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말러 : 교향곡 9번 [2SACD Hybrid]
말러 (Gustav Mahler) 작곡, 노트 (Jonathan Nott) 지휘, 밤베르거 / Tudor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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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적 방식의 지휘. 악기군들의 섬세한 조율. 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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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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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있었던 구두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사내는 어떻게 되었나」에 대해서 -

‘세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반성’이란 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세계’의 정의는 단순명료해진다. 반성하는 자아가 있고, 이 반성하는 자아가 놓여있는 환경이 있다. 세계: 반성하는 자아가 놓여있는 곳. 나는 이것에 따른 단순한 도식 몇 개를 알고 있다. 세계가 자아를 위협한다면, 자아는 그 세계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자기만의 논리를 만들어 내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전쟁을 택해서 파멸할 때까지 싸우는 플롯은 비극의 세계관이다. 또는 세계가 자아와 화해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곳이라면, 자아는 세계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자기를 겹칠 것이다. 이것은 희극의 플롯이다. 세계와 화해하면서도 자아가 다치지 않는 어떤 방향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교양소설의 플롯이 될 것이다.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어떤 진로를 택했을까? 남자는 계속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앞으로“그 남자”)’를 구조하려 하고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거기에 ‘비극적’이란 수사를 붙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다. 남자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식으로―전화로 119에 신고해주려 하거나, 퇴근 후에 돌아와서 경비에게 인터폰을 하는 방법으로 남자를 도와주려 할 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전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남자에게는 세계관이란 말보다 자의식이란 말이 더 합당하다. 맨 마지막 문장도 자의식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122쪽)”그는 파멸할 만큼 싸우지 않음으로 해서 자의식을 보존했다.

‘희극적’이란 말은 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남자를 도우려는 ‘나’는 사사건건 장애에 직면한다.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하루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찾아온다.(101쪽)”그는 화해와는 명백히 먼 이 세계의 비정함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파묻히게 되는데, 자의식을 깨달은 채 사회에 다시 편입한다는 의미에서 교양소설의 냄새가 나지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의 자의식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라는 세계의 잠재적 변화 가능성으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저 “살다 보면 이상한 날(101쪽)”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이것이 사회에 대한 장엄한 불만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발전 될 수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이 소설은 하고 있지 않다. 이 주인공이 처하게 되는 위험의 성격을 사회 구조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까지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소설과 같은 지평의 위협들이 아닌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보자. 세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세계를 보는 여러 시선들과 그것에 대응해가는 그만큼의 여러 방식들이 세계라는 말의 의미를 정의한다. 달리 말해, 반성의 여러 양식들로서 세계의 의미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의 의미일 뿐이다. 세계라는 실재를 위협하는 주관들이다.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회의주의는 인간은 인식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므로, 세계는 인간의 인식일 뿐이지 객관일 수 없다는 인식이다. 더구나 이런 인식의 자극에 전념하는 체계, 광고로 자신을 둘러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객관에 대한 탐구가 일체 무의미할 뿐이라는 식으로, 초보적인 회의주의는 자신을 현실화한다. 그러나 내가 반성된 세계에 대한 집착만 버린다면 세계는 실재한다. 세계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역설적으로 그 실재하는 세계를 주장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 남자를 회상하지만, 그 남자를 그렇게 두고 온 자신을 반성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세계를 철저히 내재화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반성은 주인공의 개념과는 멀리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처음 그 남자를 발견했을 때 그나마 발견되는 반성의 기미는 해학적일 정도로 가벼운 정도였다가 뒤로 갈수록 회상의 성격으로 마무리 된다.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출근중이었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무심히 지나치다니. 하지만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여덟시 정각. 이크. 나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살짝 당겨보았다(발은 내 얼굴 높이에 있었다). (102쪽)

머리에 샴푸를 바르면서도 나는 계속 궁금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경비한테 인터폰이나 해봐야겠다. (122쪽)

119 전화 담당자의 짜증과 퇴근 후에 탄 엘리베이터 사람들의 그 남자에 대한 무관심에도 주인공이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는 것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자. 그 남자는 최초로 발견 될 때부터 ‘나’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끝까지 그 남자의 구체적 신상은 밝혀지지 않으며, 심지어 ‘나’가 구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주인공의 자아에 속하지 않고 타자성을 유지한 채 날 것 그대로 주인공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남자는 의식의 핵심에 침잠하여 자아 발전의 계기―반성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의식의 변두리에서 부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는 회상된 남자, 타자로서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그 남자는 자기의 의식 속에서는 물론, 이 소설에 유별나게 강조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불모지 같은 감성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채 여전히 존재하며, 세계의 실재를 그 존재하는 만큼 증명해가는 영웅이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렇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최종적인 역설이란 결국, 구원 받아야 했던 그 남자와 구원 할 수 있었던 그 남자의 입장 바뀜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영웅의 단초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 발견 할 수 있다. 그 말에 있는 거창함에 압도당하지 않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근대적 영웅이란, 긍정된 부정으로서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의 이름이다. 세계를 둘러싼 온갖 참담한 부정을 온몸으로 익히며 그것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회의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세계의 실재를 긍정할 수 있는 의식을 오롯이 지켜나가는 존재이다. 예전의 영웅이 부정된 부정으로서: 세계가 지정한 장애물을 제거해나가면서 세계를 긍정할 수 있었지만, 타자성이란 이름으로 ‘장애물’이 개명된 지금 그것은 제거해야 될 것이 아니라 수긍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근대적 영웅은 긍정된 부정으로서 세계를 긍정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 주인공이 전화기라는 소통 수단에 유난히 매달리는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전화기를 사용해서 대화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게 분화된 위치에 자기 좌표를 두고 있다. 그 속에서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화된 타자를 수긍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어화된 타자는 물론 인격적인 타자는 아니다. 그 사람의 구체적 인격이 부정된 자리에 용건만이 언어로서 전화선을 넘나드는 것인데, 그 부정을 긍정해야 했던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과장된 담론들이다. 과장되기 전의, 담론이 되기 전의 가장 실재에 가까운 모습을 기억하려 나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때에 세계는 객관적 실체로서 실재할 것이다. 그 환희는 다음 문장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잃어버렸던 구두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다가 결국 잃어버렸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찾게 되는 그 허탈한 환희. 세계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반성적인 노력은 필요하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그곳으로 다시 가기 위한 도정이다. 여전히 거기 있는 객관-존재를 위해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까 나를 가둬두었던 엘리베이터 문이 가장 먼저 열렸다. 탈 생각은 없었지만 그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는 볼 수 있었다. 나는 날렵한 치타처럼 황급히 들어가 그 구두를 집어들고 문이 닫히기 전에 그 엘리베이터에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허탈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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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읽는 호텔 랜덤소설선 3
윤후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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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 

“어, 그래.”
누이는 어느 때보다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자취를 하는 내가 월요일 집에 전화를 했더니 누이가 우선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바꾸어 달라고 했는데 하는 대답이 그랬다. 이미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라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였는지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았다. 간단한 말싸움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어젯밤 12시에 고양이가 자취방 옆에서 날카로운 울음을 내질러서 잠에서 깼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누이였다. 정확히는 누이의 팔베개였다. 누이와 나는 터울은 많이 났지만 그 시절 누이도 그렇게 든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누이 없이는 잘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였다. 밤이면 방 안에 모기장이 쳐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재빠른 몸짓으로 모기장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딱딱한 베개는 한쪽으로 제쳐 두고 누이의 나긋한 팔을 내 쪽으로 끌었다. 물론 그때는 고맙거나 미안하거나 하는 생각은 머리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움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침묵의 합의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던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는 할 수만 있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서 누이의 팔을 당겨오고 싶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린 시절은 화해라는 말없이 화해하곤 했던 따뜻한 시절이다. 요람기나 유년기를 조금이라도 함께 했다는 것은 그가 고교 때 동창이거나 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한반도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세기를 열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의 옛날이야기인 『삼국유사』가 바로 그 우리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 아닐까.
그러니 『삼국유사 읽는 호텔』에 아련한 사랑들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녘 사람이 북녘을 간신히 방문할 수 있는 덜 아문 제도의 사랑이 우선 있다. 그래서 북녘에 양각도 호텔에서 탐사 겸 묶고 있는 ‘나’가 밤마다 책 속에서 불러낼 수 있는 설화의 사랑이 있고, 그래서 또 그 이야기 속에 거타지 설화 같은 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이메일을 통해서만 만나면서도 애틋하게 떠올리는 M과의 사랑이 있다.
거타지, ‘나’가 ‘평양의 곳곳에서’ ‘김일성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설화 속 인물이다. 거타지가 이국에서 물귀신의 숙적을 활을 쏘아 없애주자 물귀신이 딸을 주겠노라 하며 꽃을 건네는데 나중에 거타지가 신라에 도착하여 품에서 그 꽃을 꺼내니 예쁜 여자로 변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M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람에 있지만 그 사랑의 기억을 품 깊숙이 새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인가 꿈처럼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타지의 꽃은 비록 ‘나’는 사일 간의 일정을 끝내고 남으로 돌아가지만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할 통일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또 꽃은 사랑이 이야기했던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의 사랑일 수 있다. 마음으로 삼국유사 읽기를 기원한다는 저자의 말대로 삼국유사라는 꽃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면 언제인가 서로 꺼내 보이며 우리 가슴의 화목한 웃음거리로 삼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 그런 의미에서, 엉뚱하게도 푸코가 그토록 자세히 보여주었던 근대적 이성, 보이지 않는 『감시와 처벌』 안에 개별화한 채 놓여있다는 오늘날 사람들의 매듭을 푸는 방법은 삼국유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아쉽기도 하다. 이 책에서 『삼국유사』의 수많은 설화는 소개하는 식으로 꺼내져만 있다. 이 책은 『삼국유사』를 요즘 사람들의 포장지로 바꾸어 포장하지 않는다. 이 책에 있는 수많은 설화들이 단순히 재미있는 설화인 채로가 아니라 오늘날 삶 속에까지 미묘한 상징인 채로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좀 더 정치하게 짚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해도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다음 주에 누이는『삼국유사』에서 또 다른 사랑을 읽어내겠지. 그리고 나처럼 사랑의 언어를 꿈꿀 것이다. 그때 거타지의 꽃은 우리가 떨어져 있다 해도 전화선을 타고 피어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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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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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를 읽고

                                            일자(一者)는 타자(他者)를 만든다


 <배암에 물린 자국>에서는 ‘배암’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신라의 푸른 길>에서 ‘수로 부인’과 버스를 함께 탄 여자의 상관관계는? 하루 간 이러한 질문들이 내 머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우선 <배암에 물린 자국>을 적어 두자.

 내가 진정 너를 할퀴면서 내가 아프다 소리친 적은 없었던가. 혹은 너의 사랑을 배신이라 이마에 적어놓고 남몰래 서슬 퍼런 독을 키우며 산 것은 아니었을까. 이토록 울혈진 마음…… 겁내하는 마음……그렇게 비겁한 자되어 마침내 아침이 되도 이렇듯 포대기 속에 숨어 총칼을 껴안고 있어야 하는 마음.

 이 소설을 간단히 말하자면 ‘배암에 물린 자국’을 관찰한 심리적 기록물이다. 실제로 자신을 물은 뱀은 ‘배암’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여야 하고 아파한 자신이다.- 그가 ‘배암’을 잡으려 나서는 이유도 육신의 아픔을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물렸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이다. 자기가 자신을 관찰하고 거리를 둔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모순적이고 이분법적 사고지만 작가는 별 무리 없이 유려하게 풀어나간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의 존재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확연히 다른 방식의 서술이다.
 “뱀이 나타났던 곳과 그곳과의 거리”란 그 모순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관찰하는 ‘나’와 관찰당하는 ‘나’가 정말 있다면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우주의 어느 구석에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싸리나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나일까. 서른 두 걸음을 띄우고 서있는 것이 나일까? 결국에 화자는 긴 여정 끝에 두자아의 화해를 이끌어 내고 만다.

한데 내 몸에 그토록 도간 향기를 부어놓고 사라진 그놈은 이 새벽 내가 저를 생각하듯이 나를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 그리고 우리가 그때 그렇게 만났던 것은 정녕 잘못된 일이었을까?  

뱀이 그의 발 인대를 무는 것, 거기서 느끼는 아픔이 삶일지도 모른다. 뱀과 그의 혈액이 하나 되듯이 그 순간 두 자아는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할 수 있었다. 아픔을 느낀 것은 분리 할 수 없는 나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나는 ‘관찰하는 나’와 ‘관찰 당하는 나’ 사이의 반목까지도 “사각 사각 눈 밟는 소리”처럼 다가오는 삶의 서늘한 감정들을 깨닫는 순간 분열을 멈춘다. 오히려 뱀에게 물린 가을을 만났다는 것과 내게 가을이 한 번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앞으로 계속 아파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시간 속에서 멀쩡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삶의 안전띠 같은 것이었다. 잘못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 뒤에 수첩에 적어두었던 <타자화>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플로티노스에 이르면, “일자(一者)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일자는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며, 그 과잉으로 말미암아 타자(他者)를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와 『배암에 물린 자국』을 잇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헛되지 않았다. 마치 뱀을 찾아 산을 수번 오르락내리락 하는 화자의 일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아마 나도 그것을 완전히 느끼는 데에는 꼭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나를 내가 빤히 바라보는 “타자”라는 것이 결코 생소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 풍족한 나에게서 어쩔 수 없이 도출되는 모습이란 플로티노스의 선언은 『배암에 물린 자국』이 돌아간 길이며 내가 찾아낸 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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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극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190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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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음악을 두 가지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 무한히 직시해야 하는 현실로 음악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어젠가 저기 있을 종말을 암시하는 우울한 서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첫 번째처럼 음악을 현실에 구애받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질서로 여길 경우, 자연히 음악은 무한히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왜냐하면 이때 음악은 ‘지금 있음’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미래를 암시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황홀’을 생각해 보자.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등대로』에서 릴리가 황혼을 보면서 느끼는 황홀은 미래를 생각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생각해서 느끼는 것도 아니다. 황홀은 본래 오직 현실에 매몰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이 음악을 듣고 음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듣게 될 때 사물 따위를 연상해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게 될 때 그때 느끼는 감각이 ‘지금 있음’의 감각이다. 그러나 ‘지금 있음’의 감각은 세계에서 명백히 분리되어 있다. 이는 자아감이 충만한 상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망아(忘我)의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에 매순간 던져지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상 음악으로 펼쳐진 세계가 현실 위에 부유하는 상투적인 세계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새롭게 느낀다는 점에서 ‘새롭다’는 말 이상의 언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식, ‘저기 있음’은  ‘강정’의 시집 『처형극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강정이 음악에서 듣는 것은 음악의 ‘주제’와 ‘불안’(「프란츠 리스트」), “‘미래’란게 도대체 있기는 있을라마는”(「실종(失踪)」, ‘죽은 새들’(「기타리스트가 죽다」) 등이다. 강정은 ‘지금 있음’의 감각을 즐기지 않는다. 강정은 음악이 주는 ‘저기 있음’의 감각, 불안을 즐긴다. 불안이란 말은 애초에 저기 무언가가 있어서 어렴풋하게 보이지만 뚜렷이 보이지는 않는 데에서 오는 심리이다. 따라서 앞으로 말할 불안 모두 ‘저기 있음’의 감각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하여튼 아무리 훌륭한 음악도 끝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에 강정은 음악에서 모종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떨림의 경치 속으로 나는 가두어진다 몇 개의 악절들이 여기/ 내 방안에 펄럭인다 불안하다 계란처럼 불거지는 주제, 왜 불안한가?”(「프란츠 리스트」) 그에게 음악은 주제를 찾을 수밖에 없게 하고 ‘떨림의 경치’속에 가두는 무엇이다. 살아간다는 것도 끝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매순간을 즐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음악과 닮아 있다고 강정은 말한다. 음악이 조금 더 나은 점이라면 이미 익숙할 데로 익숙한 삶이 삶 이후를 연상시키지 않는 데에 반하여 음악은 종말 이후를 암시한다는 것에 있다. 이제 음악은 종말뿐만이 아니라 종말 이후를 상상하게 한다. “피투성이 다섯 손가락 끝에서/ 죽은 새들이 그 힘줄만으로/ 날아오르고/ 큼직한 죽음의 길 한끝으로/ 시커멓게 그을은 달이 떠오르고 있어요/ 살아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진짜 내 얼굴이 떠오르고 있어요” (「기타리스트가 죽다」) ‘피투성이 다섯 손가락’이란 두말 할 것 없이 기타를 치는 손가락을 말한다. 기타가 내는 소리-음악을 통해서 그는 죽음 이후에 있을 세계까지 가늠해본다.

강정은 음악을 ‘지금 있음’이 아니라 ‘저기 있음’으로 받아들여 음악 자체를 어떤 비유로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음악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펼치는 영역으로가 아니라, 삶을 비유하고 삶과 교차하는 현실의 영역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지금 있음’의 차원에서 음악을 논한다면 음악은 도저히 무엇의 비유가 될 수 없지만, 음악을 이처럼 ‘저기 있음’의 차원으로 밀어놓고 ‘저기 있음’을 느끼는 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면 음악은 충만한 자아를 세계를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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