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ㅣ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1
황지우 지음 / 민음사 / 1985년 10월
평점 :
절판
1985년도에 출간된 황지우의 두 번째 시집『봄-나무에로 겨울-나무로부터』는 오늘날까지도 새로움을 자랑하는 시집이다. 의식을 쫓아가는 듯이, 낱말 잇기처럼 진행되는 「<상징도>찾기」,「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 「소설 이상한 전염병」은 환유라는 수사법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 정의한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의 명칭 대신 표현하고자 하는 원래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그 대상이 시사하는 말을 사용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왕’대신 ‘왕관’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인데, 환유는 기본적으로 한 낱말의 의미가 다른 낱말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끊임없이 미끄러진다는 전제아래 가능한 수사다. 어떤 말 하나가 그 말이 아니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고정적 의미체계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황지우의 이 시집에서 은유는 거의 드물다. 대상의 고정된 의미를 믿고서 다른 대상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은유는 언어놀이의 개념일 수는 없다. 환유와 다르게 은유는, 언어 뒤에 있는 뜻은 그대로인데 그것을 나타내는 대상이 오히려 미끄러진다는 믿음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언어가 다른 언어로 뜻까지도 함께 통째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옷만을 새롭게 입는 것이라 여길 때, 제대로 된 언어놀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봄-나무에로 겨울-나무로부터』의 언어의 특성은, 따라서 언어 스스로의 있음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언어가 견고한 의미적 맥락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스스로 언어가 의미 주위를 배회하며 새로운 상징들을 이끌어내고, 시를 만들어 낸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나간다면, 낱말을 거리에 뿌려놓고 무작위로 고른 낱말들로 시를 만들어낸다는 뉴욕의 전위적인 시인들까지 떠올릴 수 있다. 인간 개개인의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존재성을 의심하지 않을 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소음까지도 뒤에는 그 사회의 의식이 면면히 흐르는 예술일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언어 각각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시인은 자유로이, 의식을 따라 끝없이 흘러나오는 언어를 시어로 골라 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봄-나무에로 겨울-나무로부터 』에는 신문기사나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을 그대로 따온 듯한 시가 눈에 많이 뜨인다. 우선,「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에서는 시 가운데 그래프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고, 「大正 15년 10월 11일, 동아일보」는 과거 기사를 오려붙인 듯하고, 「1960년 4월 19일ㆍ20일ㆍ21일, 광주」는 “이승만은 물러가라! 자유당은 자폭하라!”같은 구호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이런 경향은 이 시집 전체의 분명한 색깔이랄 수 있다.
「삶」이라는 시에서 보면 시인의 이러한 의식은 불교 사상과도 맥이 닿아 있다. “비 온 뒤/ 도랑 가 고운 泥土 우에/지렁이 한 마리 지나간 자취,/ 5호 畵筆 같다/ 일생일대의 일획,/ 획이 끝난 자리에/ 지렁이는 없다/ /나무관세음보살” 지렁이의 있음은, 흔적을 남길 때만이 증명된다. 또한 그 말은 역으로 지렁이의 흔적 자체가 지렁이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삶이란 공이며, 우리는 흔적들만을 곳곳에 흩뿌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흔적 하나하나─인연이 닿아 흔적을 남겨놓는 미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는 불교적 인식이다. “나무관세음보살”같은 생각은 물론, 곳곳에서 다른 말로 미끄러지며 탈바꿈하는 언어가 모두 나름의 소중함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과도 연결된다. 전이 되는 욕망 자체가 삶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도 면밀히 조사하여 연결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결혼한 지 7년이 되며」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의 풍자는 절망으로부터 오고, 나의 절망은 열망으로부터 오고, 나의 열망은 욕망으로부터 오고, 나의 욕망은 生으로부터 온다. 이 生으로부터 理性에 이르는 가느다란 실핏줄이 내 시의 家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