 복합체가 되었고 페미니즘'들'을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를 확립하는 방법은 주로 출처를 각주로 처리해 구체적인 사실 아래에서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각주 중 몇몇은 책도 있지만 인터넷 기사 링크도 있다. 그런데 과연 링크를 검색해볼 독자가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인터넷 기사는 미주로 넣고 기사 일부를 직접 인용해 주석으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나한테 Key Ideas Box, 어원으로 시작하는 설명, 예시의 출처 처리 등은 과도한 친절로 보였다. 2006년 출간된 (사)한국여성연구소의 『새 여성학 강의』(동녘)마저 "요즘은 여성학에 대한 독자들과 학생들의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에 기초적인 설명은 과감히 줄이고 깊이 있는 논의와 내용을 담고자 했다"(7쪽)는데 2020년에 나온 이 책이 기본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독자를 상정한 것은 시대적 흐름을 신속히 파악했는지 의문케 한다.

따라서 책의 문장도 도전적이거나 문학적이기 보다 건조하고 안전한 편이다. 심지어 비슷한 문장이 조금 바뀌어 복제되는 경우도 있다. 문장의 반복은 독자를 지겹게 만드는 동시에 저자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 예문은 다음과 같다. 135쪽의 "많은 여자를 만나는 '남자 바람둥이'를 의미하는 영어는 '우머나이저'womanizer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개념에 상응하는 '여자 바람둥이'라는 '매나이저'manizer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중심적 성과 권력이 사회에 오랫동안 깊숙이 자리 잡아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문장은 219쪽에서 이렇게 반복된다. "많은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남자, 즉 우머나이저womanizer는 결국 남성의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어 표현에 '우머나이저'에 상응하는 '매나이저'manizer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의미의 권력과 특권을 가지고 불특정 다수의 남성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는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책이 오롯이 설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의 주장도 있다. "모든 페미니즘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 지향점을 드러내는 담론이며 실천"(270쪽)으로서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이 대표적이다.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국적, 젠더,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장애 등의 경계를 넘어서는 권리 확장과 연대를 강조"(267쪽)한다.

이 주장의 신선도보다 내가 눈여겨본 것은 번역어에 대한 설명 누락이다. 강남순은 왜 여성주의가 아니라 페미니즘으로 음역했는지 왜 미소지니가 아니라 여성혐오로 번역해 사용하는지 설명하던 저자였다. 강남순은 "페미니즘을 '여성주의'라고 번역하지 않고 페미니즘으로 음역한다. '여성주의'라고 번역할 경우 '여성중심주의'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페미니즘과 달리 미소지니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할 경우, 득보다는 실이 많다고 본다."(140쪽) 그러므로 미소지니는 페미니즘과 달리 생소하고 생소한 만큼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는데 그러면 오해가 잦아지고 무관심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친절이 코즈모폴리터니즘에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왜 세계시민주의가 아니라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음역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 의문이다. 책에서는 "코스모스의 시민 또는 세계 시민으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후에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코즈모폴리턴 사상으로 발전한다고"(268쪽) 스치듯 언급될 뿐이다.

그렇다면 개념을 충분히 예리하게 설명했는가. 코즈모폴리턴 페미니즘은 160쪽에 26가지의 페미니즘 이론과 함게 소개된다. 그 중 국제international/global 페미니즘이 있다. 그렇다면 코스모폴리턴 페미니즘과 국제 페미니즘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설명해줘야 할 텐데 이 부분 역시 생략되었다. 되려 "코즈모폴리터니즘과 보편주의universalism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269쪽)며 보편주의와 비교한다. 보편주의가 인간의 추상적 관념에서 출발하는 한편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가적 경계를 넘어선 연대, 환대, 권리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이"(같은 쪽)라는 비교는 코즈모폴리터니즘을 비슷한 것과의 차이로 개념을 날카롭게 설명하는 정확한 서술이 아니라 반대 개념을 이용해 이미 있는 차이를 반복 설명하는 소극성을 띤다. 물론 각주로 자신의 저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21세기 영구적 평화를 찾아서』(새물결플러스, 2015)를 달았지만, 책 제목 뿐이니 부대적인 정보다. 역시 인용을 각주처리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페미니즘 관련 유튜브 영상 수십 개를 합쳐도 이 책 한 권을 대체하지 못한다. 다만 도서로 분야를 옮기면 소위 입문서가 생각보다 많다. 나는 아직도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13)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박소현, 오빛나리, 홍혜은, 이서영이 쓴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에서는 기대치 못한 이론의 확립과 함께 페미니즘의 사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공적 담론으로 이어지는 그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경쟁력은 최신의 맥락과 역동적 현장을 전달하는 신속성보다는 요약과 정리, 편집에 달려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Key Ideas Box다. 굳이 문장에 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아도 지하철과 버스에서 짧게 나눠 읽어도, 혹은 거의 읽지 않고 훑어보더라도 Key Ideas Box만 보면 된다. 이 점이 이 책의 좌표를 알려준다. 이 책은 논쟁을 촉발하는 벼락 같은 책이 아니라 그 번개를 차분히 정리하고 명확하게 모아주는 피뢰침 같은 책이다. 다시, 피뢰침은 벼락을 더 열심히 맞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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