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킹 온 록트 도어
아오사키 유고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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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 작가의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체육관의 살인>부터 접한 독자라면 신작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살인> 이후부터 점점 재미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인데 전에 읽은 <가제가오카 50엔 동전 축제의 미스터리>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 작가는 단편에 약한 편인 것 같다. 새로운 시리즈물이 될 듯한 <노킹 온 록트 도어>의 경우엔 표제작이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도 올랐다는 '노킹 온 록트 도어'만이 재밌었고 나머지 수록작은 그냥저냥이었다. 그래서 아마 후속작이 나와도 안 찾아볼 것이고 다만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의 후속작이나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그 책은 읽을 것이다. 

 트릭과 동기 전문 탐정, 이렇게 2인조로 구성된 탐정 사무소 '노킹 온 록트 도어'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집은 바로 위에서 말했듯 첫 번째 수록작이자 표제작이면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도 오를 만한 가치가 있던 '노킹 온 록트 도어'가 가장 재밌었다. 초인종도 뭣도 없는 탐정 사무소의 컨셉도 재밌었고 - 노크 소리로 상대가 누구인지 추리하는 건 사소하지만 기발한 컨셉이었다. - 제목이 사건 본편과도 어느 정도 아귀가 맞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땐 유명 팝송을 패러디한 것 같아 어째 호감이 가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첫 번째 수록작은 나머지 수록작을 꽤 기대하게 만들기에 아주 적격인 작품이었다. 특히 작가의 <수족관의 살인>에 견줄 만한 살인범의 독특한 동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후 수록작의 내용은 별로 기억이 나는 게 없다. 바로 다음 수록작 '머리카락이 짧아진 시체'는 트릭도 뻔했거니와 굳이 트릭과 동기로 전문 분야가 나뉜 두 탐정이란 설정도 재미도 없어지고 잘 와 닿지도 않아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수록된 작품들의 트릭이나 동기는 더 기억에 남는 것이 없고 탐정들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범죄 컨설턴트 미카게도 묘하게 인상이 흐릿해 전반적으로 뒤로 갈수록 인상이 흐릿해지는 책이었다. 전형적인 용두사미였달까.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는 대놓고 라이트 노벨스럽게 전개해 개성적으로 느껴진 반면 이 작품은 어디서 본 듯한 추리소설 설정이며 캐릭터가 적당히 혼합된 느낌이라 그리 애착이 가지 않았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끝까지 읽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전문 분야가 다른 두 탐정이란 설정도 깊이가 없이 다소 흥미 위주로 만들어진 설정 같아 불만이었다. 왜 트릭을 잘 풀지만 동기 알아맞히는 건 쥐약이고 반대의 경우는 어째서인가. 그리고 그 둘이 힘을 합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탐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웃픈 신세가 뭔가 제대로 그려질 듯 그려지지 않아 결국 끝까지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고 말았다. 이 작가가 <체육관의 살인>과 <수족관의 살인>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써주길 바랐는데...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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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죽였다 ㅣ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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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전편보다 늘어난 용의자, 용의자 모두 '내가 그를 죽였다'고 믿는 복잡하고 골때리는 상황 설정, 죽여 마땅한 피해자, 끝날 때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는 획기적인 마무리,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추리의 향연... 이렇게 보면 꽤 괜찮은 추리소설로 기억될 만했지만 사실상 범인이 밝혀지지 않아 독자가 직접 추리해야 하는 부분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답게 가독성이 좋단 점을 제외하면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매력이나 흡입력은 떨어지는 작품이다. 다른 걸 떠나서 두 번째 요소, 세 명의 용의자에게 피해자를 죽일 동기가 있고 모두 저마다 자신이 죽였다고 믿는 점 때문에 결말이 별로 궁금해지지 않았다. 작중 인물인 미와코의 말을 빌리자면 누가 범인이어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독성이 좋은 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가독성을 놓고 봤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을 따라올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전에 읽었을 땐 다카히로와 미와코 남매의 관계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는데 10년이 지나 다시 읽으니 미와코는 속내를 알기 힘들어 어딘지 매력이 잘 와 닿지 않는 재미없는 캐릭터였고 다카히로는 다른 두 명의 용의자에 비해 동기가 약하고 또 좀스러워 비호감이었다. 반면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던 스루가와 유키자사의 이야기, 그들이 호다카한테 살의를 품게 된 계기는 아주 흥미로웠다. 피해자 호다카가 - 묘하게 <악의>의 피해자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직업이나 됨됨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 얼마나 죽여 마땅한 인물인지를 묘사하는 것은 이 작품 최고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어쩔 수 없이 살인범을 응원하게 되는 이 소설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딱 호다카가 죽기 전까지가 제일 재밌었다. 


 엄연히 '가가 형사' 시리즈에 속했음에도 가가 형사의 매력이나 활약이 극히 적은 것도 아쉬웠고 후반부를 제외하면 전개 속도도 느리고 최후반부에 추리 장면을 집약시킨 것도 불만스런 부분이었다. 전편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형사가 범인을 추적하는 전개였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범인이 주인공인 도서 추리물이자 세 명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믿는 복잡한 서술트릭이 있어 읽는 입장에서 - 그래서 가가의 비중이 적은 것과 최후반부에 추리 장면을 집약시킨 게 납득은 갔다. - 참으로 까다로웠다. 뭐, 쓰는 사람은 더 까다로웠을 테지만 문제는 그런 보람도 없이 이야기 자체가 상술했듯 누가 범인이어도 상관없는 터라 가가의 추리로 사건의 전말이 이리 바뀌고 저리 바뀌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추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이 더 상세히 드러날수록 결국 모든 용의자에게 책임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누가 범인이어도 이 점은 변하지 않으니 과정이 아무리 정교한들 당최 능동적으로 추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작 작중에선 '누가 범인이어도 상관없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해석되는데, 그 해석이 이 작품의 매력을 더 높여주진 못했다. '미와코가 근친상간을 한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고 미래의 신랑이 살해당한 비련한 여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누가 범인인지는 근본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는 유키자사의 해석은 흥미롭지만 문제는 그 해석이 정말 막판에 나왔다는 것이다. 거기서 더 파고들면 재밌는 묘사나 해석이 됐을 테지만 이렇게 겉만 핥아서야 막판까지 까먹고 있다가 급하게 추가한 것 같은 꼴이라 도리어 작품의 깊이가 죽는 느낌까지 받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글의 매력은 극한의 가독성과 대중성이 있는 한편으로 간혹 무시할 수 없는 날카로움과 깊이 또한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 작품에선 그 매력이 잘 발휘되지 못했다. 시리즈 작품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초중반부만 놓고 보면 정말 괜찮았는데... 시리즈의 최고 작품인 <악의>, <붉은 손가락>, 그리고 <신참자>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도입부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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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스페인 - 알타미라에서 코로나19까지, 2차 개정판
신정환.전용갑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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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스페인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대개 참고자료 목록에 이 책도 껴있었다. 제목도 흥미롭고 세 차례 개정을 거친 점, 게다가 요번에 코로나 시국에 맞춰 부제를 '알타미라에서 코로나19까지'로 변경돼 <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에 이어 이 책도 읽게 됐다. 연달아 스페인과 관련된 책을 읽으려니 겹치는 부분이 많아 좀 물리는 감이 있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정보가 디테일하고 다양해 색다른 기분으로 읽은 적도 많았다. 

 1부는 역사를 2부는 문화를 다루고 있다. 시간 순대로 진행되는 역사 파트와는 달리 문화 파트는 스페인의 문화 이모저모가 다소 두서없이 소개돼 가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더군다나 가장 기대했던 코로나19 부분은 짤막하게 다뤄졌고 또 아직 현재진행형인 문제이거니와 나도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이라 별다른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투우 파트에서 코로나 때문에 투우가 침체기를 겪고 있다는 게 더 기억에 남았다. 안 그래도 스페인 내부에서 찬반 양론이 거센데, 축구나 뮤지컬은 무관중으로 진행해도 투우는 정부에서 그 정도 투자도 하지 않아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투우를 한 번쯤은 보고 싶은 터라 - 핑계를 대자면 투우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 참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는데, 오래된 문화인 만큼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겠지만 피해가 얼마나 심한지, 그리고 코로나가 언제 종식되고 내지는 위드 코로나가 성공적으로 안착할는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스페인이란 나라를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아마 작년 7월 즈음에, 관광 수입을 얻고자 스페인이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들이겠다는 뉴스를 본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상황이 더 안 좋았던 지라 여행은 단념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 드라마 <종이의 집>을 보고 스페인 관련 책도 찾아 읽었다. 그런데 책들을 보면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같은 스페인 문화 찬양이 느껴져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스페인이 매력적인 나라인 건 인정하지만 세계가 보일 건 또 뭐람? 솔직히 전형적인 광고 문구 같아 코웃음을 치고 말았는데 이번에 <두 개의 스페인>을 읽으며 그 말이 드디어 와 닿았다. 

 역사 파트를 통해 스페인과 남미 등의 라틴 계열의 문화는 영미 국가, 이른바 앵글로섹슨족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 차이란 것이 제법 대조적이고 또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리게 만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배척하고 학살한 반면 남미를 장악한 스페인인들은 원주민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 혼혈들이 오늘날 남미 국가들의 실질적인 조상이 되고 그렇기에 남미 국가들이 스페인과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일까? 미국은 히스페닉이나 아랍 문화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아 늘상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반면 스페인은 마드리드 3.11 테러 말곤 타인종과 크게 반목하지 않는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작 스페인 내부에선 마드리드를 비롯한 까스띠야 지역이 까딸루냐와 바스크와는 엄청 반목하는 것과 정반대로 말이다.;; 


 스페인은 유대인이나 이슬람과의 관계가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괜찮은 편인데 이 부분도 역사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레콩키스타의 국토 수복 전쟁 이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믿는 인종이 섞일 대로 섞여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를 몰아내고 국교가 바뀌었어도 그 혼종 상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고 한다. 사실상 프랑코의 독재 체제 이전까지 스페인이나 심지어 남미의 식민지조차도 여러 문화가 나름대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남미 식민지들은 스페인이 탐욕스런 목적으로 만든 것일지언정 적어도 미국이 했던 짓에 비하면 대조되는 부분이 있어 - 골때리는 건 정작 원주민을 가장 많이 학살한 건 스페인군이 아닌 스페인과 남미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이란다. 두 가지 피가 섞인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면서 스페인군과 원주민 둘 다 적대했다나... - 새삼 스페인의 '문명의 연대' 개념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문명의 연대'란 스페인이 마드리드 테러 직후 이라크에 파병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며 그 이유를 댈 때 쓴 용어다. '문명의 연대'란 무력이 아닌 대화로 타 문명과 연대를 도모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편한데 이렇게 설명하면 허울만 좋은 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로 연대가 쉬웠다면 애당초 싸움이 벌어졌겠는가. 하지만, 무력이라고 무슨 만능도 아니고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처럼 존재감 있는 국가가 '문명의 연대'를 주장하는 건 사뭇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됐다. 


 과연 스페인식 '문명의 연대'가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지금보다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검증을 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는 말만큼은 단순히 스페인 예찬에서 비롯된 말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글쎄, 정확히는 스페인 문화가 무조건 옳다기 보다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일단 위험할 뿐더러 무엇보다 비좁고도 비좁은 시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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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 - 스페인어, 활력, 유산, 제국주의, 욕망
김훈 지음 / 유노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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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최근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넓은 의미에서 스페인과 관련된 소설을 읽다 보니 스페인에 다시 관심이 가게 됐다. 그 소설은 베네수엘라인인 작가가 베네수엘라의 막장 현실에 지친 주인공이 스페인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고국을 등지고 떠나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스페인보다는 남미 이야기에 해당해 <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을 연이어 읽는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을까 싶었는데, 스페인의 역사를 들여다봄에 있어 남미가 빠질 수는 없기에 결과적으로 꽤나 옳은 선택이었다. 스페인은 한때 남미에서 가져온 금과 은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사에 군림한 적이 있다는 걸 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고서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왜 스페인 문화의 영향력이 이토록 강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은 괜찮은 대답을 제시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꼽은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 중에 언어와 제국주의 부분이 흥미로웠고 상대적으로 활력과 유산 부분은 내용의 디테일이나 할애된 분량이 다소 아쉬웠다. 본토 스페인어와 남미 스페인어의 차이, 포르투갈어와의 유사성, 스페인어를 배울 때의 접근성 등은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는 내게 아주 흥미로운 서두였고 스페인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우리나라와 닮은 데가 많은 근대사가 아주 잘 정리돼 있어 이 나라의 저력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영광이 바래버린 지도 오래됐고 저자의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라는 말은 전형적인 책을 위한 광고이긴 했지만, 스페인의 역사를 통해 영원한 제국도 없으며 다만 문화는 영원히 남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실감할 수 있던 것은 아주 유익했다. 


 위에서 이 책의 아쉬웠던 부분이라고 언급했던 활력과 유산은 간단히 말해 스페인의 문화, 관광의 이모저모라 할 수 있다. 수박 겉 핥기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저자가 너무 대표적인 항목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 흥미가 생기다 말았다. 사진이 풍부하게 실리지 않았더라면 아쉬움은 더했을 텐데 책의 디자인이나 수록된 사진들이 워낙에 예쁘게 잘 뽑혀 시각적인 만족도가 큰 편이었다. 

 인문학 책은 가끔 가독성보단 정보의 풍부함과 정확함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스페인에 관심이 생겼거나 스페인에 관광이나 일 문제로 가야 할 사람을 위한 '맛보기'의 성격을 띄고 있는 지라 - 이 책은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발간됐다. - 전자의 성격에 집중한 감이 있지만 언어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어 생각보다 깊이가 얕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다음에 읽고 있는 책인 <두 개의 스페인>에 비하면 아무래도 여러 부분에서 깊이가 떨어지지만 어찌 됐건 간에 맛보기의 역할엔 아주 충실했으니까 말이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을 읽은 다음 1년 내로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지금 스페인에 갈 수 있으려나? 진지하게 검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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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 10 - 완결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익선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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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맨발의 겐>은 어렸을 적 도서관에서 숱하게 표지를 봐왔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가지 않았던 만화다. 원자 폭탄 투하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너무 고어하게 묘사했다는 것과 으레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하고 관심을 차단한 것 같다. 하지만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 작품이 명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이유는 원자 폭탄의 피해자인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나게 그린 것보다도 경이로울 정도의 균형 잡힌 반전주의를 꼽을 수 있겠다.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라니, 작가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이 정도면 혐일 만화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적나라하게 비판해 한국인인 내 속이 다 시원했다. 

 예전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에 갔을 때만 해도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는데 <맨발의 겐>에선 종종 자기 연민에 빠지긴 하나 기본적으로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원자 폭탄 투하라는 비극의 원인과 후폭풍을 바라보고 있어 자료관보다 유익했다. 1940년대,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전쟁에 모든 것을 건 당시 일본인들의 추한 모습과 그 안에서 전쟁을 비판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이 주변으로부터 '비국민'이라며 이지메를 당하고, 원자 폭탄을 맞은 다음에 히로시마 사람들이 이웃 지방 사람들에게 차별당하고 그 안에서 조선인도 차별당하고, 후에 패전국인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인권을 '정당하게' 유린당하는 일본인들, 원폭 후유증으로 돌발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등 실제로 겪지 않고서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인간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은데, 이는 일본인만의 특성이 아닌 상황이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드러낼 모습인 것 같아 차마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봐...' 하고 우스갯소리는 하지 못하겠다. 그 말은 작가의 가치관과 어울리지 않는다. 


 숱한 비극을 겪고도 멘탈을 유지하는 겐과 그의 가족들과 유사 가족들의 생존력은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고 단지 전쟁에 휘말렸을 뿐인 민간인들이 갖은 고생을 하는 모습에서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이 어른들에게 '전후의 일본의 페허 속에서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며 치켜세우는 게 못마땅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진심으로 그들의 삶의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나라 어른들과도 모습이 겹쳐졌다. 하여튼 진작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무턱대고 일본이라고 열을 올리기 전에 나라 대 나라의 갈등이나 전쟁으로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혜안을 기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만큼 잘 이해했을까 싶기도 하다. 교육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내용이지만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의 원폭 자료관을 가보지 않은 어렸을 때의 내가 과연 이 책의 반일, 반미 성향이 잘 와 닿았을까? 말인즉슨 어느 정도의 역사적 식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맥락 파악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한때 소년 점프에 연재됐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그래, <원피스>가 연재되고 있는 소년 만화 잡지에 이 작품이 한때 연재됐다고 한다. 그마저도 사상의 문제로 연재 잡지가 여러 번 바뀌긴 했다지만 말이다. 다루는 내용을 보면 일본 극우들한테 분서당하거나 작가가 납치돼서 코렁탕을 먹지 않은 게 믿기지 않는데 여차저차 무사히 1부가 완결이 된 게 다행이다. 


 겐이 도쿄에 그림을 배우러 가면서 끝이 나는데 얘길 들어보니 원래 도쿄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2부도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극우들한테 압박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연재는 불발됐고 끝내 2부는 실현되지 못하고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가 작고해 2부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상상의 몫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원폭 투하라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은 겐이 자신의 평화 이념을 어떻게 국경 없는 언어인 그림으로 세계에 전달할지 몹시 기대됐는데...... 아직까지도 뻔뻔스럽게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일본의 전범들이 많아 겐과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의 신념이 미처 실현되지 못한 게 정말 속상하다. 여운 있는 결말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림체를 비롯하여 어딘가 어설픈 일본어 표기, 옛날 스타일의 좌우 반전 인쇄 등 옛스러운 느낌이 많은 작품이었지만 통통 튀는 캐릭터나 드라마틱한 전개, 지루할 틈 없이 터지는 유머 코드가 10권 분량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단숨에 독파하게 만들었다. 가치관 못지않게 만화가로서의 역량도 수준급이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검색해보니 에세이인 <나의 유서 맨발의 겐> 외엔 찾을 수 없었지만... 최근 미즈키 시게루 <전원 옥쇄하라!>가 최근 출간되기도 했으니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부디 이 기대가 이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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