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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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는 한길사 대학생 서포터즈 자격으로 증정받은 책입니다

 

운동은 인간 존재를 몸이라는 격자로 밀어 넣는다. 이때 인간은 신체의 유한성을 격렬하게 느끼며 움직이기에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기 가장 적절한 지표며 실제로 선명한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이유가 건강이나 육체미보다 운동을 매일 하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된다. 그렇게 달리기를 격일로 한 지 3달 째고 3주 전에는 달리기 쉬는 날에 턱걸이 하면서 매일 신체의 다른 부위를 자극, 휴식하는 리듬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어느 날 기록의 한계에 도달했다. 달리기는 점점 빨라지지만 턱걸이는 아직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발돋움으로 뛰어올라 천천히 내려오는 네거티브 풀업(negative pull-up)을 했는데 무척 지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링하니 풀업 밴드라는 장비가 있었다. 고무 밴드로서 철봉에 매달고 몸을 밴드 위에 올려 그 탄성으로 턱걸이를 보조하는 기구다. 이렇게 하니 6개까지 가능했다. 턱걸이한다는 환상을 주기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고이 접어 넣게 해준 감사한 도구다.

 

책도 운동처럼 사고라는 틀로 묶는다. 문장을 읽고 해석하여 의미를 종합하는 과정이 책 읽기에 들어있다. 책을 읽는 순간은 자신의 사고 역량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렌트라는 책은 다소 험난하다. 마치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턱걸이를 갑자기 한다고 10개씩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렌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리처드 번스타인의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는 풀업 밴드처럼 아렌트를 읽는 고된 길을 편안하게 보조한다. 이는 어려운 아렌트 읽기를 도와준다는 은유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길을 걸으며 읽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158g의 원서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어 역본도 353g으로 나쁘지 않다. B6 사이즈에 196쪽을 담아서 휴가나 나들이, 산책과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손에 잡힌다. 양장 표지는 그만큼 무거워진 무게가 아쉽지 않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고 가름끈도 반갑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기 전에 사물이며 돈으로 교환되는 재화이기에 편집과 디자인도 중요하다.

 

찰랑거린다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이 책의 정교하고 세련된 디자인만큼이나 저자인 리처드 번스타인은 아렌트를 계획적으로 담아낸다. 그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다. 먼저 적시성이다. 책의 원제는 왜 지금 아렌트를 읽는가 Why Read Hannah Arendt Now인데 방점은 '지금Now'에 있다. 한길사는 '지금'을 생략하고 대신 '난민, 악의 평범성, 혁명정신'으로 '지금'을 풀어서 표지에 기재했다. 현재 일어나는 국제적 문제, 철학적 난제와 실천이 아렌트의 사유와 얼마나 깊이 연동하며 지금 필요한 아렌트는 무엇인지 인용과 내용 정리를 통해 소개한다.

 

특히 난민 문제와 관련해 아렌트 자신이 독일을 탈출한 이후 미국 시민이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18년간 무국적 상태”(20)의 난민이었다. 독일을 탈출해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지만 수용소에 갇혔다가 겨우 나온다. 이후 미국으로 가는 비자를 마련하고 포르트갈로 가서 뉴욕행 배를 타는 일도 운이 좋게 성공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난민 문제를 평생에 걸쳐 사유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난민의 대량 발생을 현대 정치의 가장 문제적인 징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주요 정치사상가 중 한 명이다.”(35)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독재, 참주제와 같은 체제보다 사회,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등장할 수 있는 운동에 가깝게 묘사한다. “그 어떤 체제도 인간을 인간이 아닌 어떤 사물로 변형하려고 했던 적이 없”(59)었는데 전체주의는 인간의 자발성과 개성, 인간 본질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죽음을 마주해도 죽음을 생각하기 너무 피곤해서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우슈비츠의 사람들을 단 하나의 생각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인간”(56)으로 이미지화한다.

 

두 번째 범주는 객관성이다. 아렌트의 입장 중에서 모순되거나 비판된(혹은 될) 지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냄으로서 번스타인이 소개하는 아렌트는 오히려 견고해진다. 아렌트가 인간을 조건을 출판하며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을 때쯤, 미국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 교육에 위헌 결정을 내렸고 남부의 많은 주는 이에 반발한다. 주지사가 방위군을 투입해 등교를 막았지만 14세의 흑인 엘리자베스 엑포드는 당당하게 리틀록 센트럴고등학교로 향했고 이 모습은 전 세계에 보도된다.

 

아렌트는 이 사건 관련 글을 청탁받아 제출하는데 놀랍게도 통합 교육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글의 핵심은 "정부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합법적으로 취할 수 없다."(80)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적대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의 재앙적 귀결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81)면서 수 쪽에 걸쳐 아렌트를 강하게 비판한다. 다행히도 아렌트는 당시에 그를 비판하던 입장을 인정하며 이 입장을 번복한다. 흑인 작가인 랄프 엘리슨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적은 편지를 보낸다.

 

번스타인은 현재에도 반복되는 이 글을 향한 비판을 아렌트 스스로 방어케 한다. 예를 들어 아렌트는 1967년에서야 인종 간 금혼법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원보다 먼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는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인종주의와 관련된 아렌트의 저술을 인용하며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아렌트를 재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논쟁 속으로 아렌트를 끌어들이며 번스타인은 그를 입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도와준다.

 

세 번째 범주는 핵심성이다. 번스타인은 아렌트의 생애를 미련하게 나열하지도 않고 사상적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무리하게 개념을 주조해 안 그래도 어려운 아렌트를 더 어려운 설명으로 덮어버리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또 유행에 편입하기 위해 현실 정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지도 않는다. 번스타인은 월터 아이작슨 같은 전기 작가도 아니고 이 책은 학술지에 투고하는 논문도 아니다. 물론 신문에 투고되는 칼럼도 아니다. 그러니 이 세 가지의 여집합 속에서 그는 요약에 집중한다. 그리고 요약하기 자체가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는지 증명한다. 아렌트의 주요 저작인 전체주의의 기원,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인간의 조건, 혁명론, 공화국의 위기,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의 약속을 요약된 상태로, 한 줄이라도 읽어보는 게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장점은 동시에 강한 의문이자 약점으로 뒤바뀐다. 이 책이 2018618일 미국에서 출판되어 같은 해 1019일 한국에 소개될 때까지 단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난민 문제가, 악과 폭력의 문제가, 혁명정신의 문제가 시급하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환경과 핵 문제는 언급되지 않는가. 이는 김홍중이 2016년에 이미 던진 질문이다. "핵시대의 인간, ... 태어나지도, 낳지도, 그리고 죽지도 못하는 존재, 그것을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이 물음을 아렌트는 왜 던지지 않았을까?"(김홍중.사회학적 파상력(문학동네, 2016) 33)

 

또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 문제, 즉 빈곤의 질곡에 압도되어버려, 결국 폭력과 공포로 이어졌"(149)기에 자유를 논의하는 진짜 정치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란'에 그쳤으며, 미국 혁명이야 말로 "해방과 자유를 모두 포함"(149)하는 '혁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유럽인이 소위 인디언으로 부르던 북미 원주민에게 가한 무차별적 살인과 강탈, 강제 이주, 20세기까지 실질적으로 가동된 노예제와 인종차별이라는 폭력이야 말로 먹고 살기 위해 아니,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의 문제에 압도된 테러이자 폭력이 아닌가. 이에 대해 번스타인은 나름 꾸준히 유지했던 객관성을 잃고 만다. "미국의 식민지에도 비록 가난과 노예제도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했지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숨겨졌다. 그것은 프랑스의 극단적인 상황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절대군주제에서 고통받았고 또 진정한 자치정부를 실천해본 경험이 없는 프랑스와 달리 미국의 식민지들은 메이플라워 협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자치정부의 오랜 전통을 경험했다."(150)

 

대중을 위한 인문 서적이라는 점에서 번스타인이 여기서 감당하는 무게는 조각낸 아렌트의 일부며 아렌트가 이미 질문하고 답한 문제에 그친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일, 아렌트가 건너뛴 문제에 천착하는 일은 이 책을 덮고 난 후에 시작된다.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그 이유는 그를 상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보지 못한 새로운 장을 열고 그를 관통하는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0만 년의 반감기를 가진 핵폐기물의 현재성이 먹어 치운 10만 년의 미래와 반란으로 취급되는 프랑스 혁명의 의미를 따져야 한다. 그러니까 모든 이는 언젠가 풀업 밴드를 버리고 맨몸으로 턱걸이를 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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