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겐 10 - 완결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익선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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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맨발의 겐>은 어렸을 적 도서관에서 숱하게 표지를 봐왔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가지 않았던 만화다. 원자 폭탄 투하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너무 고어하게 묘사했다는 것과 으레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하고 관심을 차단한 것 같다. 하지만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 작품이 명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이유는 원자 폭탄의 피해자인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나게 그린 것보다도 경이로울 정도의 균형 잡힌 반전주의를 꼽을 수 있겠다.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라니, 작가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이 정도면 혐일 만화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적나라하게 비판해 한국인인 내 속이 다 시원했다. 

 예전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에 갔을 때만 해도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는데 <맨발의 겐>에선 종종 자기 연민에 빠지긴 하나 기본적으로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원자 폭탄 투하라는 비극의 원인과 후폭풍을 바라보고 있어 자료관보다 유익했다. 1940년대,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전쟁에 모든 것을 건 당시 일본인들의 추한 모습과 그 안에서 전쟁을 비판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이 주변으로부터 '비국민'이라며 이지메를 당하고, 원자 폭탄을 맞은 다음에 히로시마 사람들이 이웃 지방 사람들에게 차별당하고 그 안에서 조선인도 차별당하고, 후에 패전국인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인권을 '정당하게' 유린당하는 일본인들, 원폭 후유증으로 돌발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등 실제로 겪지 않고서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인간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은데, 이는 일본인만의 특성이 아닌 상황이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드러낼 모습인 것 같아 차마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봐...' 하고 우스갯소리는 하지 못하겠다. 그 말은 작가의 가치관과 어울리지 않는다. 


 숱한 비극을 겪고도 멘탈을 유지하는 겐과 그의 가족들과 유사 가족들의 생존력은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고 단지 전쟁에 휘말렸을 뿐인 민간인들이 갖은 고생을 하는 모습에서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이 어른들에게 '전후의 일본의 페허 속에서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며 치켜세우는 게 못마땅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진심으로 그들의 삶의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나라 어른들과도 모습이 겹쳐졌다. 하여튼 진작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무턱대고 일본이라고 열을 올리기 전에 나라 대 나라의 갈등이나 전쟁으로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혜안을 기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만큼 잘 이해했을까 싶기도 하다. 교육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내용이지만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의 원폭 자료관을 가보지 않은 어렸을 때의 내가 과연 이 책의 반일, 반미 성향이 잘 와 닿았을까? 말인즉슨 어느 정도의 역사적 식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맥락 파악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한때 소년 점프에 연재됐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그래, <원피스>가 연재되고 있는 소년 만화 잡지에 이 작품이 한때 연재됐다고 한다. 그마저도 사상의 문제로 연재 잡지가 여러 번 바뀌긴 했다지만 말이다. 다루는 내용을 보면 일본 극우들한테 분서당하거나 작가가 납치돼서 코렁탕을 먹지 않은 게 믿기지 않는데 여차저차 무사히 1부가 완결이 된 게 다행이다. 


 겐이 도쿄에 그림을 배우러 가면서 끝이 나는데 얘길 들어보니 원래 도쿄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2부도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극우들한테 압박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연재는 불발됐고 끝내 2부는 실현되지 못하고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가 작고해 2부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상상의 몫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원폭 투하라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은 겐이 자신의 평화 이념을 어떻게 국경 없는 언어인 그림으로 세계에 전달할지 몹시 기대됐는데...... 아직까지도 뻔뻔스럽게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일본의 전범들이 많아 겐과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의 신념이 미처 실현되지 못한 게 정말 속상하다. 여운 있는 결말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림체를 비롯하여 어딘가 어설픈 일본어 표기, 옛날 스타일의 좌우 반전 인쇄 등 옛스러운 느낌이 많은 작품이었지만 통통 튀는 캐릭터나 드라마틱한 전개, 지루할 틈 없이 터지는 유머 코드가 10권 분량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단숨에 독파하게 만들었다. 가치관 못지않게 만화가로서의 역량도 수준급이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검색해보니 에세이인 <나의 유서 맨발의 겐> 외엔 찾을 수 없었지만... 최근 미즈키 시게루 <전원 옥쇄하라!>가 최근 출간되기도 했으니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부디 이 기대가 이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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