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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읽는 호텔 ㅣ 랜덤소설선 3
윤후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
“어, 그래.”
누이는 어느 때보다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자취를 하는 내가 월요일 집에 전화를 했더니 누이가 우선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바꾸어 달라고 했는데 하는 대답이 그랬다. 이미 한 달도 더 지난 일이라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였는지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았다. 간단한 말싸움이었을 터였다.
그래도 어젯밤 12시에 고양이가 자취방 옆에서 날카로운 울음을 내질러서 잠에서 깼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누이였다. 정확히는 누이의 팔베개였다. 누이와 나는 터울은 많이 났지만 그 시절 누이도 그렇게 든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누이 없이는 잘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 때였다. 밤이면 방 안에 모기장이 쳐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재빠른 몸짓으로 모기장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딱딱한 베개는 한쪽으로 제쳐 두고 누이의 나긋한 팔을 내 쪽으로 끌었다. 물론 그때는 고맙거나 미안하거나 하는 생각은 머리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움이나 미안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침묵의 합의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던 어린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는 할 수만 있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서 누이의 팔을 당겨오고 싶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어린 시절은 화해라는 말없이 화해하곤 했던 따뜻한 시절이다. 요람기나 유년기를 조금이라도 함께 했다는 것은 그가 고교 때 동창이거나 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 한반도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세기를 열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의 옛날이야기인 『삼국유사』가 바로 그 우리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 아닐까.
그러니 『삼국유사 읽는 호텔』에 아련한 사랑들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녘 사람이 북녘을 간신히 방문할 수 있는 덜 아문 제도의 사랑이 우선 있다. 그래서 북녘에 양각도 호텔에서 탐사 겸 묶고 있는 ‘나’가 밤마다 책 속에서 불러낼 수 있는 설화의 사랑이 있고, 그래서 또 그 이야기 속에 거타지 설화 같은 사랑 이야기만 나오면 이메일을 통해서만 만나면서도 애틋하게 떠올리는 M과의 사랑이 있다.
거타지, ‘나’가 ‘평양의 곳곳에서’ ‘김일성화’를 보면서 떠올리는 설화 속 인물이다. 거타지가 이국에서 물귀신의 숙적을 활을 쏘아 없애주자 물귀신이 딸을 주겠노라 하며 꽃을 건네는데 나중에 거타지가 신라에 도착하여 품에서 그 꽃을 꺼내니 예쁜 여자로 변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M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람에 있지만 그 사랑의 기억을 품 깊숙이 새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인가 꿈처럼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타지의 꽃은 비록 ‘나’는 사일 간의 일정을 끝내고 남으로 돌아가지만 가슴 속 깊이 새겨야 할 통일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또 꽃은 사랑이 이야기했던 어린 시절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의 사랑일 수 있다. 마음으로 삼국유사 읽기를 기원한다는 저자의 말대로 삼국유사라는 꽃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면 언제인가 서로 꺼내 보이며 우리 가슴의 화목한 웃음거리로 삼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 그런 의미에서, 엉뚱하게도 푸코가 그토록 자세히 보여주었던 근대적 이성, 보이지 않는 『감시와 처벌』 안에 개별화한 채 놓여있다는 오늘날 사람들의 매듭을 푸는 방법은 삼국유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아쉽기도 하다. 이 책에서 『삼국유사』의 수많은 설화는 소개하는 식으로 꺼내져만 있다. 이 책은 『삼국유사』를 요즘 사람들의 포장지로 바꾸어 포장하지 않는다. 이 책에 있는 수많은 설화들이 단순히 재미있는 설화인 채로가 아니라 오늘날 삶 속에까지 미묘한 상징인 채로 엄연히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건네고 있다는 것을『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좀 더 정치하게 짚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해도 『삼국유사 읽는 호텔』은 누이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다음 주에 누이는『삼국유사』에서 또 다른 사랑을 읽어내겠지. 그리고 나처럼 사랑의 언어를 꿈꿀 것이다. 그때 거타지의 꽃은 우리가 떨어져 있다 해도 전화선을 타고 피어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