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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고래 - 그 발굽에서 지느러미까지, 고래의 진화 800만 년의 드라마 ㅣ 오파비니아 14
J. G. M. 한스 테비슨 지음, 김미선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6년 7월
평점 :
살아있는 고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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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M. 한스 테비슨 (지은이), 『걷는 고래 - 그 발굽에서 지느러미까지, 고래의 진화 800만 년의 드라마 오파비니아 14』 , 김미선 (옮긴이), 뿌리와이파리,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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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사는 법을 너무나 오래전에 잊어버린 이 포유류는 그 큰 몸만큼이나 서서히, 그러나 그 몸짓만큼이나 성큼성큼 목적지 북대서양으로 가고 있었다. 적어도 고래는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턱밑에서 일어나는 음파의 반향이 작년과는 약간 다르게 돌아왔지만, 작은 차이는 언제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해류는 제대로 흐르고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수함 때문인지, 달 때문인지, 무언가가 고래를 그렇게 무감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몸이 이렇게나 하늘과 바닥에 동시에 가까워졌을 때가 없었지만, 그저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물의 흐름보다 바람의 흐름에 움직이는 천해(淺海)의 바닷물이 이토록 큰 고래도 옴짝달싹 못하게 밀어 올리는 것이었다. 바다의 밖은 아무것도 떠오를 수 없고, 모든 것이 가라앉기만 해야 하는 곳. 그래서 죽음과도 훨씬 더 가까운 곳이었다.
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몸을 찔러오는 너무나 짧아진 음파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래는 직감했지만, 바다를 끌고, 갈고, 헤쳐서, 그 하이얀 뼛가루를 해변에 끊임없이 뿌려대는 사자(使者)같은 바람이, 바람이, 바람이, 이쯤에 와서는 고래 또한 예외 없이 내몰았다. 한류와 난류가 부드럽게 서로를 얼싸안아서 헤엄칠 수 있었던 심해의 흐름과는 아예 달랐다.
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너무 작은 어항 안에 갇힌 이 포유류는, 이제는 다리도 잃은 지 오래이기에 심해가 아닌 곳에서는 몸을 조금도 돌릴 수 없었고, 심지어 숨을 오래 쉬는 것도 불가능했다. 바람에 모래밭 위를 굴러가는 뼈다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고통이 고래의 정향감각을 아무리 뚜렷하게 할지라도, 그저 밀리고 굴려서 해변으로 밀려나올 뿐이었다. 한 때는 육지에서 걸어 다니던 그 동물이 바다로 가기까지 자신을 탈바꿈할 수 있었던 그 방대한 시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짧은 시간이 서러웠다. 이 시간 안에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다. 그 말은,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갈 동안 고래는 전혀 새로워질 수 없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때는 죽음으로의 정향을 뚜렷이 느끼고 있었을지도. 그 말은, 고래는 해변에서 널브러진 채 죽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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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럴진대, 생사 길에 대한 치기가 있던 젊은 나는 아직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해변으로 올라와 죽는 고래 떼에게서 끝내는 몸까지도 바꾸어버리는 모험심의 현현을 보았었더랬다. 바다에서 태어나 육지로 상경한 뒤에 다시 바다로 귀향한 고래가, 이번에는 다시 육지로 올라오기를 시도한다고 상상했었다. 그리고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마저도 아무렇지도 않은 한 여행일 뿐이라는 것이 이 모험가의 돈오(頓悟)라고 여겼다. 적어도 그 정도의 깨달음은 예비해야 영혼과 몸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 『걷는 고래』와 더불어 지금 생각해보면, 방대한 고래 진화의 역사에서 한 순간도 결단의 순간 따위는 없었다. 결단의 순간이 없었는데, 모험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변에 올라와 죽은 고래도 무슨 대단한 결단을 내린 끝에 그러한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니라, 사소한 착각 끝에 급기야 삶의 밖으로 끌려나온 것일 뿐이다. 결단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아주 사소한 선택은 있었을 것이다.
죽은 고래에게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종을 바꾸어가며 거의 모든 것을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시간 아래에서라면 그 선택은 너무나 사소해서 얼마든지 즉시 다른 선택으로 덮을 수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실패한 시도가 훨씬 많았겠지만--오랜 시간 뒤에는 지금 '고래'라는 시도도 실패작으로 결론 날지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러니 완벽히 포유류였던 걷는 고래가 어떤 결단 아래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젊은 사람의 상상일 뿐이다. 한 개체가 아니라,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는 방대한 시간 속에서, 처음에는 단지 오가기 시작하다가 바다 곁에서만 살기 시작하다가, 끝내는 바다 안이 아니면 살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 기나긴 과정을 추적한 책이 바로 『걷는 고래』이다. 여기서 이 책이 말하는 고래의 진화사를 옮기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다. 요약만을 하자면 이 책은 고래가 우주에서 고래로서 성장해온 시간에 대한 추적을 담고 있다. 이 기나긴 시간의 결과로 지금의 고래는 지금의 고래의 영혼을 지니게 되었다. 몸과 영혼은 반드시 아주 조금씩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아래 인용은 글쓴이가 자기연구를 가장 맛깔나게 함축한 부분이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나는 고래의 진화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정말 좋아하고, 내 청중은 초등학교 오학년생을 비롯해 우리 동네 봉사클럽을 거쳐 국제회의에 참석한 고래학자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하다. 고래의 진화가 얼마나 극적인가를 적시하기 위해, 나는 평소에 사람들에게 두 가지 환상적인 탈것을 떠올리도록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탄환열차와 핵잠수함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덜 무서운 배트모빌과 비틀스의 노란 잠수함을 떠올리라고 한다. 고래는 매우 정교하게 완성된, 육상생활에 적응된 몸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약 800만년 만에, 대양에 완벽하게 조율된 몸으로 바꾸었다 나는 청주에게 공학자 한 팀을 모아서 배트모빌을 해체한 다음, 그것의 부품들로 노란 잠수함을 짓는 상상을 해보라고 한다. 땅 위에서 잘 작동하는 거의 모든 것이 물속에서는 비참하게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이동기관을 비롯해 감각기관, 삼투압 조절 기관, 번식기관에 이르는 모든 기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진화 과정에 있던 모든 중간 종은 자신의 환경에서 제구실을 했다. 이 조건을 보탠다는 것은, 공학자들이 퇴근할 때마다 그래도 여전히 작동하는 탈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불가능한 일일 테고, 그래서 이것이 정말로 얼마나 놀라운 전이였는가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제는, 놀랍게도, 그것이 화석들에 의해 전부 입증된다.
그러한 대중강연 뒤에 내가 가장 흔히 받는 질문은 고래가 왜 물로 들어갔느냐는 것이다.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지만, 모든 세부 사하아에서 물러나 눈을 가늘게 뜨면, 흐릿한 영화 한 편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너구리만 한 우제류들이 꽃과 이파리를 뜯어먹다가, 위험을 피해 물소겡 숨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포식자로서 물속에 숨어 먹잇감을 정찰하며, 물속에 머물렀다. 뒤이은 후손들이 빠르게 헤엄치는 범을 알아냈고, 새로운 먹잇감을 쫓았고, 땅 위에서 돌아다니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버렸다. 다양한 방식의 헤엄을 실험한 뒤, 이들은 마침내 자신의 몸을 미끈한 유선형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육지에 대한 모든 유대가 끊어졌다. 한 집단이 먹잇감의 위치를 찾아내려고, 이미 고도로 발달한 청각계에 소리 방출계를 추가했다. 바로 반향정위를 하는 이빨고래다. 다른 집단은 크릴 들판에서 크릴을 뜨는 네에 쓰이는 수염을 진화시켰다. 바로 수염고래다. 뭍에서 물로 보내는 단 하나의 동인 따위는 없었다. 고래목은 일직선이 아닌 작은 단계들을 밟았고, 대부분이 어떤 식으로든 섭식 및 식습관과 관계가 있었다. 그러한 단게들은 각각이 우발적이었고, 실패한 실험들이 허다했다.
우리가 이미 무엇을 알건 흥미로운 질문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한 의문은 특히 중대하게 느껴진다. 포유류는 일반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파충류나 어류 같은 집단보다 제약이 많은 청사진을 기초로 지어졌다. 설계의 모든 면에서 포유류는 어류, 양서류, 파충류보다 더 많은 제약을 받는다. 하지만 고래목은 예외다. 이들은 포유류의 법칙을 우롱하며 이빨의 수, 가락뼈의 수, 엉치앞뼈의 수가 마구 왔다갔다 한다. 마치 발생을 지배하는 매우 기본적인 포유류의 법칙 일부가 깨진 것 같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보통보다 훨씬 큰 편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모든 고래목이 겉으로는 꽤나 비슷해보인다. 모두 유선형의 몸을 갖고 있고, 기본적으로 터링 없고, 목이 없고, 앞다리 대신 지느러미발이 있고, 뒷다리를 없애버렸고, 꼬래 대신 수평의 꼬리느지러미를 진화시켰다. 이들이 느슨한 청사진을 토대로 지어진다면, 어째서 겉으로는 그토록 비슷한 걸까? 내 중대한 의문은 청사진을 느슨하게 만든 유전적 스위치들, 그리고 그 스위치들이 보수적인 외형의 모순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걷는 고래』, 265~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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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랄 단 한 번의 돌연변이가 지금의 고래를 순식간에 조물하지 않았다. 사소한 선택의 축적이, 사소한 돌연변이의 연속들과 뭉쳐져 실질의 변화를 이끌었다. 존재가 허공에 떨어져 사는 것이 아니므로, 환경의 필연(서식지)과 시기의 우연(대멸종, 지각의 이동)이 한편 함께 이 변화를 자극했다. 도약이 있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어떤 선택의 경향이, 즉 습성이 도약을 자극하는 것이고, 그러한 도약의 결과를 생존의 요소로 체화하는 것이다. 진화사나 성장사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할 만큼 지구 위에서 고래에게 시간은 풍부했다.
허나, 넉넉한 한 것이 푸근하기까지 한 적이 언제라고 있었는가. 오랜 시간동안 이루어진다고 하여, 선택하는 인간의 삶에 잔혹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내면을 떼로 죽인 이후에야 선택한다. 이것이 첫 번째 학살이다. 그는 해버리는 순간 다른 것은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안다. 어떤 것을 하는 순간 그 함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온갖 잡다한 내면들을 떨어뜨려서 죽여 버린다. 아마 그 내면의 유골쯤은 무의식이라고 하는 영토에 떨어져 쌓일 것이고 때때로 유령으로 꿈같은 곳에 출몰할 수 있다. 꼭 담대한 도전이 아니더라도, 고래가 예전과 다른 반향을 무시해도 될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던, 그때 당시로서는 조금도 심각하지 않던 그 순간, 그는 선택에 대한 왠지 모를 불안을 비롯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방향에 대한 형언할 수 없이 다양한 감각들을 전지(剪枝)해버렸다.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존재는 시간 속에서 시간을 이겨나간다. 그리고 존재하게 된다. 우리에게 그것은 진화사라기보다는 성장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번 선택한 이후에, 그 선택을 삶의 중요한 계기로 꼽을 때 두 번째 학살이 시작된다. 앞서 있었던 학살은 생애의 자질구레한 선택들과 함께 늘 일어나는 떼죽음인데, 이 대학살은 그렇게 살아남은 선택들 중에서 선택하여 나머지를 다 죽여버리는 떼죽음이다. 인간 존재가 계기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성장사를 정립하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회고하는 인간은 선택한 것이 아닌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 것들과, 결국에 선택한 것들, 것들만을 회고록에 배치한다. 이 말은 선택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그 시절을 채웠던 온갖 내면들이 지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가 끊임없이 곱씹어지면서, 것들과 것들의 강도가 만들어진다. 이에 따라 추억이 만들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해변에 올라와서 죽어가는 고래가 살아가는 동안, 했었을 수도 있었을 온갖 사소한 선택을 지우고, 자신을 죽게 만든 선택을, 죽지 않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선택과 함께 일련의 계기들로 구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진화사의 정립(定立)도 다르지 않다. 실재로는 각각 달랐을 개체들의 차이는 종으로 수렴되어 다른 종의 차이와 대조되고 결국에는 개체의 차이는 무시된 체로 종의 차이만 축출된다. 급기야 수 많았던 개체 중 몇 개의 화석만 남아서 진화사의 계기로 삽입된다. 조금더 색다른 화석이 삽입되면서 진화사는 뒤틀릴 수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떼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 경우는 기억의 학살이 아니라, 역사의 학살이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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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 아름다운에 대한 온갖 복잡한 정의가 있을 테지만, 나는 아름다움이 자기자신과 세계와 그리고 우주를 훌륭하게 바꾸어놓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이 일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기나긴 생명의 시간들이다. 고래가 되기까지 그리고 고래를 하기까지의 시간이고,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기까지의 시간이다. 하지만 개념에는 광의만이 아니라, 협의 또한 필요하다. 당신이 훌륭한 일을 하려 지금의 당신을 벗어나 탈바꿈하려 할 때 나는 기꺼이 당신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쓰겠다.
자기창조는 현실에 구멍을 내고 미래가 솟아오르게 하는 유일한 정도이기에 나는 그것을 도저히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다. 자기를 창조하는 생명은 현실에 대한 적응을 거부한다. 차라리 그 생명은 현실 앞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소진이라는 말의 파급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기창조는 자신을 닳게 해서 자신에게 난 구멍으로 생명력을 우주까지 솟아오르게 하는 일이다. 생명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지금 할 수 있음을 소진한다. 그것은 점점 더 생명 자체를 지치게 만드는 일이다. 고래가 고래로서 살아가면서 고래로서의 삶을 마쳐가듯이, 인간이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면서 인간 존재를 닳게 하듯이 그러하다. 사실 인간 모두는 그렇게 인간의 진화에 참여하고 있다.
베케트의 후기 희곡은 소진을 앙상하게 구조 혹은 형식 혹은 원리만 남은 삶의 양태로 극화하는데, 실재 우리 삶이 그렇게까지 영웅적으로 스산하지는 않을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생의 의지를 우리가 닳을 때까지 굴리고 있는 것은 맞다. 거기다가 베케트는 소진이 스스로에 대한 가장 강한 방식의 부정이기에 우울의 색조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생명에는 지금이 아닌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는 힘이 있다는 것에 대한 신념이 자기부정을 추인하는 동력이므로, 자기 소진은 스스로에 대한 가장 강한 긍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소진을 온갖 물질로 은폐하려 들지만, 인류사의 영웅이라면 그저 기도 없이 일상만을 영위하려는 장삼모사와는 달리, 소진 자체의 잠재성, 현 인간류를 벗어난 인간이 지닐 잠재성에 대한 소신이 있을 것이다. 그 소신은 철학자만큼이나 혁명가 만큼이나 예술가 만큼이나 많으면서도 또 모아지는 어떠한 것이리라.
이러한 생명은 지금 현실에서 자신을 기꺼이 소진하면서, 전회가 기다리는 한 지점을 향해 치닫는다. 이제 세상에 메여있지 않고, 행위를 반복하며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옮기면서 생명은 스스로를 돌파할 잠재성을 깨닫게 된다. 돌파는 몸의 탈바꿈이다. 새로운 몸은 당연히 새로운 영혼과 짝이다. 모든 것이 다르게 다가온다. 탈바꿈한 생명은 예전과는 다른 세계를 세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혁신이다. 그 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한 고래가 해변에서는 죽어야했듯이, 떼어놓을 수 없는 현실이 다시 생의 살이 되어 필수조건을 댈 것이다. 현실이 또다시 생명에게 항서 처럼 적응을 촉구하고, 생명은 적응이 신물 날 때쯤, 새로운 소명을 위하여 소진의 역사를 반복하리다. 헌신과 헌신, 탈바꿈과 탈바꿈이 거듭될수록 걷는 고래와 헤엄치는 고래가 아예 다른 세계를 구축하듯이 변성된 세계의 차이는 그렇게나 뚜렷해진다. 생명의 변화는 너무나 생생(生生)한 것이기에 우주 안에서 고래와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만큼 새롭다.
그러니 나는 그대가 아름다워지기를, 스스로를 소진한 끝에 스스로를 탈바꿈하기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을 세우기를 촉진한다. 고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