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0 






 베네수엘라는 석유라는 압도적인 자원이 있음에도 지도자들의 연이은 실책으로 인해 치안이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남미 국가 중에서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치안이 최악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베네수엘라라는 나라를 잘 몰랐던 주제에 - 오히려 이 책을 읽고서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됐을 정도다. - 이렇게 '최악'이란 단어를 쓰는 데엔 이 책이 베네수엘라 작가가 쓰는 자국 디스를 베이스로 뒀기 때문임을 밝힌다.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베네수엘라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 아멜라이다 팔콘이 이웃집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 통칭 '스페인 여자의 딸'의 시체를 발견한 뒤 그녀의 신분을 위장하고서 스페인으로 도주하려는 이야기 <스페인 여자의 딸>은 정말이지 베네수엘라의 가감 없는 현실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설마 이게 현실일까 싶지만 아마도 현실일 것 같다는 게 더 소름 돋는 일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한국어를 쓰는 외국이 없기에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신분을 위장하려는 주인공의 대담함이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다가왔다. 언어적인 어려움 없이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감도 안 잡히므로. 아무튼 주인공이 신분 위장을 망설이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말의 미련? 절대 아니고, 자신이 신분을 위장하고 스페인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들켰을 때 돌아올 보복에 대한 두려움, 그것만이 그녀가 행동을 망설이는 이유였다. 엄청난 수위의 잔혹함으로 점철된 보복은 거의 전쟁 상황을 방불케 해 살짝 감각이 마비될 정도였는데, 이렇다 보니 주인공이 망설이는 이유나 고국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물론 주인공이라고 아예 베네수엘라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추측할 수 있는 요소로 유럽 스페인어의 'z' 발음에 대한 주인공의 시선이나 베네수엘라 건국 영웅과 그의 조력자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주인공의 감정을 꼽을 수 있다. 전자는 유럽 스페인의 'z' 발음이 영어의 'th' 발음, 이른바 번데기 발음과 유사한 것에 비해 남미 스페인의 'z' 발음은 거의 's' 발음에 가깝고 아이러니하게도 남미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오리지널 'z' 발음을 좀 이상하게 여긴다는 점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스페인 군인과 원주민까지(!) 몰아내고 오직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자신들만이 이 땅(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의 북부 지역)의 주인이 될 정당성이 있다며 독립을 주장한 건국 영웅 볼리바르의 이야기를 염두에 둘 필요성이 있다. 

 이 두 요소가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는, 30년 일제강점기를 겪은 뒤 일본과 관련된 흔적을 약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우려고 했던 역사를 가진 한국인으로서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사람들이 국가를 세운 역사와 두 문화가 혼합된 자신들의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 퍽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온전히 스페인의 오리지널 문화(언어)가 아닌 혼합된 자신만의 문화나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이제는 고국을 등지고 스페인으로 가는 것말곤 선택지가 없는 주인공의 처지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언어도 통하고 얼추 문화도 비슷할 테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으로 위장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신분 위장 자체가 범죄인 데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베팅이니 그를 강제하고 있는 고국에 주인공은 애정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원망하면 또 모를까. 하지만 만약 바꿀 수 있다면, 주인공은 신분 따위가 아닌 자신의 운명, 자신의 운명을 둘러싼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참 새삼스럽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치안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걸 감사하게 된다. 이런 상대적 우월감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을 알지만 말이다. 


 소재나 배경은 흥미롭지만 가독성이 약해서 완독하는 데 다소 힘든 작품이다. 책의 시놉시스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중간에 덮어버렸을 것이다. 난 이러한 원인을 세 가지라 생각하는데, 일단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것, 상대적으로 낯선 남미 문학이라는 것, 그리고 역자가 아직 번역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선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 스페인어 문학에 대한 소비가 영미 문학이나 일본 문학에 비해 턱없이 적어 번역가들의 전문성이나 경험이 부족한 감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알게 모르게 반영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가 자기 입장에선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스페인이나 남미 문학이 좀 더 각광을 받는다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아쉬움이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 자체가 신분 위장 이야기치고 전개나 결말이 시시하고 허무한 게 아쉬웠지만 자국 이야기 디스를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해준 작가 덕에 진솔함 하나는 끝내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나 우리나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아까 위에서 말했지만 이런 작품들을 통해 스페인어 문학이 차례차례 소개됐으면 좋겠다. 예전에 찬호께이의 <13.67>이 대히트를 치고 중화권 추리소설이 많이 소개됐던 것처럼.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마냥 현실감 없는 바람은 아니리라 본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 248p



오직 한 글자만이 ‘출가‘와 ‘출산‘을 가를 뿐이다. - 29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