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스페인 - 알타미라에서 코로나19까지, 2차 개정판
신정환.전용갑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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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스페인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대개 참고자료 목록에 이 책도 껴있었다. 제목도 흥미롭고 세 차례 개정을 거친 점, 게다가 요번에 코로나 시국에 맞춰 부제를 '알타미라에서 코로나19까지'로 변경돼 <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에 이어 이 책도 읽게 됐다. 연달아 스페인과 관련된 책을 읽으려니 겹치는 부분이 많아 좀 물리는 감이 있었지만 이 책이 다루는 정보가 디테일하고 다양해 색다른 기분으로 읽은 적도 많았다. 

 1부는 역사를 2부는 문화를 다루고 있다. 시간 순대로 진행되는 역사 파트와는 달리 문화 파트는 스페인의 문화 이모저모가 다소 두서없이 소개돼 가독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더군다나 가장 기대했던 코로나19 부분은 짤막하게 다뤄졌고 또 아직 현재진행형인 문제이거니와 나도 뉴스를 통해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이라 별다른 만족감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투우 파트에서 코로나 때문에 투우가 침체기를 겪고 있다는 게 더 기억에 남았다. 안 그래도 스페인 내부에서 찬반 양론이 거센데, 축구나 뮤지컬은 무관중으로 진행해도 투우는 정부에서 그 정도 투자도 하지 않아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투우를 한 번쯤은 보고 싶은 터라 - 핑계를 대자면 투우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기 위해서다. - 참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는데, 오래된 문화인 만큼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겠지만 피해가 얼마나 심한지, 그리고 코로나가 언제 종식되고 내지는 위드 코로나가 성공적으로 안착할는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스페인이란 나라를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아마 작년 7월 즈음에, 관광 수입을 얻고자 스페인이 외국인 관광객을 받아들이겠다는 뉴스를 본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는 상황이 더 안 좋았던 지라 여행은 단념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 드라마 <종이의 집>을 보고 스페인 관련 책도 찾아 읽었다. 그런데 책들을 보면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같은 스페인 문화 찬양이 느껴져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다. 스페인이 매력적인 나라인 건 인정하지만 세계가 보일 건 또 뭐람? 솔직히 전형적인 광고 문구 같아 코웃음을 치고 말았는데 이번에 <두 개의 스페인>을 읽으며 그 말이 드디어 와 닿았다. 

 역사 파트를 통해 스페인과 남미 등의 라틴 계열의 문화는 영미 국가, 이른바 앵글로섹슨족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그 차이란 것이 제법 대조적이고 또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는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리게 만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배척하고 학살한 반면 남미를 장악한 스페인인들은 원주민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 혼혈들이 오늘날 남미 국가들의 실질적인 조상이 되고 그렇기에 남미 국가들이 스페인과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원만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일까? 미국은 히스페닉이나 아랍 문화와 끊임없이 충돌하고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아 늘상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반면 스페인은 마드리드 3.11 테러 말곤 타인종과 크게 반목하지 않는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작 스페인 내부에선 마드리드를 비롯한 까스띠야 지역이 까딸루냐와 바스크와는 엄청 반목하는 것과 정반대로 말이다.;; 


 스페인은 유대인이나 이슬람과의 관계가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괜찮은 편인데 이 부분도 역사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레콩키스타의 국토 수복 전쟁 이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믿는 인종이 섞일 대로 섞여서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를 몰아내고 국교가 바뀌었어도 그 혼종 상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고 한다. 사실상 프랑코의 독재 체제 이전까지 스페인이나 심지어 남미의 식민지조차도 여러 문화가 나름대로 조화롭게 어우러졌다고도 볼 수 있다. 비록 남미 식민지들은 스페인이 탐욕스런 목적으로 만든 것일지언정 적어도 미국이 했던 짓에 비하면 대조되는 부분이 있어 - 골때리는 건 정작 원주민을 가장 많이 학살한 건 스페인군이 아닌 스페인과 남미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들이란다. 두 가지 피가 섞인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면서 스페인군과 원주민 둘 다 적대했다나... - 새삼 스페인의 '문명의 연대' 개념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문명의 연대'란 스페인이 마드리드 테러 직후 이라크에 파병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며 그 이유를 댈 때 쓴 용어다. '문명의 연대'란 무력이 아닌 대화로 타 문명과 연대를 도모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편한데 이렇게 설명하면 허울만 좋은 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대화로 연대가 쉬웠다면 애당초 싸움이 벌어졌겠는가. 하지만, 무력이라고 무슨 만능도 아니고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걸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처럼 존재감 있는 국가가 '문명의 연대'를 주장하는 건 사뭇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됐다. 


 과연 스페인식 '문명의 연대'가 저자가 강조한 것처럼 지금보다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검증을 해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는 말만큼은 단순히 스페인 예찬에서 비롯된 말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글쎄, 정확히는 스페인 문화가 무조건 옳다기 보다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일단 위험할 뿐더러 무엇보다 비좁고도 비좁은 시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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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 - 스페인어, 활력, 유산, 제국주의, 욕망
김훈 지음 / 유노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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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최근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넓은 의미에서 스페인과 관련된 소설을 읽다 보니 스페인에 다시 관심이 가게 됐다. 그 소설은 베네수엘라인인 작가가 베네수엘라의 막장 현실에 지친 주인공이 스페인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고국을 등지고 떠나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스페인보다는 남미 이야기에 해당해 <세계사를 뒤흔든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을 연이어 읽는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이었을까 싶었는데, 스페인의 역사를 들여다봄에 있어 남미가 빠질 수는 없기에 결과적으로 꽤나 옳은 선택이었다. 스페인은 한때 남미에서 가져온 금과 은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사에 군림한 적이 있다는 걸 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고서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왜 스페인 문화의 영향력이 이토록 강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책은 괜찮은 대답을 제시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꼽은 스페인의 다섯 가지 힘 중에 언어와 제국주의 부분이 흥미로웠고 상대적으로 활력과 유산 부분은 내용의 디테일이나 할애된 분량이 다소 아쉬웠다. 본토 스페인어와 남미 스페인어의 차이, 포르투갈어와의 유사성, 스페인어를 배울 때의 접근성 등은 스페인어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는 내게 아주 흥미로운 서두였고 스페인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우리나라와 닮은 데가 많은 근대사가 아주 잘 정리돼 있어 이 나라의 저력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지금은 과거의 영광이 바래버린 지도 오래됐고 저자의 '스페인을 알아야 세계가 보인다!' 라는 말은 전형적인 책을 위한 광고이긴 했지만, 스페인의 역사를 통해 영원한 제국도 없으며 다만 문화는 영원히 남는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실감할 수 있던 것은 아주 유익했다. 


 위에서 이 책의 아쉬웠던 부분이라고 언급했던 활력과 유산은 간단히 말해 스페인의 문화, 관광의 이모저모라 할 수 있다. 수박 겉 핥기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저자가 너무 대표적인 항목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 흥미가 생기다 말았다. 사진이 풍부하게 실리지 않았더라면 아쉬움은 더했을 텐데 책의 디자인이나 수록된 사진들이 워낙에 예쁘게 잘 뽑혀 시각적인 만족도가 큰 편이었다. 

 인문학 책은 가끔 가독성보단 정보의 풍부함과 정확함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스페인에 관심이 생겼거나 스페인에 관광이나 일 문제로 가야 할 사람을 위한 '맛보기'의 성격을 띄고 있는 지라 - 이 책은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에 발간됐다. - 전자의 성격에 집중한 감이 있지만 언어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어 생각보다 깊이가 얕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다음에 읽고 있는 책인 <두 개의 스페인>에 비하면 아무래도 여러 부분에서 깊이가 떨어지지만 어찌 됐건 간에 맛보기의 역할엔 아주 충실했으니까 말이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을 읽은 다음 1년 내로 스페인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지금 스페인에 갈 수 있으려나? 진지하게 검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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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 10 - 완결
나카자와 케이지 글.그림, 김송이.익선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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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맨발의 겐>은 어렸을 적 도서관에서 숱하게 표지를 봐왔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가지 않았던 만화다. 원자 폭탄 투하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너무 고어하게 묘사했다는 것과 으레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하고 관심을 차단한 것 같다. 하지만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 작품이 명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이유는 원자 폭탄의 피해자인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실감나게 그린 것보다도 경이로울 정도의 균형 잡힌 반전주의를 꼽을 수 있겠다. 피해자 코스프레 만화라니, 작가에게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이 정도면 혐일 만화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적나라하게 비판해 한국인인 내 속이 다 시원했다. 

 예전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자료관에 갔을 때만 해도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는데 <맨발의 겐>에선 종종 자기 연민에 빠지긴 하나 기본적으로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원자 폭탄 투하라는 비극의 원인과 후폭풍을 바라보고 있어 자료관보다 유익했다. 1940년대, 사람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전쟁에 모든 것을 건 당시 일본인들의 추한 모습과 그 안에서 전쟁을 비판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 이들이 주변으로부터 '비국민'이라며 이지메를 당하고, 원자 폭탄을 맞은 다음에 히로시마 사람들이 이웃 지방 사람들에게 차별당하고 그 안에서 조선인도 차별당하고, 후에 패전국인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에게 인권을 '정당하게' 유린당하는 일본인들, 원폭 후유증으로 돌발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 등 실제로 겪지 않고서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인간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다. 인면수심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은데, 이는 일본인만의 특성이 아닌 상황이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드러낼 모습인 것 같아 차마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봐...' 하고 우스갯소리는 하지 못하겠다. 그 말은 작가의 가치관과 어울리지 않는다. 


 숱한 비극을 겪고도 멘탈을 유지하는 겐과 그의 가족들과 유사 가족들의 생존력은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고 단지 전쟁에 휘말렸을 뿐인 민간인들이 갖은 고생을 하는 모습에서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그전까지 일본인들이 어른들에게 '전후의 일본의 페허 속에서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며 치켜세우는 게 못마땅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진심으로 그들의 삶의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원인은 다르지만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나라 어른들과도 모습이 겹쳐졌다. 하여튼 진작에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무턱대고 일본이라고 열을 올리기 전에 나라 대 나라의 갈등이나 전쟁으로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혜안을 기를 수 있었을 텐데... 왜 이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지금만큼 잘 이해했을까 싶기도 하다. 교육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내용이지만 나가사키나 히로시마의 원폭 자료관을 가보지 않은 어렸을 때의 내가 과연 이 책의 반일, 반미 성향이 잘 와 닿았을까? 말인즉슨 어느 정도의 역사적 식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맥락 파악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한때 소년 점프에 연재됐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그래, <원피스>가 연재되고 있는 소년 만화 잡지에 이 작품이 한때 연재됐다고 한다. 그마저도 사상의 문제로 연재 잡지가 여러 번 바뀌긴 했다지만 말이다. 다루는 내용을 보면 일본 극우들한테 분서당하거나 작가가 납치돼서 코렁탕을 먹지 않은 게 믿기지 않는데 여차저차 무사히 1부가 완결이 된 게 다행이다. 


 겐이 도쿄에 그림을 배우러 가면서 끝이 나는데 얘길 들어보니 원래 도쿄에서의 이야기를 다룬 2부도 그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극우들한테 압박을 받기라도 한 것인지 연재는 불발됐고 끝내 2부는 실현되지 못하고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가 작고해 2부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상상의 몫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원폭 투하라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 속에서도 살아남은 겐이 자신의 평화 이념을 어떻게 국경 없는 언어인 그림으로 세계에 전달할지 몹시 기대됐는데...... 아직까지도 뻔뻔스럽게 죗값을 치르지 않은 일본의 전범들이 많아 겐과 작가인 나카자와 케이지의 신념이 미처 실현되지 못한 게 정말 속상하다. 여운 있는 결말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림체를 비롯하여 어딘가 어설픈 일본어 표기, 옛날 스타일의 좌우 반전 인쇄 등 옛스러운 느낌이 많은 작품이었지만 통통 튀는 캐릭터나 드라마틱한 전개, 지루할 틈 없이 터지는 유머 코드가 10권 분량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단숨에 독파하게 만들었다. 가치관 못지않게 만화가로서의 역량도 수준급이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한다. 검색해보니 에세이인 <나의 유서 맨발의 겐> 외엔 찾을 수 없었지만... 최근 미즈키 시게루 <전원 옥쇄하라!>가 최근 출간되기도 했으니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부디 이 기대가 이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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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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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베네수엘라는 석유라는 압도적인 자원이 있음에도 지도자들의 연이은 실책으로 인해 치안이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남미 국가 중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치안이 최악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베네수엘라라는 나라를 잘 몰랐던 주제에 - 오히려 이 책을 읽고서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됐을 정도다. - 이렇게 '최악'이란 단어를 쓰는 데엔 이 책이 베네수엘라 작가가 쓰는 자국 디스를 베이스로 뒀기 때문임을 밝힌다.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베네수엘라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 아멜라이다 팔콘이 이웃집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 통칭 '스페인 여자의 딸'의 시체를 발견한 뒤 그녀의 신분을 위장하고서 스페인으로 도주하려는 이야기 <스페인 여자의 딸>은 정말이지 베네수엘라의 가감 없는 현실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설마 이게 현실일까 싶지만 아마도 현실일 것 같다는 게 더 소름 돋는 일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한국어를 쓰는 외국이 없기에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신분을 위장하려는 주인공의 대담함이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다가왔다. 언어적인 어려움 없이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감도 안 잡히므로. 아무튼 주인공이 신분 위장을 망설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말의 미련? 절대 아니고, 자신이 신분을 위장하고 스페인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들켰을 때 돌아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 그것만이 그녀가 행동을 망설이는 이유였다. 엄청난 수위의 잔혹함으로 점철된 보복은 거의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해 살짝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는데, 이렇다 보니 주인공이 망설이는 이유나 고국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주인공이라고 아예 베네수엘라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추측할 수 있는 요소로 유럽 스페인어의 'z' 발음에 대한 주인공의 시선이나 베네수엘라 건국 영웅과 그의 조력자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주인공의 감정을 꼽을 수 있다. 전자는 유럽 스페인의 'z' 발음이 영어의 'th' 발음, 이른바 번데기 발음과 유사한 것에 비해 남미 스페인의 'z' 발음은 거의 's' 발음에 가깝고 아이러니하게도 남미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오리지널 'z' 발음을 좀 이상하게 여긴다는 점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스페인 군인과 원주민까지(!) 몰아내고 오직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자신들만이 이 땅(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의 북부 지역)의 주인이 될 정당성이 있다며 독립을 주장한 건국 영웅 볼리바르의 이야기를 염두에 둘 필요성이 있다. 

 이 두 요소가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는, 30년 일제강점기를 겪은 뒤 일본과 관련된 흔적을 약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우려고 했던 역사를 가진 한국인으로서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사람들이 국가를 세운 역사와 두 문화가 혼합된 자신들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퍽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온전히 스페인의 오리지널 문화(언어)가 아닌 혼합된 자신만의 문화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이제는 고국을 등지고 스페인으로 가는 것말곤 선택지가 없는 주인공의 처지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언어도 통하고 얼추 문화도 비슷할 테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으로 위장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신분 위장 자체가 범죄인 데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베팅이니 그를 강제하고 있는 고국에 주인공은 애정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원망하면 또 모를까. 하지만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주인공은 신분 따위가 아닌 자신의 운명, 자신의 운명을 둘러싼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새삼스럽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치안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된다. 이런 상대적 우월감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을 알지만 말이다. 


 소재나 배경은 흥미롭지만 가독성이 약해서 완독하는 데 다소 힘든 작품이다. 책의 시놉시스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중간에 덮어버렸을 것이다. 난 이러한 원인을 세 가지라 생각하는데, 일단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것, 상대적으로 낯선 남미 문학이라는 것, 그리고 역자가 아직 번역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선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 스페인어 문학에 대한 소비가 영미 문학이나 일본 문학에 비해 턱없이 적어 번역가들의 전문성이나 경험이 부족한 감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알게 모르게 반영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가 자기 입장에선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스페인이나 남미 문학이 좀 더 각광을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아쉬움이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 자체가 신분 위장 이야기치고 전개나 결말이 시시하고 허무한 게 아쉬웠지만 자국 이야기 디스를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해준 작가 덕에 진솔함 하나는 끝내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나 우리나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아까 위에서 말했지만 이런 작품들을 통해 스페인어 문학이 차례차례 소개됐으면 좋겠다. 예전에 찬호께이의 <13.67>이 대히트를 치고 중화권 추리소설이 많이 소개됐던 것처럼.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마냥 현실감 없는 바람은 아니리라 본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 248p



오직 한 글자만이 ‘출가‘와 ‘출산‘을 가를 뿐이다. - 2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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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갱은 셋 세라 명랑한 갱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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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명랑한 갱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를 접했다. '내가 강도를 하는 게 더 낫겠다.'는 황당한 이유로 모인 4명의 은행 강도는 이번에도 어처구니 없이 위기에 몰리는데, 상대가 워낙 저질이다 보니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처럼 조직 자체가 와해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엉뚱한 개그 캐릭터 못지않게 빌런을 묘사하는 것에도 재주가 있는 이사카 코타로는 - 데뷔작 <오듀본의 기도>의 시로야마, <사신의 7일>의 혼조, <마리아비틀>의 왕자가 대표적일 텐데 이 작품의 히지리도 유형은 달라도 이들에 견줄 만한 악인이었다. - 이번 작품에서도 강렬한 악당을 선보인다. 차이점이 있다면 대놓고 악당이 아닌 법으로는 재단하기 애매한 기레기 중에 상기레기인데 엄연히 범법자인 명랑한 갱들로선 맞서기 은근히 껄끄러운 상대라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발하는 요소였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서 미카엘이 기자로서의 윤리를 아웃사이더인 리스베트에게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명랑한 갱은 셋 세라>에서는 윤리 따위 완전히 씹어먹은 개차반 인성의 기자가 나와 공분을 산다. <마리아비틀> 이후로 또 한 번 오랜만에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통해 허구의 대상에게 적대심을 품었는데... 완벽하진 않아도 적절한 방식으로 응징을 당해 쾌감이 있었다. 무분별하게 혀를 놀린 자, 마찬가지로 혀에 자멸하리라. 다시 말하지만 히지리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응징이 약한 감은 있으나 경찰이 아닌 명랑한 갱들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으리라. 아니, 오히려 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응징을 했기에 그나마 더 쾌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체포를 당하는 정도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완벽주의자이자 거짓말을 간파하는 나루세, 인간에겐 환멸을 동물에겐 무한한 애정을 품는 구온, 생체 시계를 가진 숙련된 드라이버 유키코, 그리고 카페 사장이나 은행 강도도 어울리지 않는 참된 예능인 교노까지, 완벽한 개성과 케미를 자랑하는 '명랑한 갱'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인 듯하다. 후기에 따르면 작가는 은행 강도 이야기를 가볍고 명랑하게 써도 되는지 고민한 모양이지만 명랑한 갱들이 기본적으로 선을 넘지 않는 의적에 가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소설이 꼭 올곧은 얘기만을 할 필요는 없겠단 생각에 신작을 냈다고 한다. 독자로서 참 다행인 일인데, 전작에 뒤지지 않는 밝고 건전하고 재밌는 은행 강도 이야기의 신작을 본 것도 좋지만 작가가 고민을 한 보람이 있게 재밌는 한편으론 묵직한 부분도 있어 더욱 쉽게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온갖 저급하고 분별 없는 기사를 써갈기는 기레기, 그 기레기의 기사를 아무런 분별도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독자라고 내세우며 '알 권리' 운운하는 기레기... 대책 없는 악순환에 휘말려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새삼 주목한 이 작품은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상상 그 이상으로 쓰레기 인성의 소유자인 히지리를 통해 우리가 악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법의 심판 그 이상의 무언가임을 불현듯 깨닫게 해준다. 그래, 이런 놈에겐 사형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다. 


 히지리가 소름 끼치는 이유는 간이 부었는지 명랑한 갱에 관한 기사를 쓰겠다고 당사자들한테 직접 협박하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행위를 끊임없이 정당화하는 천박한 사상 때문인데, 비록 무력은 별 볼 일 없을지언정 사상이 너무 위험해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사상이 위험한 놈들은 간혹 죽음조차 큰 위협이 되지 않기도 하는데, 히지리는 그 정도로 맛탱이 간 작자는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왔는지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 물론 히지리는 반성하지 않겠지만. - 그를 파멸로 몰고 간 명랑한 갱의 작전은 제법 적절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통쾌하기 그지없다. 

 아마 이 시리즈도 후속작이 계속 나올 듯하다. 이사카 코타로의 '킬러' 시리즈, '사신 치바' 시리즈와 더불어 이 시리즈도 만족스러웠는데 이 작가의 시리즈는 늘 옳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최초의 시리즈 캐릭터인 구로사와 등장하는 작품을 요 몇 년 동안 못 읽은 것 같은데 한 번 찾아봐야겠다. 아직 이 작가의 작품 중 못 읽은 작품이 많아 참 설렌다. <칠드런>의 후속작 <서브마린>도 읽어야 하고... 바쁘다 바빠! 

스스로 은인이라 칭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 32p



거짓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아마, 그 말도 거짓말일 거예요. - 66p



인간의 나쁜 부분은 타인에게 조언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야. - 2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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