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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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쓰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는 틀리지 않은 문장일까? (78)

저자의 이야기는 이렇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람의 관점을 고려해 이 문장을 고치면 가령 이 신발을 신으면 네 뒤꿈치가 까진다.” 정도가 무난하겠지요. 더 한국어다운 문장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로 하면 능동성을 좋아하는 훌륭한 한국어 문장이 됩니다. “이 신발은 뒤꿈치를 까지게 한다.” 보다는 훨씬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문장은 틀린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사소한 것부터 언급하자. 입말로서야 이런 경우가 매우 빈번하지만, 아직도 문어에서 주격 조사 두 개를 나란히 제시하는 것은 한국어에서 어색한 일이다. 최소한 뒤꿈치가 이 신발은 까진다.”로 써서, 앞의 주격 조사 와 뒤의 주격 조사 사이를 이격시키려는 노력이라도 했어야 한다.


그것을 허용하더라도 이 문장은 사실 이상하다. 이렇게 주격이 두 개가 나란히 왔다는 것은 당연히, 둘 중의 한 주체는 안긴문장의 주체이고, 한 주체는 안은문장의 주체라는 것일 텐데, 이렇게 쓰면 그 관계조차 매우 불분명해진다. 신발이 까진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므로 신발은이 안은문장이고, ‘뒤꿈치가 까진다가 안긴문장일 텐데, ‘신발은을 닫는 서술어가 없다. 한국어에서 서술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문장의 핵심요소라서 이렇게 되면 독자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정말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 문장은 신발이라는 것에 뒤꿈치가 있어서 그 뒤꿈치가 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도로 저 문장을 썼다면 더 없이 옳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이 문장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일부러 혹은 자연스럽게 이 신발은 뒤꿈치를 까지게 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꼭 안은문장으로 쓰려면,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지게 만드는 신발이다.”라고 써야 하는데, 영어에서 이런 식의 문장구조는 필연이지만 한국어에서 이 신발은 ~신발이다.” 식의 문장구사는 세련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별다른 부가정보도 없이 동일 단어가 한 문장에 두 번씩이나 등장하는 것은 확실히 한국어에서는 이상하다. “그것의 문제는 ~다는 것이다.” 라고 쓰지, “그것의 문제는 ~문제이다.”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문장성분의 생략이다. 한국어는 문장성분의 생략이 자연스럽고, 이 문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해 보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장성분의 생략은 반드시 다른 어휘의 형태는 남겨두고서 자신만 생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략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예 다른 문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생략이라면, “뒤꿈치가 까진다.”는 이미 완결된 문장이므로, “이 신발은쪽이 생략된 것이고, 그 뒤에 어떠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복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문장은 관용구가 아니므로, 도무지 이렇게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대화에서라면 이 신발은 {너무 딱딱하여서,} 뒤꿈치가 까진다.” 식으로 아예 문장의 지형도를 재편하는 어떤 말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무리 없이 추측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신발은 {너무 부드럽지만,} 뒤꿈치가 까진다.”일지 누가 알겠는가? 상상을 통해 정보를 덧붙여야 하는 것은 생략이 아니다.

     

한국어의 서술어에 대하여 첨언을 하겠다. 이 문장이 만약 대화라면, 다 생략하고 서술어인 까진다.”만 말해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국어에서 서술어는, 시제’, 존칭어’, 동사까지다’, 등등의 정보를 모두 다 담고 있기 때문이다사실 더 많이 축출해낼 수도 있지만 생략한다.


 한국어의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문장에 서술어를 쓰고 또 강조하는 경향 때문에, 안에 담긴 문장이 얼마나 복잡하고 길든 상관없이, 맨 뒤에 꼭 한 개의 서술어를 써야 하고, 이는 한국어에서 안은문장과 안긴문장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바깥의 안은문장이 서술어를 끝으로 안의 안긴문장을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양을 취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안긴문장이 길 경우 후각이 예민한 나는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좋아했다.” 대신에 비누 냄새를 풍기는 그를 후각이 예민한 나는 좋아했다.” 식으로 안은문장의 주어를 서술어 앞으로 옮기거나 하는 요령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요령껏 이동시킨 것이지 이것이 본래 문장 정형은 아니다.


생각하기로는, 안긴문장을 닫을 때까지 안은문장의 일부가 문두에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므로, 영어에서 관계대명사 등으로 그렇게 하듯이, 따로이 완결된 문장들이 매달리게 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은데도, 신기하게 한국인들은 바깥의 문장이 엄청나가게 길어지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어에서도 정말로 문장을 안고 안기게 만든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신기할 때가 많다. 오히려 문어에서는 이런 것을 위에 들었던 예처럼 피하는 경향이 있다.

    


 

 

두서를 길게 썼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여러 고찰들은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내가 판단하기로 합당한 것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특히 한국어에서 주어의 생략이 한국어가 주체성을 강조하여서 그렇다고 보는 것은 곱씹어 볼만하다. 한국어는 어떤 언어보다 역동한다. 한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장담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꼭 학문양식으로 정립하여 알고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러한 언어구조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도 바로 지적하듯이 한국어에서 특히 자유롭게 생략되는 어구는 주어이다. 다른 문장 성분도 생략 가능하지만 주어만큼 활발하게 생략되지는 않는다. 반면, 영어에서 주어가 없는 능동형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영어에서도 주어가 꼭 필요하지 않을 때는 목적어를 주어자리로 올린 피동표현을 쓴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능동이든 피동이든 상관없이 주어는 곧잘 생략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소설의 모든 문장이 나는으로 시작하는 것을 한국인은 자연스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애초에 한국어는 능동형 중심으로 언어체계가 짜여 있다. 영어 단어에는 그 기본형이 '~게 하다'라는 사동형, '~되다'라는 수동형인 경우가 넘쳐나지만, 한국어에서 기본형 부터가 사동형이거나, 수동형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있는 동사를 수동형으로 만드는 것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영어를 번역할 때마다 항상 마주치는 문제이다. 질문하다를 의미하는 ask의 수동형은 be asked 인데 문법 상으로만 이야기하면, 이것은 '질문을 당하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해서 내어놓으면 십중팔구 비문이라는 지적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질문을 받는다'라고 옮겨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받다', '받는다'는 결코 수동형 표현이 아니다. 무언가 사연을 암시하러 이 말을 다시 수동으로 바꾸어서 '받게 되었다'로 만들 수는 있지만, 특정한 목적 없이 이렇게 쓴다면 당장에 밑줄이 그어질 것이다. '받아진다'는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한국어에서 질문하다에 직접 대응하는, '질문 당하다'의 피동 표현은 없는 것이다. 더 깊게 생각하면 한국인들에게 질문은 주체가 원하면 받거나, 원하지 않으면 받지 않거나 하는 것이지, 누군가 때문에 주체가 받음을 당하게 되거나, 받음을 당하지 않게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항을 보면서도,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한국어가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이기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한국어에서 주어를 쉬이 생략하는 이유는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체의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문화라 개성이 함몰되어서가 절대 아니다!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내 이야기는 의 이야기이고, 네가 하는 이야기는 상대가 자기자신의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한국어에서 대화는 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등한 두 주체 의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본원과 한국인 특유의 평등의식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한국어에서는 주어를 쓸 때도 관념이 비생물을 잘 쓰지 않고, 생물체만을 그 자리에 넣으려는 경향이 짙다. (홍익인간?) 예컨대 한국어로 "아름다움이 나를 매혹했다."는 '아름다움'이 주어로 극대화하여 묘사한 문장으로, "아름다운 그는 나를 매혹했다."와 달리 특별한 느낌을 불러오지만, 불란서 사람들에게 관념이 주어자리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불어"아름다움이 나를 매혹했다."는 특별한 수사적 장치가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문장이다. 어린왕자만 읽어보아도 이러한 문장이 정말이지 넘쳐난다.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한쪽 문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불란서에서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다른 ’, 그들에게는 의 이야기를 옮겨 적을 때도, 대명사 정도를 달리 써서 분간할망정, 격을 달리하여 쓰지 않는다.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영어에서는 삼인칭 단수가 주어일 때 동사에 s를 붙이는 식으로 아주 미약하게만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독일어, 라틴어, 특히 불어에서는 인칭에 따라 대명사는 당연히 달리 쓰는 것이고, 동사의 형태 자체를 다르게 써야 한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의 이야기가 아니라, ‘와 내가 달리 받아들여야 하는 의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타자는 나에게 닥친 하나의 상황이지만, 한국인에게 타자는 내 밖에 서 있는 다른 주체이다. 이 책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다루는 저서가 아니므로, 이러한 사유를 끌어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유거리이다. 이 이야기는 차차 덧붙여 보자.


이 뿐만이 아니라, ‘~되다식의 표현 보다 ‘~하다식의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 저자의 고찰대로 부사어의 발달 등등은, 한국어가 주체성을 유독 강조하는 언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영어의 폭격을 받는 동안, 우리는 이미 피동형 표현들을 너무나 많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건축되다보다 건축하다가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힘들게 생각해낼 정도가 되었지만, 문장을 고되게라도 바꾸어보면 많은 경우 능동형 표현이 문장을 생생하게 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처음에 나만해도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에라고 썼다가 고쳤다, 그밖에도 이 글에서 고쳐야 할 피동표현은 넘쳐난다, 손 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 내 경험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서술어만 바꾸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긴 문장일 경우 문장의 형태 자체를 뒤틀어서 바꾸어야 하므로, 쉽게 도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 그렇게 하면 앞 뒤 문장을 동시에 다 손보아야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냥 두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최초의 한글세대 작가라고 자부하는, ‘이청준’, ‘김승옥’, ‘이문열같은 대작가만 하더라도, 피동형 표현에 그렇게까지 큰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최인훈의 경우는 조금 달라서, ‘광장의 연거푸 해낸 개작들은 유명하다. 자기만의 문체가 있을 것이므로 강제할 사항은 아니지만 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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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surf 2017-12-11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지나가다 댓글 달아요. ˝이 신발은 뒤꿈치가 까진다˝가 틀렸다고 생각하신다고 하셨는데 이건 완벽하게 우리말 어법에 맞는 문장인데요? 주어가 두개처럼 보이는 것은 보격으로 설명하는 우리말의 특성이기 때문에 틀린 게 아닌데요. 예를 들어, ˝토끼는 앞발이 짧다˝를 보면 아무 문제없는 문장임을 알 수 있죠. 제가 잘못 이해하고 쓴 거라면 죄송하구요. ㅎㅎ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 - 동백 숲길 맑은 그늘 물 끝난 곳 구름 이네
정민 지음, 김춘호 사진 / 글항아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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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별서정원에 대한 역사적 가치를 관련 화첩, 문집, 서간 등을 통하여 고증한 책. 정원의 건축학적 가치에 대한 고찰이 주문이 아니다. 실사사진 보다 실린 유물화폭이 더 가치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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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 표해록 역주
최부 지음, 박원호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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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게 산 책인데 글 몇글자라도 안 남겨두고 넣으면 돈을 날리는 것 같아서. 책상 정리 전에 독후감 남김. 지리역사학을 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책인데, 나는 지리학에도 역사학에도 무지하므로 이 정도로 갈무리함.

 

 

상인(喪人)인 신() 최부(崔溥)는 제주로부터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614일에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최부, 漂海錄 譯註, 박원호 번역, 25.

 

 

최부의 표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첫문장은 최부의 표해기를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이랄 수 있다. 조금더 세세한 정보를 연구서에서 얻어 보자.

  

 

 

최부(1454~1504)는 조선성종 시기의 문신이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로 근무하던 중 성종 19(1488)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13일간의 표류 끝에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해안에 표착(漂着)하게 되었다. 최부 일행 43명은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조선인임이 밝혀져 항주로 이송되었고, 이어 대운하를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가 요동(遼東)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표해록은 최부가 한양에 도착한 직후 성종의 명에 따라 쓴 보고서로서, 표류로부터 중국 여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일종의 중국견문록이다. 당시 조선인이 쉽게 가볼 수 없었던 중국의 강남의 견문에 대한 기술이 특히 조야의 관심을 끌었다.”

박원호, 崔溥 漂海錄 硏究述評, 崔溥 漂海錄 硏究, 19.

 

 

  

상인(喪人)”이면서 "신()"인 사람이 있다. 상중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버지에 대한 예를 다 하여야 하지만, 한편 신하로서 전지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야 하는 사람이다. 이 보고서의 작성은 죽을 때까지 최부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지금도 읽히고 있으니, 불멸의 지위를 선사하기도 한 수고였다. 이 예언적인 문구대로, 효를 받들어야 하는 상인으로서의 지위와 충을 받들어야 하는 일지 편집자로서의 지위는 표류가 끝난 뒤에도 육지에서 더 힘든 표류를 겪게 했던 것이다.

상인인데도 지위를 망각하고 이 일지 작성에만 매달렸다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도덕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꽤 심각한 논쟁거리였다.

  

 

 

성종22(1491)에 성종은 탈상한 최부에게 승의랑 사헌부 지평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임명을 받고 한 달이 지나도 사간원에서 성경을 하여 주지 않았다. 서경이란 그러한 직책을 맡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일종의 동의서이다. 성종이 사간원에 그 까닭을 물으니, 정언正言 조형趙珩은 서면으로 이렇게 아뢰었다. [최부가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여 제주에서 나오다가 중국에 표박하여 많은 시와 글을 지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살아날 길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비록 일기를 지어 올리라는 왕명이 있어도, 마땅히 글을 올려 슬픔을 말하고 바로 빈소로 돌아가야 했는데도 여러 날을 서울에서 묵으면서 태연히 일기를 쓰고 거의 애통한 마음 없이 명교에 대하여 부끄러운 일이 있었기에, 이 때문에 서경을 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성종은 사간원의 처사를 꾸짖었다. [나는 최부가 겪었던 어려움과 중국에서 견문한 것을 알고 싶어 일기로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최부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명령을 받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사간원에서 어찌 이것을 들고 나오는가?!]”

박원호, 崔溥 漂海錄 硏究, 282.

 

 

  

사간원의 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헌부, 나중에는 홍문관까지도 가세하여 최부를 좌천시키고자 하는데, 다행히 성종은 끝까지 최부를 두둔하면서 차차로 벼슬을 올려준다.뒤에 밝히겠지만, 사실 이것은 불행이기도 했다.

표해록을 둘러싼 이러한 후일담은, 기록의 나라 조선 당대에 표해록자체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우선 드러내고, 다음으로 성종기의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강해진 사림과 왕권의 갈등의 일단을 드러낸다. 사림이 성종의 처사에 반대한 이유로서 최부의 처신은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이다. 위 간에서도 미묘하게 드러나고 있다. 내면의 이유는 사림이 개혁적 성향의 이 표해록에 대한 성종의 관심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최부에 대한 성종의 두둔이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비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성종의 의지였다. 그밖에도 많은 정국들이 얽혀있을 테지만, 내 깜냥으로는 여기까지에서 그치겠다.

어쨌든 최부는 승진하려할 때마다 돌아왔던 효를 멀리했다는 비난 속에서도 더 도타워지기만 하는 성종의 신임을 업고서, 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예문관 응교까지 오르게 된다. 처음에 나는 이것이 불행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성종의 최부에 대한 굄은 연산군 때 고스란히 화로 돌아온다. 성종의 권력의지를 대표했던 최부는 무오사화에 더불어 일어났던 갑자사화 때 보복 순위 앞자리에 쓰여서 연산군 10(1504) 1024일 참형斬刑에 처해진다. 최부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 머리는 다음 날 백관 앞에 효시되었다.

    

 

 

 

자신의 죽음까지 몰고 온 표해록의 이러한 파급력을 최부도 글을 쓸 때부터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첫 단어를 喪人으로 쓴 것 아닐까. 최부는 이 뒤로도 지겹도록 자신이 상인의 도()인 효성을 품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 일화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최부 일행이 해적에게 잡혀서 고초를 겪은 후에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뒤에, 다시 표류를 시작하는데, 이 때 누가 조언하기를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으면, 관인인 것이 표시가 되니 이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것이라고 하자, 최부가 단도직입하여 말하길 자신은 상인이므로 그럴 수 없다고 한 예이다. 그러나 그가 이 표류하는 도중 내내 표해록완성을 염두에 두면서 기록하고, 결국에 이것을 성종에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충의 마음이 또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표류기에서 최부의 자아는 두 가지 축으로 찢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다.

는 최부에게 자신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자신을 만들었던 세계 자체에 대한 애정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효가 그토록 중시되었던 까닭은 그것이 단지 가족규범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어남에 대한 성찰이 효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논어를 살펴보자. 도올의 논어한글역주1의 번역을 따른다. “맹의자라는 공자 친구의 어린 아들 맹무백[효를 여쭈었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이다.”](위의 책, 491) 공자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서부터 효는 출발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자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매우 명쾌하게 설한다. , 그러니까 태어난 자기 자신의 돌봄은 부모에게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공연성을 망각하지 않을 때에만, 허무맹랑한 구호가 아니라, 실천적인 윤리가 될 수 있다는 정언이다. 효는 자기애의 유교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동지들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은 최부에게 자신의 임금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멀어져 있지만 자신의 좌표가 속해있던 세계체계와 더불어 민중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충은 단지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쳬계로서 사유하며 자신과 민중을 진정 높이고자 하는 것이 충의 근본적인 의미였다.

 충을 잊지 않은 최부는 끊임없이 조선의 추쇄경추관으로서  몸가짐을 가다듬는다. 충성스러움은 외지에서도 최부에게 조선에서의 자신의 벼슬을 밝히고, 가능한 공무적인 일로서 그곳 사람들을 대하게 한다. 무엇보다 최부가 계속 이방의 풍속을 기록하고, 조선 민중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충언하게 하는 원동력이 충이다.  자신의 보고를 통해 조선의 체계를 움직여서 민중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최부는 믿는듯이 보인다. 효만 받들고, 충은 받들지 않았다면, 표해록이토록 세밀한 보고서 양식을 취할 수 없었다. 이 보고의 가치에 대해서는 위 언급한 도서를 비롯하여 다른 논문들을 참고하라.

 

문제는 이 두 자아를 억지로 구분하여 계급을 정하려는 데에서 생긴다. 일지를 보고한 최부는 충성만을 자랑하며 일지를 썼다고 공격받았다. 공자는 효가 충의 바탕이라고 사유하였는데, 아마도 조선 사림은 이를 아주 경직되게 해석하여 최부 공격의 빌미로 삼았을 것이다. 논어의 위정편에는 이러한 문장이 나온다. [계강자가 여쭈었다. “백성으로 하여금 경건하고 충직하여 스스로 권면하게 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자신을 장엄케 하여 사람을 대하면 백성이 경건하게 되고, 자신이 효성스러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하면 백성이 충직하게 되고, 능력있는 자들을 등용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들을 잘 교화시키면 백성들이 스스로 권면하게 될 것이오.”](위와 같은 책, 562)

우리가 너무나 자주 보아왔고, 불행히도 앞으로도 다시 보게 될 지도자들의 행태, 실제 세계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지시만 잘 내리면 모든 것이 잘 진행되리라 믿는 태도와는 달리, 인본주의자 공자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 곧 세계를 운영하는 일과 겹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것을 근거로 최부가 효라는 태어남의 돌봄도 행하지 않으면서 충이라는 세계 속 책임을 받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까지 오판하지 말자. 상인의 복장을 끝까지 고수하는 최부 본인 조차도 이러한 오해를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덧붙여진 변명들 아닐까? 나는 실제로 최부가 모든 선택의 사항 속에서 그가 기록한 것처럼 잘못된 효성만 고집하는 강박을 보이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많지는 않지만, 표류 중에 배 안에서 내리는 빗물을 모을 곳이 부족하자 짐 속에 있던 자신의 옷을 주면서 젖게 하여 쓰라고 내주는 식의 일화들도 있다. 우리에게 와닿는 최부의 문장들은 사실 그렇게 절실한 묘사들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효성스러운 것이다공자는 틀리게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자기자신이 효성스러움을 실천하여 백성의 충실함을 기도한 일이다.

자, 앞서 공자도 말했듯이 살아남는 것이 효이다. 태어난 타인과 태어난 자신의 몸을 아울러 돌보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달리 말해 자비롭고 효성스럽게 살아남아야 한다. 사실 자비롭지 않았다면 일행 속에서 최부는 축출 당했을 것이다. 효성스럽지 않았다면 자신과 타인의 극렬하기 짝이 없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최부는 효성스러움과 자비로움을 실천한 것이다.

그 후에 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이 사회에서 영원히 공명할 수 있도록 치열하게 기록해야 한다. 최부는 표해록을 쓰는 것으로 그 치열함을 증명하였다. 최부는 표해록으로서 그 사람들과 자신의 모험을 조선사회에 각인하고자 하였다. 최부는 이국의 제도를 관찰할 수 있었던 자신이 겪은 일련의 경험을 고백하면서 조선사회의 폐쇄성을 자연스럽게 고발한다. 그것은 성종과 시대정신, 그리고 천심이 원했던 충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최부의 표해록은 현인이 갈파했던 대로의, 효행인 동시에 충직한 행위였다. 이로써 최부를 비난했던 사람의 논리가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부는 충을 따르기 위해 효를 저버린 사람이 아니라, 기록하는 것만이 충과 효가 겹쳐져서 제대로 빛나게 되는 유일한 일임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인(喪人)인 신() 최부(崔溥)라고 썼다. 달리말해, 그는 잘 살았던 사람이었다.

 

여기, 활인(活人)이고자 하였던 최부의 호령은 조선사회 지배층에게 향하는 일갈 아니었을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울리고 있는.

 

 

해적을 만나 바다에 다시 표류한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 하는 일이 점차 전만 같지 못하여졌습니다. 배가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지 오래 되자 수많은 구멍과 틈이 생겼고, 막는 즉시 곧 터져 새어 들어오는 물을 이루 다 퍼낼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물새는 것이 이러하고, 뱃사람들 마음이 흩어진 것이 또 이러하니, 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보 등 6명과 함께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상리 이하 10여명 또한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비가 내렸습니다. 어느 큰 섬에 이르렀지만 썰물의 힘에 밀려 정박할 수 없었고 배는 바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위와 같은 책,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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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1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저도 표해록을 읽을 때 나목님의 글을 참고하겠습니다. 지도 그림은 따로 저장하고 싶어요. ^^

나목 2015-04-02 04:31   좋아요 0 | URL
저 그림은 제가 작성한 것이 당연히 아닙니다. 오해 안하셨기를. 저 지도 말고도, 구글에 표해록이라고만 쳐도 지도가 다종다양하게 검색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엄청 유명한 책이라서, 관련 논문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 전2권 - Vol. 1: 작품들, Vol. 2: 소통 표현주의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도록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구입하지 말아야 할 책. 화평과 습득한 철학지식의 나열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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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0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목 2015-04-01 03:58   좋아요 0 | URL
이 책 받고 돈이 아까워서 눈물 흘렀습니다. 전시장에서는 아마 도록만도 팔지 않을까 싶어요. /게다가 외국저자가 쓴 다른 책이 있던데, 그걸 사다 봤어야 했던 것을.

2015-04-01 0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목 2015-04-01 04: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그책을 남산도서관서 빌려보면 손해를 좀 줄일 수 있을듯. 이책은 또 원래 비싼 종이가 그런지, 잡고 있으면 종이가 금새 젖음. 일반 도록 코팅지와는 다름. 글이 아니라, 주최측서 강신주 이름이 필요했었나봅니다. 다른 자들이라도 해 안입게 글 남겼습니다.

2015-04-01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목 2015-04-01 13:29   좋아요 0 | URL
코엔 솔랄 이 쓴 로스코 평전이 있습니다. 그 책이 훨씬 유익합니다. 전시장가면 도록만도 팔지 않을까합니다. 국내서적중 로스코그림은 제일 많이담고 있는것은 사실임. 그밖에 말씀하신 단점을 그대로 지닌 책입니다. 이현령비현령 식의 개념나열.

cyrus 2015-04-01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로스코 이름만 내걸어도 전시회에 관객들이 많이 올건데 강신주를 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로스코 그림이 철학적인 시선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고 해도 전시회와 도록을 강신주와 로스코의 콜라보인 마냥 광고하는 것을 보면 불편해요.

나목 2015-04-02 14:22   좋아요 0 | URL
저도 무얼 이렇게까지 해서 책을 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신주의 글은 별권인데도 본권과 거의 같은 분량을 자랑합니다. 아예 분리시켜서 강신주 책만으로 해서 내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글이거든요. 책값도 그렇게 하였다면 훨씬 저렴해졌을 터입니다. 전시된 작품에 대한 밀도있는 비평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글들이라서.
 
인상주의의 역사
존 리월드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당대 인상주의 예술장을 복원해내는 책. 개별 작품분석이 중심이 아니다. 빈약한 도판은 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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