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계단을 보라
윤대녕 지음 / 세계사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윤대녕’의 『남쪽 계단을 보라』를 읽고

                                            일자(一者)는 타자(他者)를 만든다


 <배암에 물린 자국>에서는 ‘배암’과 ‘나’와의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고 <신라의 푸른 길>에서 ‘수로 부인’과 버스를 함께 탄 여자의 상관관계는? 하루 간 이러한 질문들이 내 머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우선 <배암에 물린 자국>을 적어 두자.

 내가 진정 너를 할퀴면서 내가 아프다 소리친 적은 없었던가. 혹은 너의 사랑을 배신이라 이마에 적어놓고 남몰래 서슬 퍼런 독을 키우며 산 것은 아니었을까. 이토록 울혈진 마음…… 겁내하는 마음……그렇게 비겁한 자되어 마침내 아침이 되도 이렇듯 포대기 속에 숨어 총칼을 껴안고 있어야 하는 마음.

 이 소설을 간단히 말하자면 ‘배암에 물린 자국’을 관찰한 심리적 기록물이다. 실제로 자신을 물은 뱀은 ‘배암’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여야 하고 아파한 자신이다.- 그가 ‘배암’을 잡으려 나서는 이유도 육신의 아픔을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물렸다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이다. 자기가 자신을 관찰하고 거리를 둔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모순적이고 이분법적 사고지만 작가는 별 무리 없이 유려하게 풀어나간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의 존재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확연히 다른 방식의 서술이다.
 “뱀이 나타났던 곳과 그곳과의 거리”란 그 모순과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관찰하는 ‘나’와 관찰당하는 ‘나’가 정말 있다면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우주의 어느 구석에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싸리나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나일까. 서른 두 걸음을 띄우고 서있는 것이 나일까? 결국에 화자는 긴 여정 끝에 두자아의 화해를 이끌어 내고 만다.

한데 내 몸에 그토록 도간 향기를 부어놓고 사라진 그놈은 이 새벽 내가 저를 생각하듯이 나를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 그리고 우리가 그때 그렇게 만났던 것은 정녕 잘못된 일이었을까?  

뱀이 그의 발 인대를 무는 것, 거기서 느끼는 아픔이 삶일지도 모른다. 뱀과 그의 혈액이 하나 되듯이 그 순간 두 자아는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할 수 있었다. 아픔을 느낀 것은 분리 할 수 없는 나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나는 ‘관찰하는 나’와 ‘관찰 당하는 나’ 사이의 반목까지도 “사각 사각 눈 밟는 소리”처럼 다가오는 삶의 서늘한 감정들을 깨닫는 순간 분열을 멈춘다. 오히려 뱀에게 물린 가을을 만났다는 것과 내게 가을이 한 번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앞으로 계속 아파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시간 속에서 멀쩡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삶의 안전띠 같은 것이었다. 잘못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참 뒤에 수첩에 적어두었던 <타자화>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플로티노스에 이르면, “일자(一者)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일자는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르며, 그 과잉으로 말미암아 타자(他者)를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와 『배암에 물린 자국』을 잇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헛되지 않았다. 마치 뱀을 찾아 산을 수번 오르락내리락 하는 화자의 일이 헛되지 않은 것과 같다. 아마 나도 그것을 완전히 느끼는 데에는 꼭 그만큼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나를 내가 빤히 바라보는 “타자”라는 것이 결코 생소한 나의 모습이 아니라 풍족한 나에게서 어쩔 수 없이 도출되는 모습이란 플로티노스의 선언은 『배암에 물린 자국』이 돌아간 길이며 내가 찾아낸 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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