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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평점 :
고래로부터 언어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축복으로 간주되었고 인간만의 특징이라 생각되었다. 유인원이 추상적 사고를 하고 필요한 경우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험을 통해 여러차례 밝혀졌지만 '언어'는 별개의 영역으로 치부되었고 인간 외의 종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믿음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저자 로저 파우츠도 마찬가지 견해를 품고 있던 상태에서 워쇼를 만났고 인간과 유인원의 경계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됐으며
평가절하된 유인원의 능력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유명한 실험 과학자 앨런 가드너 부부가 기르는 어린 침팬지 '워쇼'를 만난 것을 계기로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 사랑은 시작된다. 로저가
워쇼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워쇼)는 두 살에 불과했고 인간 아이와 같은 성장 과정을 겪고 있었다. 생후 1년 무렵부터 시행된 가드너 부부의
수화교육으로 로저가 워쇼를 처음 만났을 무렵 워쇼는 간단한 몇개 단어와 단문을 수화로 말할 수 있었고,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표현가능한 단어와
문장은 다양해지고 있었다. 워쇼는 인간 아이처럼 배변 훈련을 통과하고 각종 놀이를 할 수 있었으며 상대의 마음을 예측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보였다.
가드너 부부는 인간이 어렸을 적 언어를 배우듯 조작적 조건화 기법을 사용해 워쇼에게 수화의 기본을 가르친 후, 실험자들이 워쇼 주변에서
수화로만 대화함으로써 워쇼에게 수화노출을 증대시키는 환경을 조성했다. 영민한 유인원 워쇼는 가드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습득했으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대화에 응용하는 요령을 터득한다. 반복을 통해 단순히 특정 동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혼자 있을 때나, 잡지를 읽을 때,
대화할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이 말을 사용하듯 워쇼는 수화를 사용했다. 인간의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고 성장하면서 창조적 사고를 키워나가듯
워쇼도 기본적 수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장을 사용했고 경우에 따라 인간보다 뛰어난 사고를 보이기도 한다(예를 들어 '냅킨'이라는 수화를 배운
적이 없음에도 추리를 통해 '냅킨'이란 수화를 맞춘다).
비록 수화, 얼굴 표정, 몸짓 등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워쇼의 언어는 분명 대화가능한 상태까지 발전했고 인간만의 축복이라 여겨지던 언어에
대한 편견을 지우게 했다. 워쇼는 다섯 살이 되자 132개의 수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고 그보다 훨신 많은 수화를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조합하여 배운 적이 없는 창조적 문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단어를 배우고, 주어구(저 열쇠)와 동사구(나 열어)를 거친 후
수식어구(검은 개)가 뒤따랐으며 마지막으로 경험이나 감각을 나타내는 구(꽃 냄새)가 뒤따랐다. 이는 인간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한 경로로 수화를 익혀나가는 것이었고, '노엄 촘스키'같은 언어학자들이 (유인원이 아닌) '인간은 언어 습득 장치(언어 기관)가 뇌에 내장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란 주장을 반박하는 결과였다.
워쇼가 5살이 되자 통제가 힘들어졌으며, 워쇼의 거주지 근처에 쇼핑몰이 들어설 계획이 수립되는 등 적잖은 변화가 일자 앨런 가드너는
워쇼를 오클라호마 대학의 유인원 연구소로 보낼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동반자(보호자)로 로저를 택한다(가드너 박사가 택한 것인지 워쇼가 택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유인원 연구소의 총책임자였던 레먼은 로저가 생각했던 학자의 모습이 아닌 폭군이었고 상업적이였다. 그로부터 워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로저는 워쇼와 어린 침팬지 4마리를 작은 섬으로 이동시킨다.
4마리 침팬지는 고집 센 셀마, 가여운 신디, 당당한 브루노, 뇌가 두 개인 부이였다. 워쇼는 이들과 어울리며 수화를 가르치기도 하고,
본인이 침팬지의 몸짓 언어를 습득하기도 했으며, 영어로 된 음성언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7개의 수화동작을 요하는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저는 이 어린 침팬지 무리를 돌보며 워쇼가 특출난 천재 침팬지여서가 아니라 다른 침팬지들도 수화를 배울 수 있으리란 가설을 세우고
수화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결과는 로저의 예상대로 (개인차가 있긴 했지만) 침팬지들은 수화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습득 속도와
방법은 성격, 성장 환경 등의 요인에 의해 다양하게 나타났다.
로저는 근처에 있는 '침팬지를 교차양육 중인 가정'을 방문해 수화를 가르치는 시도를 추가한다. 로저의 바램과 예상대로 침팬지는 확실히
수화를 이용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단순 정보의 전달을 넘어 감정표현, 논리적 사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로저가 워쇼와 4마리 친구들이 사는 섬에 다른 침팬지(교차양육을 하다 사정에 의해 파양당한 경우 등)를 데려왔을 때, 침팬지들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기들끼리 있을 때조차 수화로 의사소통 하는 모습을 보였다. 분명 언어는 인간만의 도구가 아니었다. 인간이 자만했거나
무지해서 다른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침팬지들은 인간처럼 상대방에 따라 대화의 형태, 즉 격식을 갖출 줄 알았고 선생님
앞에서, 친구 사이에, 자신보다 높은 위계를 가진 침팬지에게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보였다.
침팬지와 교감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과학자로서의 입장'과 '침팬지를 사랑하는 양부모로서의 입장' 사이에서 갈등한다. 레먼과 같은 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드너 부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과학자로서의 위상에 가중치를 뒀지만 로저는 그럴 수 없었고 침팬지들의 처우 개선과 이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자란 워쇼와 같은 침팬지들이 아프리카 밀림에서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접하고 단념하게 된다.
차선책으로 침팬지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했지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고 원치않는
현실과 타협해야하는 자신에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끼고 침팬지들에 강한 연민을 느낀다.
워쇼는 두 차례 출산을 했지만 불운하게도 두
아기 침팬지는 생존하지 못했고, 두 번째 아이가 죽자 워쇼는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로저는 워쇼에게 힘을 주고자 다른 연구소에서 생후 10개월된
아기 침팬지 '롤리스'를 입양한다.
"수화를 할 수 있는 침팬지는 자녀에게 수화를 가르칠까? 그리고 그런 부모밑에서 자란 어린 침팬지가 수화를 배우게 될까?" 라는 의문이
뒤따랐고 이것은 롤리스를 통해 풀리게 된다. 양부모인 워쇼와 앨리는 롤리스에게 수화를 가르쳤고 롤리스는 수화를 배우고 이를 응용해 의사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인원에게서 언어가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는 중요한 발견이 확인되었고 역시 언어는 인간만이 것이 아니란 방증이었다.
철저한 상업주의자인 레먼의 마수를 벗어나 워쇼와 롤리스에게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주를 준비할 무렵
모자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합류했고 CWU(Cetral Washington University)에서 제공한 안락한 공간으로 이주한 후 다시 다르와
타투가 합류함으로써 총 5마리로 구성된 침팬지 사회가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고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고 존중하는 작은 사회공간이 형성되었다. 인간처럼 침팬지 또한 사회적 동물이고 공동체 내에서 화합해 살 수
있는 지적 생명체임이 드러났고, 이들의 의사소통에 수화, 즉 언어가 사용되었다.
침팬지가 인간의 예상보다 높은 지적 수준과 언어 능력을 소유하고 있고 사회적 동물임이 증명되었지만 동물 실험(특히
의학적 용도로 시행된)은 꾸준히 증가했고 침팬지의 권리는 보통 무시당했다. 그저 실험용 도구로 여겨졌으며 열악한 실험실 감옥에서 침팬지들은 정신
질환을 비롯한 질병과 공포에 시달렸다. 제인 구달과 로저는 이런 침팬지의 권리를 주장하고 침팬지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해 보지만
이해관계자(국립 보건원, 제약 회사, 기타 연구 시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히 좌절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유인원의 권리 따위보다 당장 소요될
'돈'에 훨신 큰 의미를 뒀다.
CWU에서 제공한 우리는 안전하긴 했지만 실내공간이라는 제한점이 있었기 때문에 워쇼 가족에게 실외생활을 겸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고, 로저는 15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기금 마련과 공사를 거쳐 실외 우리를 만들어 워쇼 가족을 이주시킨다. 그리고 그 공간의
이름을 <침팬지 인간 커뮤니케이션 센터>라 정한다.
로저가 침팬지를 연구하며 이들이 '인간의 친척이고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진 후로,
점차적으로 침팬지 연구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이고, 침팬지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사회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친척인 침팬지를 위한 합법적
보호 규범이 만들어지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우리가 만들어져야 하며, 침팬지가 여생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인간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물을 학대하고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성과, 윤리적 차원에서 허용
한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할 때라고 말한다.
자신이 침팬지 연구에서 지대한 업적을 쌓은 학자로 불리기보다 침팬지를 사랑한 인간으로 대우받기를 원한
것이다.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와의 대화>를 접하기 전까지 침팬지에 대해 내가 알고있는 수준은 아프리카 열대
우림, 타잔의 치타, 영리한 동물, 영장류, 원시 인류의 형제, 사회적 동물이란 정도였다. 그러나 책을 읽은 후 리뷰를 쓰며 다시 바라본
침팬지는 인간과 지적 능력을 공유하는 인간의 친구 혹은 다른 형태의 인간이라는 생각을 추가할 수 밖에 없었다. 침팬지(Chimpanzee)라는
단어의 어원이 '가짜인간'이라는 콩고 방언에서 왔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서아프리카 열대 우림에 사는 원주민들은 유전자 분석이 이루어지기 수천
년 앞서 이미 침팬지가 인간의 조상이나 형제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ABC방송 기획으로 로저가 13년 전 헤어졌던 침팬지 친구, 부이를 만났을 때 부이는 로저가 기억하지 못했던
사소한 추억까지도 기억하고 있었고 이것이 로저에게 한없는 무력감과 자책감을 안겨주었듯,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는 침팬지들의 처우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공유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주항공 과학이나 의학적 실험을 위해 필요한 어린 침팬지를 얻는 방법,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이송하는 과정,
실험실의 상태, 실험자의 태도 등을 접하며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지만, 동물 실험이 필수적인 분야가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에 동물실험의 허용범위에 대한 고민을 같이하게 된다. 인체에 가해지는 실험에 대해 발표된 헬싱키 선언(Declaration of
Helsinki)처럼 실험동물에 관한 윤리 강령이 마련돼 있긴 하지만 이에 대한 점검과 대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열린책들' 출판사와 <침팬지와의 대화>란 제목을 보며 침팬지와 대화를 한다면 어느 수준까지
가능할까, 어떤 방법으로 교육시켰을까 등 객관적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로저 파우츠가 의도한 바는
내가 기대했던 지적 보고서가 아닌 '가족으로서의 침팬지'에 대한 이야기와 '인간의 친척들'에 대한 윤리와 도덕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로저 파우츠에게 존경과, 2007년 세상을 떠난 워쇼에게 명복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