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입니까 산하세계문학 14
리사 울림 셰블룸 지음, 이유진 옮김 / 산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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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히가시노 게이고의 <옛날에 내가 죽은 집>에서는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투성이인 어렸을 적 기억의 이면을 추적하는 이 추리소설은 반전의 내용만큼이나 기억상실증 내지는 입양된 사람이 겪을 만한 정체성 혼란을 그린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나는 입양아가 아니기에 - 내가 아는 한 - 한 번도 뿌리에 대해 궁금해 한 적이 없어서 이처럼 뿌리를 찾으려는 심리가 완벽하게 와 닿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데에서 오는 절박함은 확실히 전달됐다. 

 스웨덴의 만화가이자 한국인 입양아인 리사 울림 셰블룸이 실제로 겪은 일을 다룬 <나는 누구입니까>는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로 확장되는 상당히 이상적인 작품이었다. 기억의 첫 페이지 무렵부터 스웨덴인 부모로부터 스웨덴어와 문화를 체득하며 스웨덴인으로서 살아가지만 겉모습은 영락없이 한국인이기에 - 자신의 기억 속에선 방문해본 적도 없음에도 - 주변 스웨덴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까지 당하는 고충들이 초반부의 몰입도를 높였다. 이내 출산을 하면서 대체 자신은 무슨 연유로 고아가 돼 입양에 이르렀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며 부모를 찾으려는 전개도 개연성 있게 다가왔다. 이 1부까지는 적어도 희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부모를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세계 최대 아동 수출국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도 제대로 못 찾아주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그 이전에 부모를 찾으려는 주인공을 귀찮아 하는 기색이나 대충 대충 일을 하는 모습은 분통 터지게 만들었다. 당사자인 주인공은 그런 공무원의 태도에도 의지해야 하지만 제3자인 내가 봤을 때는 정말 더럽고 치사해서 안 찾고 만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어렵게 찾은 부모도 - 막판에 가면 과연 진짜 부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 통역을 비롯한 여러 여건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연출되지 않는다. 사연이 어떻든 간에 부모 자식의 만남은 감동적이어야 할 것 같지만 작품 속의 묘사는 감동적인 척을 하는 것에 훨씬 가까웠고 그마저도 흐지부지되거나 이쯤 했으니 됐다며 서로 갈 길 가자고 부모가 먼저 말하기까지 한다. 

 이 책은 자의든 타의든 자기 아이를 버리는 부모들이나 그 아이를 타국에 입양시키는 국가를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누구 한 명을 제대로 탓하기 힘들 만큼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것이 있으니까. 이 작품에서의 주요 비판 대상은 여차저차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요청을 대하는 국가의 자세다. 어쩔 수 없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입양을 보냈으니 더 이상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라는 건가. 입양된 사람들 입장에선 부모를 궁금해 하고 찾는 것은 충분히 가져봄직한 이야기기에 100% 공감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일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 좋아 입양을 보내는 것이지, 사실상 부모를 잃은 아이에 대한 책임을 타국에 떠넘겼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판국에 이 무슨 적반하장의 태도인지... 주인공의 씁쓸함이 실감나게 전해져 독자인 나까지 참담할 지경이었다. 이건 뭐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도 아니고. 


 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오기 한참 전에, 88 서울 올림픽 경기를 TV로 시청하며 저자와 저자의 같은 한국계 스웨덴인 아이들이 모여 자신이 태어난 나라 한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작품 초반부의 장면은 참 만감이 교차하게 되는 장면이다. 스웨덴인 사이에서의 부적응을 한국, 자신들을 버린 나라에 대한 자부심으로 달래려는 듯한 일종의 정체성 혼란은 해외로 아이를 입양 보내는 것이 과연 할 짓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모든 고아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특정 인종을 입양하기 원하는 부모들의 요구에 맞춰 해당 인종이 있는 국가에서 아이를 유괴하는 브로커도 있는 판국이란 대목을 읽었을 땐 이 세상엔 아이를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여기는 어른들이 적잖구나 하는 인상까지 받았다. 최근에 본 영화 <블랙 위도우>도 고아를 킬러 집단으로 만드는 무지막지한 비밀 조직이 등장하는데 현실 세계도 그에 못지않게 무지막지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가 아이들을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내용의 무거움과 달리 아기자기한 그림은 오히려 내용을 더욱 심각하게 돋보이게 해준 것 같고, 반대로 대놓고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듯 나레이션으로 점철된 전개 방식은 가독성을 떨어뜨려 아쉬움을 자아냈다. 추측이지만 이런 가독성의 아쉬움이 2017년 스웨덴만화협회가 선정하는 '올해의만화상' 후보작에 그친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만약 이 작품이 '올해의만화상'을 수상했다고 한들 과연 그것이 기뻐할 만한, 그러니까 한국인으로서 기뻐할 만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간혹 국적을 막론하고 한국계 외국인이 유명인으로 자라면 '국위선양'이라고 호들갑 떠는 경우가 있는데, 솔직히 이는 전혀 국위선양이 아니잖은가. 국위선양이란 말이야말로 정말이지 그분들을 두 번 죽이는 말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말하자면 역시 이 작품이 '올해의만화상'을 탔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할 것 같다. 자랑스럽고 어쩌고 이전에, 그만큼 새겨 들을 만한 내용의 작품이니까 말이다. 

한국은 우리가 돌아올 거라고 믿지 않았다. 한국은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기도 전에 우리를 버렸다. 우리가 가족과 뿌리를 그리워하다가 다시 이 나라로 돌아올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입양 아동이 어른이 되어서 돌아오는 일에 대해 어떤 준비도 하고 있지 않았다. - 3부 ‘나에겐 나를 알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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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탓이야 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1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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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2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네 탓이야>는 하무라 아키라가 단독으로 활약하는 탐정물이 아닌 두 명의 주인공이 번갈아 등장하는 추리소설 단편집이었다. 하무라 아키라와 고바야시 경위 두 인물이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고바야시 경위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기억에 없었다. 후속작에 등장한 기억도 전혀 없는데... 아무튼 나름대로 개성이 있는 양반이지만 그래봤자 하무라 아키라의 개성에는 미치지 못해서 이 작품을 끝으로 그만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얼빵한 척하다가 범인의 급소를 찔러 수갑을 채우는 형사 캐릭터가 일본 추리소설엔 정말 많은 것 같다. 당장 최근에 읽은 <거짓의 봄>에도 이런 형사가 나왔으니까. 

 반면 하무라 아키라는 탐정 캐릭터로 사뭇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다.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프리터이자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봤으며 그럼에도 탐정 사무소에선 놀라울 정도의 소질을 보이며 1년 이상, 종국에는 거의 반평생을 탐정업에 종사하기에 이른다. <네 탓이야>에서는 하무라 아키라가 아직 탐정이 되기 전에 알바처에서 겪은 일과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전자는 이 시리즈 특유의 서늘함을, 후자는 하무라 아키라를 주인공으로 다룬 드라마의 대망의 첫 시작을 장식할 정도의 강렬함을 자랑한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범인들의 종류는 크게 두 부류인 듯하다. 누구도 예상 못할 악의를 갖고 완전 범죄를 달성하는 부류와 마찬가지로 악의로 똘똘 뭉쳤으나 실행력이나 생각이 짧아 허술한 부류. 뭐, 짜증을 유발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내가 이 책에 대해 얘기하는 내내 각 단편의 스토리나 트릭보단 캐릭터들에 대해서만 살펴보는 데에는 아무래도 단편들의 완성도가 그리 고르지 못하고 인상적인 단편이 현저히 적음이 기인했을 것이다. 와카타케 나나미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의 지대한 팬이 아닌 이상 추천하기 어려운데, 오늘날의 시리즈 위상이 꽤 높아진 걸 떠올리면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실상 냉소적인 분위기를 제외하면 다른 탐정물과 차별화할 요소나 손에 꼽게 완성도 있는 단편은 없기에 후속작이나 드라마를 먼저 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의 대표작인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에 비해서도 단편 추리소설다운 묘미가 떨어지므로 - 끝마무리가 모호해 왜 벌써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다시 읽는 지금도 별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 읽으면 새로운 감상이 남을까 했더니, 과한 기대였던 것 같다. 시리즈 신작인 <녹슨 도르래>를 읽을 걸 그랬다. 

세상에는 자기가 멍청해서 저지른 짓거리의 책임을 아무 의심 없이 통째로 남에게 전가할 수 있는 행복한 인종이 존재한다. (중략)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들이 싫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성가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할 때도 있다. - 143p



행운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지금까지 무심했던 것을 사과하기로 했다, 같은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나중에 배분될 예정인 불행을 미리 변명해 두기 위해 인심 쓰는 것이다. -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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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봄 가노 라이타 시리즈 1
후루타 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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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서정적인 제목과 더불어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 수상작이라는 소개 문구가 강렬했던 이 소문난 신간은 내게 기대보다 뛰어난 재미를 선사하진 못했다. 자백 전문가 가노의 매력이 덜 드러난 탓도 있을 테고, 그 이전에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도서 추리 스타일로만 채워진 단편집의 경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범인을 찾는다는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전제를 뒤집고 범인(주인공)이 탐정(형사)에게 어떻게 뒷덜미를 어떻게 잡히는가, 바로 그 긴장감을 즐기는 것이 바로 도서 추리물의 백미일 텐데 이 작품에선 그 백미가 덜 부각된 편이다. 다섯 편 연속으로 접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노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덜 부각돼서도 아니라, 그냥 다섯 명의 범인 중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너무 멍청한 나머지 '이걸 못 잡으면 경찰이 아니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범인들의 격이 떨어지니 그들을 잡는 형사가 대단해 보일 리가 없잖은가. 


 한마디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 명성과는 달리, 반대로 아이러니하게도 대개 그 상을 받은 작품들이 그랬듯 이 작품 역시 추리소설적인 면모보단 문체나 다른 요소에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경우엔 단연 문체가 빛이 났는데, 특히 범인이나 숨겨진 인물의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는 데엔 남다른 흡입력을 과시해 수록작들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하나같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유약한 인간들이 그 내면을 접하고서 타락하는 전개가 가히 이해가 가고도 남을 만한 문체였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 '봉인된 빨강'과 마지막 수록작 '살로메의 유언'이 괜찮았고 중간에 세 작품은 그저 그랬다. 표제작이자 수상작이기도 한 '거짓의 봄'은 주인공의 직업(?)이 신선한 것에 비해 그 매력이나 깊이가 덜 살아난 것 같고 '이름 없는 장미'도 소재는 신선했지만 캐릭터들의 내면이 다소 피상적으로 그려진 감이 있고, '낯선 친구'의 경우엔 주인공의 어둡고 찌질한 심리, 일명 열등감이 작품 전체를 실감나게 지배한 것이 공감을 유발하기까지 해 나쁘지 않았지만 사건의 흐름이나 진범의 정체, 열등감의 대상인 주인공의 친구의 변명이 뜬금없거나 설득력이 떨어져 뒷맛이 별로 좋지 못했다. 


 '봉인된 빨강'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추리소설 중에서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멍청한 범인이 등장해 - '이런 놈을 못 잡으면 경찰이 왜 있냐'는 말을 유발한 장본인이 바로 얘다. - 도서 추리물의 백미는 떨어졌으나 작품의 결말은 무척 강렬했다. '당신은 반드시 다섯 번 속게 된다!'는 출판사의 문구가 정말 딱 들어맞는 예상 외의 결말이 마련돼 그야말로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었는데, 뒤의 수록작들이 분위기나, 사건의 긴장감, 반전 등이 이 작품에 미치지 못해서 '봉인된 빨강'이 더욱 돋보였다. 하긴 범인의 죄질도 가장 저질이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몰입도 하나는 가장 뛰어날 수밖에. 

 '살로메의 유언'은 내가 예전에 구상한 추리소설의 반전과 닮아서 개인적으로 읽는 중에 질투가 났던 작품이다. 주인공의 목적과 개연성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가해자 유족의 남모를 고충과 좌절에 주목한 것이 좋았고, 마지막 수록작이 돼서야 가노 라이타라는 캐릭터의 윤곽이 드러나 간신히 시리즈물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는 느낌이 든 것도 눈길이 갔다. 이 작가들이 - 후루타 덴은 두 명의 작가가 콤비를 이룬 팀 이름이다. - 가노 라이타가 등장하는 장편을 집필 중이라는데 '살로메의 유언'에서도 가노가 짧게 등장했더라면 그 후속작이 전혀 기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양심은 있지만 할 말은 하고 평소엔 실실 웃지만 알게 모르게 상대를 궁지로 모는 이 캐릭터의 진면모가 장편에서는 보다 잘 드러나길 바란다. 설마 장편도 도서 추리물인 건 아니겠지? 


 여담이지만 두 작가의 콤비라는 점 때문에 '일본 추리소설계의 차세대 엘러리 퀸'이라는 오해를 할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엘러리 퀸에 비견될 만한 작가는 노리즈키 린타로와 아리스가와 아리스일 텐데 그 두 작가의 논리 구축과 비교하면 <거짓의 봄>은 그런 돌직구 스타일의 추리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체밖에 없는 어중이떠중이 추리소설은 아니고 나름대로 갖출 건 다 갖춘 형사물, 도서 추리물이지만... 판단은 직접 읽고 나서 해보시길 바란다. 

경찰이 돕는 건 약자가 아니라 옳은 사람이다. 옳지 못한 약자의 필사적인 몸부림은 저열한 범죄로만 인식한다. - 136p



아무리 노력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을 거머쥐어도 나는 만족할 수 없다,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이 그런 걸 깨달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럽고 허무한 지 당신들이 압니까? - 3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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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패턴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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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일본 문화에 관한 가장 뛰어난 안내서라는 명성이 자자한 고전으로 '이후에 나온 일본 문화 책들은 다 이 책의 주석에 불과하다' 라는 평까지 있을 정도며 이 책의 대상인 일본인들에게도 인정받았다고 한다. 옛날부터 제목은 많이 들었지만 연식이 좀 된 책이기도 하고 번역 버전이 무수히 많아 뭘 읽어야 할는지 몰라 손이 잘 안 갔는데 내 나름대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연암서가에서 펴낸 이 책이 가장 가독성이 높아 보여 큰 마음 먹고 읽게 됐다. 

 혹여나 책의 명성이 무색하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건방진 걱정을 해봤으나 -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험이 너무 허다했기에... -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물론 책이 집필된 배경이 50년대인 만큼 만약 이 책이 10년 뒤, 20년 뒤인 일본을, 고도 성장을 이룩한 일본을 분석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 작가가 서두에서 밝히듯 이 책은 문화 인류학 서적치고 굉장히 불리한 조건을 안고 집필됐는데, 전쟁 중인 만큼 일본에 대한 연구가 절실했지만 전쟁 중이었기에 정작 일본 땅을 밟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에 이민 온 일본인 이민자나 그 2세들을 대상으로 한 발자국 떨어진 지점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제약이 일본의 이질적인 부분을 객관적이고 예리하게 포착해낼 수 있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된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흥미진진했다. 때론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하더니,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아까 말했듯 10년 뒤, 20년 뒤, 아니면 지금 일본을 보고서 루스 베네딕트가 다시 <국화와 칼>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일본의 이질성을 묘하게 과장되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로 기술하는 부분이 거슬리긴 했지만, 저자는 일본이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이전의 군국주의적 마인드를 버리고 나라를 재건하길 기원하며 글을 마쳤다. 그런데 그런 저자의 눈에 나라를 성공적으로 재건했으나 군구주의적 마인드는 실로 교묘하게 숨기면서 그 어떤 반성이나 성장도 없이 과거 모습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환멸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일본인의 '온', '기리', '기무' 등 여러 개념을 논리적이고 풍부한 예시를 들어가며 접근한 동시에 그 안의 아름다운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자세마저 느껴졌기에 국화와 칼을 동시에 숭배하는 이중성이 극심해진 일본의 현재 모습에 저자로서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참 가까우면서 또 무척이나 다르기에 서양인이 바라보는 일본의 이질성이 어떤 것인지 읽기 전부터 궁금했었다. 개인적으로 '온', 보은에 대한 일본인의 철저한 마인드보다도 그 일본인들의 마인드를 신기하게 여기는 저자의 논조가 내게는 더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나름대로 같은 동북아 문화권이라 그런가, 아니면 내가 일본 문화에 익숙해서 그런 걸까. 날 때부터 삶에, 특히 천황한테 빚을 졌다는 일본인의 마인드엔 동조하기 힘들었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기 꺼리는 심리만큼은 나도 동의할 수 있어서 반대로 그 심리를 신기하게 여기는 저자의, 나아가서는 미국인들의 심리도 만만찮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이 글은 일본의 어떤 점을 이질적으로 느끼는지 기술함에 따라 미국이란 나라의 실상도 어렴풋이 짐작이 가능했다. 삶 속에는 자신의 역할과 행복을 정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이 있다고 믿는 미국이지만 의외로 성에 대한 관념은 일본과 비할 수 없이 보수적인 점 등 - 얼마 전에 접한 <시녀 이야기>가 떠올라 이 대목이 묘하게 헛웃음을 유발했다. - 알게 모르게 일본 못지않게 미국의 단면도 부각됐다. 원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일본 말고 다른 문화에 대해 쓴 저자의 책도 적잖이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다른 버전은 접하지 않아서 모르지만 2019년에 출간된 이 <국화와 칼>을 고른 건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가독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책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저자에 대한 공부도 철저히 한 번역가의 노력과 그 노력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는 옮긴이의 말도 여러모로 이 책의 신뢰감을 높여 아직 본문을 읽지 않은 상태임에도 이 책을 완독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부풀었다. 

 비록 책의 집필 시기가 너무 옛날이란 것과 내용 자체도 일본 땅을 밟지 못한 상태에서 집필됐다는 한계 때문에 불충분하거나 너무 옛스럽거나 나쁜 말로 뇌피셜에 불과한 듯한 부분도 있어 - 더불어 번역가의 안내가 없었으면 한없이 지루했을 파트까지 - 뒤로 갈수록 만족도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 책이 고전에 등극한 이유나 상징성은 전해져 역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별개의 문화권의 나라를 이해하고자 했고 성과도 톡톡히 거둬낸 작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전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 도전이나 다름없었는데, 정말 간만에 그 도전이 가치 있게 마무리돼 뿌듯한 채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인생의 진지한 분야에 대한 행동과 관련하여 어떤 일본인을 가리켜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심한 욕설이 되며, 그보다 더 심한 욕은 ‘바보‘ 이외에는 없다. - 3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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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땡큐 : 며느라기 코멘터리
수신지 글.그림 / 귤프레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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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다소 열린 결말로 끝난 <며느라기>의 외전, 비하인드 스토리, 작가가 자신의 남편, 시어머니, 엄마와의 대화 등이 실린 책이다. 본편에 비해 분량이 너무 짧은 건 아쉬웠지만 구성이며 내용이 모두 알차 읽은 보람이 있었다. <며느라기>의 전신이 되는 단편 만화도 수록됐는데, 그 작품을 토대로 <며느라기>를 그린 수신지 작가의 능력이나 의지가 대단했다. 사실 그 단편 하나로 놓고 보면 교훈이나 주제의식도 흐릿한, 흔히 말하는 '네이트판' 수준에 그쳤기에 이렇게 장편으로 발전시킨 게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작가도 이 책에서 밝히듯 <며느라기>가 단순히 불행을 전시하는 것에 머물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봤을 땐 <노땡큐>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불행 전시라는 오해는 벗어던지지 않았나 싶다. 

 저번에 <며느라기>를 읽고 포스팅을 쓸 땐 그래도 사린과 구영 부부가 아직 완전히 감정이 떠나지 않았고 특히 구영이 자신의 잘못을 강하게 뉘우치는 장면이 있었기에 다음 명절 때는 발전이 있겠거니 하고 희망적인 감상을 적었는데 <노땡큐>를 읽고 나니 나도 참 감상에 젖었구나 하고 쥐구멍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닌데. 특히 이 책에서의 구영의 모습을 보노라면 애당초 사린이 저런 의지박약에다가 우유부단하고 줏대도 없는 구영하고 결혼한 것 자체가 설정 오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책의 말미에는 <프로불편러 일기>의 위근우 작가와 <괜찮지 않습니다>의 최지은 작가의 칼럼도 수록됐는데 여기서 위근우 작가가 쓴 칼럼의 제목이 내가 <노땡큐>를 읽고 난 감상과 똑같아 격하게 고갤 끄덕거렸다. 결국 문제는 무구영이다. 정말 읽다 보면 '구영아, 너 아직도 정신 안 차렸니?' 하고 따지고 싶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구영은 겉으로는 모자람 없고 친절한 남성이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답이 없는, 이른바 평범한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수신지 작가는 작품 본편으로부터 1년이 지났음에도 발전이 없는 구영을 통해 상당히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전망을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뭐든 천천히 변화해야 반발이 적다지만, 작가는 오히려 사린의 입을 통해 천천히 천천히 운운하다가 그냥 그대로 익숙해져버리는 건 아닌지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나는 이 중얼거림을 보고 어째서 구영이 아직도 이혼을 당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빠른 변화가 두려워 하는 사회는 구영처럼 의지박약에다가 우유부단하고 줏대도 없는 남자에게 너무나 너그러운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린을 제외하고 완전히 이 시대 모든 구영에게만 너그러운 세상 말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작가가 인터뷰한 대상 중 시어머니가 오히려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작가의 엄마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다 예전엔 며느리의 희생이 옳고 자시고도 없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가 점점 그게 아님을 깨닫고, <며느라기>를 향한 여성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처음엔 의문을 표하다가 지금은 이해하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마 내 생각엔 작가의 시어머니는 어쩌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진보적인 발언을 하신 게 아닐까 싶고 작가의 엄마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좀 더 솔직하게 말했을 뿐, 아마 두 사람 다 속마음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세대인 데다 비슷한 시기에 시집살이를 보낸 사람들이 며느리나 딸을 향한 감정에 어느 정도 동정과 보상 심리가 섞였을 것이며, 나는 두 인물에게 차이가 있다면 두 심리의 비율의 차이만 있진 않은지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성차별은 아주 오랫동안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대물림된 것이라 아예 윗세대를 철저히 배제하지 않은 이상 당장에 빠르게 변화를 추구하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나 또한 특정 사람들을 배제하고서 냅다 변화만 추구하는 건 장기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변화의 속도엔 합의 내지는 조율이 필요하다고 본다. 작가도 이 부분에 대해 적잖이 고민을 했는지 <며느라기>는 불행 전시 소리나 들을 만큼 실질적으로 진행된 게 없는 정체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반면 정작 외전인 <노땡큐>에서는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해서 활발히 논의한다. 이러한 아이러니함 어떻게 보면 작가 본인이 예상했던 이 작품의 한계이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처럼 과하지 않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게끔 유발하는 작풍이야말로 지금 시대에 가장 적절한 변화의 속도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됐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사족일 수 있을 <노땡큐>란 책이 반대로 <며느라기>를 완성시키는 참으로 이상적인 후속작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곤gone>을 1권도 읽었는데 2권 역시 마저 읽으려고 한다. 그 작품에서도 페미니즘을 날카롭고 서늘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재능이 유감 없이 발휘돼서 - 흡사 <시녀 이야기>의 프리퀄 같다. - 완결작이라는 2권을 얼른 읽고 싶다. 그 작품이 고작 2권으로 끝날 내용인가 싶지만 한편으로 페미니즘이란 키워드로 여러 작품을 그리는 게 독자 입장에서 더한 행복이겠다 싶어 아무튼 사뭇 기대가 된다. 

자신의 일인데 자기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유는?

1. 본인의 문제라고 인지 못 함.

2.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람.

-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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