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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대로 있었던 구두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사내는 어떻게 되었나」에 대해서 -
‘세계’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반성’이란 말이 들어가는 순간 이 ‘세계’의 정의는 단순명료해진다. 반성하는 자아가 있고, 이 반성하는 자아가 놓여있는 환경이 있다. 세계: 반성하는 자아가 놓여있는 곳. 나는 이것에 따른 단순한 도식 몇 개를 알고 있다. 세계가 자아를 위협한다면, 자아는 그 세계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자기만의 논리를 만들어 내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여기서 전쟁을 택해서 파멸할 때까지 싸우는 플롯은 비극의 세계관이다. 또는 세계가 자아와 화해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곳이라면, 자아는 세계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자기를 겹칠 것이다. 이것은 희극의 플롯이다. 세계와 화해하면서도 자아가 다치지 않는 어떤 방향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교양소설의 플롯이 될 것이다.
김영하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어떤 진로를 택했을까? 남자는 계속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앞으로“그 남자”)’를 구조하려 하고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거기에 ‘비극적’이란 수사를 붙이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이다. 남자는 지극히 소극적인 방식으로―전화로 119에 신고해주려 하거나, 퇴근 후에 돌아와서 경비에게 인터폰을 하는 방법으로 남자를 도와주려 할 뿐,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는 전쟁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남자에게는 세계관이란 말보다 자의식이란 말이 더 합당하다. 맨 마지막 문장도 자의식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 그래서 지금도 나는 궁금하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122쪽)”그는 파멸할 만큼 싸우지 않음으로 해서 자의식을 보존했다.
‘희극적’이란 말은 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남자를 도우려는 ‘나’는 사사건건 장애에 직면한다.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하루종일 평생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나씩 찾아온다.(101쪽)”그는 화해와는 명백히 먼 이 세계의 비정함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파묻히게 되는데, 자의식을 깨달은 채 사회에 다시 편입한다는 의미에서 교양소설의 냄새가 나지만 쉽게 단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의 자의식은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라는 세계의 잠재적 변화 가능성으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저 “살다 보면 이상한 날(101쪽)”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이것이 사회에 대한 장엄한 불만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발전 될 수 있다는 어떠한 암시도 이 소설은 하고 있지 않다. 이 주인공이 처하게 되는 위험의 성격을 사회 구조에 대한 각성의 계기로까지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소설과 같은 지평의 위협들이 아닌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보자. 세계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세계를 보는 여러 시선들과 그것에 대응해가는 그만큼의 여러 방식들이 세계라는 말의 의미를 정의한다. 달리 말해, 반성의 여러 양식들로서 세계의 의미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의 의미일 뿐이다. 세계라는 실재를 위협하는 주관들이다.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회의주의는 인간은 인식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므로, 세계는 인간의 인식일 뿐이지 객관일 수 없다는 인식이다. 더구나 이런 인식의 자극에 전념하는 체계, 광고로 자신을 둘러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객관에 대한 탐구가 일체 무의미할 뿐이라는 식으로, 초보적인 회의주의는 자신을 현실화한다. 그러나 내가 반성된 세계에 대한 집착만 버린다면 세계는 실재한다. 세계의 의미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역설적으로 그 실재하는 세계를 주장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 남자를 회상하지만, 그 남자를 그렇게 두고 온 자신을 반성하지는 않는다. 타인의 세계를 철저히 내재화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반성은 주인공의 개념과는 멀리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처음 그 남자를 발견했을 때 그나마 발견되는 반성의 기미는 해학적일 정도로 가벼운 정도였다가 뒤로 갈수록 회상의 성격으로 마무리 된다.
말쑥한 신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출근중이었다.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끼여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무심히 지나치다니. 하지만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계를 보았다. 여덟시 정각. 이크. 나는 신발이 벗겨진 발을 살짝 당겨보았다(발은 내 얼굴 높이에 있었다). (102쪽)
머리에 샴푸를 바르면서도 나는 계속 궁금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경비한테 인터폰이나 해봐야겠다. (122쪽)
119 전화 담당자의 짜증과 퇴근 후에 탄 엘리베이터 사람들의 그 남자에 대한 무관심에도 주인공이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는 것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자. 그 남자는 최초로 발견 될 때부터 ‘나’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끝까지 그 남자의 구체적 신상은 밝혀지지 않으며, 심지어 ‘나’가 구조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주인공의 자아에 속하지 않고 타자성을 유지한 채 날 것 그대로 주인공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남자는 의식의 핵심에 침잠하여 자아 발전의 계기―반성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의식의 변두리에서 부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는 회상된 남자, 타자로서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주인공에게 그 남자는 자기의 의식 속에서는 물론, 이 소설에 유별나게 강조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불모지 같은 감성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채 여전히 존재하며, 세계의 실재를 그 존재하는 만큼 증명해가는 영웅이다.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렇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의 최종적인 역설이란 결국, 구원 받아야 했던 그 남자와 구원 할 수 있었던 그 남자의 입장 바뀜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근대적 영웅의 단초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 발견 할 수 있다. 그 말에 있는 거창함에 압도당하지 않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근대적 영웅이란, 긍정된 부정으로서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의 이름이다. 세계를 둘러싼 온갖 참담한 부정을 온몸으로 익히며 그것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회의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세계의 실재를 긍정할 수 있는 의식을 오롯이 지켜나가는 존재이다. 예전의 영웅이 부정된 부정으로서: 세계가 지정한 장애물을 제거해나가면서 세계를 긍정할 수 있었지만, 타자성이란 이름으로 ‘장애물’이 개명된 지금 그것은 제거해야 될 것이 아니라 수긍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근대적 영웅은 긍정된 부정으로서 세계를 긍정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 주인공이 전화기라는 소통 수단에 유난히 매달리는 것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전화기를 사용해서 대화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대인은 복잡다단하게 분화된 위치에 자기 좌표를 두고 있다. 그 속에서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화된 타자를 수긍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언어화된 타자는 물론 인격적인 타자는 아니다. 그 사람의 구체적 인격이 부정된 자리에 용건만이 언어로서 전화선을 넘나드는 것인데, 그 부정을 긍정해야 했던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과장된 담론들이다. 과장되기 전의, 담론이 되기 전의 가장 실재에 가까운 모습을 기억하려 나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때에 세계는 객관적 실체로서 실재할 것이다. 그 환희는 다음 문장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잃어버렸던 구두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다가 결국 잃어버렸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찾게 되는 그 허탈한 환희. 세계를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반성적인 노력은 필요하지만, 결국 잃어버렸던 그곳으로 다시 가기 위한 도정이다. 여전히 거기 있는 객관-존재를 위해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까 나를 가둬두었던 엘리베이터 문이 가장 먼저 열렸다. 탈 생각은 없었지만 그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는 볼 수 있었다. 나는 날렵한 치타처럼 황급히 들어가 그 구두를 집어들고 문이 닫히기 전에 그 엘리베이터에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허탈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1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