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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ㅣ 세계사 시인선 37
진이정 지음 / 세계사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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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는 내면 여행의 기행문 같다. 우선 내면과 내면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모든 여행은 전 생애를 담보로 한다. 갑자기 와 닿은 ‘어떤 순간’의 느낌이 그를 여행으로 내몰았다 할지라도, ‘어떤 순간’을 느낀 그의 몸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이미 마련되어 왔던 것이다. 동전 한 개를 떨어뜨리거나, 쉼표 한 개를 잘못 찍는 등의 실수도 마찬가지다. 그것에는 실수일 수 없는 의뭉한 의도가 몸의 깊숙이 숨어 있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의 의식 깊숙이, 너무나 깊숙이 있어서 흔적이라도 발견 했을 때 새로운 세계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러한 세계가 분명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매번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 앞에 대처해갈 때마다, 몸의 깊숙이 자리 잡은 의식의 의식은 스스로를 조금씩 수정하기도 한다.
무의식과는 다르다. 무의식이 “사람이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프로이트, 정신분석입문)는 점에서는 비슷하나, 의식의 의식은 무의식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의식의 영역으로 되살릴 수 없지만 나중에는 생각해낼 수 있는” 정신 작용이라기보다, 의도적으로 언제나 찾아갈 수 있고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몸의 동반자 개념이다. 그 아래 또 무의식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의식의 의식은 다른 것이다. 차라리 나의 우연적 행위 아래서 나와 대화하기를 궁금하게 기다리고 있는 신화적 세계란 말이 합당할 수 있다.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그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우주의 비화, 그것은 아이가 커서 다시 후손에게 이야기를 전할 때 조금씩 바뀔 수 있다. 내면은─의식의 의식은 세계와 언제나 소통하는 지배적 담론으로서의 고리이기 때문이다.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을 상세히 말하면 몸이 되고 흐릿하게 말하면 현상이 된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에서 대화는 그래서 중요하다. “고향엘 내려가니 그 옛적의 소꿉동무가 가업을 이어 이발소 주인이 되어 있었다……십년만의 귀향이라는 주제의 잡담이나 나눌 수밖엔 없었던 졸렬한 나의 화술이여……그 솜씨 좋은 이발사는 끝내 한 올의 머리칼조차 손대길 거부했던 것이다 나는 삼손과는 달리, 그새 치렁치렁해진 머리카락을 온몸으로 느끼며 점점 맥이 빠져야만 했었다 아아 그는 나의 삶을 참빗처럼 남김없이 간파하고 말았던 것이리라”(「이발소 집 아이」) 옛적의 소꿉동무는 내가 잃었던 내면과의 대화방식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가업을’ 이었다는 표현은 그가 신화적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발소’란 직업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그 자체가 내면의 상징이다. 머리카락이 암시하는 유전자의 옮겨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십년 만에 귀향’한 화자는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서 지금의 내 몸을 이끌고 있는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의식의 의식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그를 통해서 찾고자 한다. 그러나 졸렬한 화술로 그칠 뿐이다. ‘솜씨 좋은 이발사’는 끝내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가 ‘나의 삶을 참빗처럼 남김없이 간파하고 말’ 동안 그는 어떤 소통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옛적의 소꿉동무는 졸렬한 화술 사이에서 추억의 내면세계에 기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화자는 ‘맥이 빠져야만 했다.’
「생각에 대하여」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나의 의식과 이야기하려 한다. “내 번뇌 때문에 아프리카가 굶고/ 발칸 반도는 전투를 개시한다/ 무언가를 곱게 생각하고 나서, 곱게 죽어버리는 생각,/ 바로 지금 내 생각보다/ 재빠른 것은 없을 터이다”라는 진술은 의식의 의식 세계가 나만의 대화의 마당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범위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마당으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재빠르게 내 안으로 가장 깊숙이 침작하여, 가장 넓은 세계를 마주 하겠다는 화자의 세계관은 결국 “북두칠성의 국자 속에 숨어 있는 옛사랑”이라는 신화적 세계와 맥이 닿아있다. 아까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신화는 내 의식의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진이경은 진리가 있을지도 모를 ‘의식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나’를 던지고 있다.
“나는 건넌다, 다리는 곧 없어질 터이다/ 사라진 다리로 돌아올 테다/ 그림자 다리를 건너 빛의 나무에 오르겠네/ 사리자야, 물질이 정말 실체가 없는 거니?/ 텅 빈 상태가 정말 나야?/ 정말 그렇다구? 이거 큰일이구나/ 진리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그의 사인을 받고 싶어, 그가 나타나면 괴성을 지를 테야”(「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