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인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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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키거나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어떤 주제에 상관없이) 주로 서양이나 동아시아를 다룬 것들이다.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에 위치하니, 동아시아에 관심이 쓰이는건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고, 근현대사에서 세계를 재패한 것이 서양이니 서양의 역사와 문화가 큰 지배력을 가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반면, 인도나 이슬람은 우리에게 '낯선 어떤 곳'으로 인식되고 많은 역사서에 등장하는 이방인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인문학의 거짓말>은 흔히 암흑시대로 일컬어지는 중세 시대가 실제로 인문학의 정체기 혹은 퇴행기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동시대에 서양, 인도, 이슬람, 중국, 그리고 한국의 문화(사상, 문화, 예술)를 고찰함으로써 서유럽 중심으로 짜여진 역사관에 회의감을 표현한다.


서양 근대사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유럽을 벗어나 전세계를 향했다. 새로운 대륙과 국가의 발견은 정복전쟁과 식민지화를 초래했고 피정복자의 찬란한 문화와 유산은 파괴되고 폄하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도, 중국, 이슬람, 한국 모두 그런 피해를 입었다.


중세시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점점 더 다양해지는 듯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서 동로마제국의 멸망까지, 서로마의 멸망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어인을 쫓아내고 대항해시대가 열리는 시점까지, 서로마의 멸망에서 교황권의 쇠퇴가 급격히 이뤄진 시기까지 등등 관점에 따라 중세 시대는 다양하게 구분된다. 학자에 따라 중세의 시작점으로 언급된 서로마 제국의 멸망 시점에 대한 이견도 나오고 있다. 최근 중세시대의 정의와 의미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으며 문명의 암흑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문명의 여명기로 여겨지는 추세인 듯하다. 


<인문학의 거짓말>의 저자 박홍규는 중세시대가 암흑시대라는 관점은 서양사에 국한된 편협한 시각으로 행해진 단조로운 구분이며, '세계사라는 지구의 영역'에서 같은 시기의 다른 문명을 고찰한다면 중세시대가 암흑시대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각 대륙이나 국가마다 중세라 칭할 수 있는 시기도 달라지게 된다. 


서양 제국주의가 세계를 정복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주입함으로써 잊혀져 간 문명들 또한 개성있는 훌륭한 문화를 이뤄냈고, 물질문명에 젖어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등한시하는 현대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이들 문화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히 필요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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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뜻 논어 - 전광진 교수가 드라마로 엮은
전광진 지음 / 속뜻사전교육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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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논어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인생의 지침이 되는 책'으로 논어를 꼽는 유명인들의 언급을 통해서였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라 일컬어지는 이들과 지성이 넘치는 이들이 꼽는 인생의 지침서라면 내게도 큰 교훈을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 논어를 읽었을 때, 논어 20편 중 1편과 2편인 학이와 위정에서 여러번 중도포기했다. 낯선 한자와 그에 대한 간략한 해석으로 구성된 책은 내가 완독하기 버거웠다. 수학을 싫어하는 친구들이 집합의 달인이 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내게 '논어'는 학이와 위정으로만 쓰인 책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며 이런 저런 책들을 읽다보니 중국의 역사도 조금 더 알게되고 한자에 대한 이해도 조금은 올라 다시 논어를 접했을 때는 완독할 깜냥까진 가능했다. 어찌어찌 완독은 했음에도 뭔가 의미를 놓치는 기분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는데, 이 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두 편의 논어를 더 읽고 나니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는 폭이 넓어짐을 느꼈다. 이것은 논어에 언급된 인물이나 역사적 배경을 조금 더 알고 읽어서 그런 것인지 나이가 들어 삶에 대한 자세가 너그러워져 그런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논어가 주는 의미를 '인생의 지침서'라 할만큼 깊이 이해하지 못했음은 명확하다.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다시 들여다보고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조금씩 보이는 것이 많아지리라 기대할 뿐이다.  


  

<우리말 속뜻 논어>는 여지껏 읽은 논어 4권 가운데 가장 읽기 편하게 구성돼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내용적인 면과 책 자체가 주는 느낌으로 인해 쉽게 느껴지는 것 같다. 먼저 내용적인 부분을 살피자면, 간략하나마 공자의 생을 비롯해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으며 좌우 페이지에 각각 해석과 한자를 따로 담고 있다. 해석은 딱딱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구로 편히 쓰여있다. 각 장의 초입에 빨간 글씨로 한 두 문장으로 추가설명하는데 이는 각 경구에 대한 해석에 앞서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또한 주석을 페이지의 하단에 놓지 않고 각 장마다 언급하고 있으며 흔히 쓰이지 않는 한자를 구절 옆에 넣음으로써 독자가 옥편을 뒤적거리는 횟수를 줄였다. 책 자체가 주는 편안함은 책의 크기와 글자의 크기이다. 책이 아담하여 휴대는 물론이고 한 손에 들고 읽어나가기 편하다. 글자 크기는 일반 서적보다 큰 폰트를 사용했고 한 지면에 많은 내용을 담지 않아 가독성이 좋다. 



아직 40대 초중반의 나이에 그리 높은 지식을 쌓은 바도 아닌지라, 논어에 대한 어떤 평을 내릴 처지는 아니다. 단지 몇 차례 논어를 접하며 내가 느낀 바는 논어가 쓰인 춘추시대와 현대의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을 듯 하고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분명 중국역사와 철학을 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어가 내용이 방대한 책은 아니다. 단순히 읽고자 한다면 누구라도 몇 시간 안에 완독할 수 있는 분량이다. 그러나 어떤 울림이 있는 글귀가 있다면 잠시 머물며 그 의미를 되새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읽을수록 인간의 고귀함에 대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며 반성하게 되지만, 논어에 놓인 교훈이 일상생활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논어의 곳곳에 지혜가 널려있어도 아직 내가 거둬들일 수준이 아니라 생각하며 앞으로도 종종 읽어나갈 생각이다. <우리말 속뜻 논어>는 논어를 접하고자 하나 나처럼 두려움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권할 만하다 생각하고 처음 논어를 읽는다 하더라도 곰곰히 생각하며 읽다보면 분명 와닿는 구절이 많을 것이라 여긴다.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며 나를 가장 반성하게 만든 구절을 적어본다. 

제 4편 14장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을지를 걱정하라.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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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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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보고 표지를 손바닥으로 여러번 쓸어보았다. 속표지를 보고 머리말을 보고 챕터를 확인하면서 책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 우주의 진리를 찾는 학문을 소개하는 책의 표지가 너무 서정적이고 포근한 느낌을 줘, 리뷰의 첫머리에 적지 않을 수 없었다. 


색깔이 맘을 흔든 것과 별개로 물리에 대한 토막지식이라도 배우고자 읽는 책이기에 내용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우주를 만지다>는 총 4개의 챕터(별 하나 나 하나, 원자들의 춤, 신의 주사위 놀이, 시간여행)로 구성돼었으며 각 챕터는 열 개 남짓의 소주제를 포함한다. 우주의 광대함을 논하고 현대 물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론과 물리학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이 다다른 수준을 설명한다. 


소주제는 우주의 생성과 변화, 원자,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 등 사람들이 궁금해 할만한 것들로 이뤄졌으며, 먼저 해당 소주제에 대한 물리적 지식을 쉽고 편하게 전달한 후 그 지식이 갖는 학술적 의미를 부연설명한다. 소주제에 대한 과학적 영역의 설명이 끝나면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여담이 이어지고 마지막에 해당 주제를 모티브로 한 '시(詩)'를 삽입해 놓았다. 어쩌면 저자 권재술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물리적 지식이 아닌 각 후반부에 놓인 철학적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우주의 광대함과 초연함을 전하는 부분에서 겸손을, 광학과 양자역학을 전하는 부분에서 진리와 실존의 의미을, 그리고 물리법칙의 견고함을 전하는 부분에서 질서를 생각하게 됐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주제에 대한 편안한 설명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교단에 선 저자가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듯 이해하기 쉬운 예로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 놓는다. 예를들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다음의 예시를 사용한다. 

어머니가 딸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 "무엇을 먹고 싶니?"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아이는 원래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는데 그러면 야단맞을 것 같아 "우유!"라고 대답해 버린다. 그러면 어머니가 딸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낸 걸까? 아니다. 관찰 행위 자체가 그 대상을 교란해서 실상과는 다른 것을 관찰하게 한 것이다. 이런 교란을 적게 하려면 아주 미약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지도 말고 말을 걸지도 말고 아주 몰래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관찰 대상을 교란하지는 않지만 실상을 알기는 더 어려워진다. 관찰을 약하게 하면 실상을 알기 어렵고, 관찰을 강하게 하면 관찰 행위 자체가 대상을 교란해서 실상을 바꾸어 버린다. 이래저래 그 사람의 실제 상태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리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저자는 이어지는 소주제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인간의 삶과 연결짓는다. 인간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인 고로 양자 중첩의 상태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고 행하게 되면 이는 양자역학에서 관찰자가 관찰 행위를 통해 개입한 것처럼 특정 결과를 만든다. 즉 선택의 기록이 남겨지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미래의 가능성이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하나의 과거로 남게 된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택의 연속이며 수많은 꿈을 포기해 나가는 과정임을 말해주고 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 주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물리학과 달리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 심오해 보였다. 온전한 이해는 못하더라도 해당 주제에 등장하는 인물과 그들이 남긴 업적의 의미(진정한 이해가 아닌 대략적인 개요일지언정)를 되새겨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됐다.  


현대물리학이 다루는 영역은 플랑크 길이부터 광년까지 불가해한 범위이다. 너무나 작거나 너무나 커서 확인이 불가한 영역을 초월해 그보다 훨씬 더 작거나 훨씬 더 큰 범위까지 다루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우주의 크기를 관측할 수 없으며 소립자의 크기도 직접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관념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리라. 그러나 우주의 진리를 찾아 온 힘을 쏟는 과학자들의 노고가 헛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과학자들이 지성의 영역을 확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 것이 우리 인류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 걸어갈 길이라 여기기에 <우주를 만지다>를 읽으면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을 느낀다. 





권재술의 <우주를 만지다>를 읽으며 두 권이 책이 떠올랐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주의 탄생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변천과 인류의 지적성장에 대해 설명하며, 리사 랜들의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현대물리학이 다루는 거시 및 미시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해준다. 두 권 모두 내게는 감동적이었고 언제고 다시 읽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코스모스>는 잊어버린 내용을 복습하는 마음으로,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는 이번에는 완독하고 싶다은 마음으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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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의 ‘인생과 신화’ 특강
조지프 캠벨 지음, 권영주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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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지프 캠벨은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리는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이다.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은 조지프 캠벨이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시 쿠퍼유니언포럼에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신화는 여러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신화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되었으며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구심점 역활을 수행함으로써 도덕과 화합, 활력, 창조력을 제공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신화를 '집단의 꿈'으로 인식하고 유아기의 억압된 충동이 표출된 것으로 여겼다. 신화란 무의식적이고 강박적인 공포와 망상이 표출된 현상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칼 융은 신화의 이미지가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신화를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습득한다면 그의 영혼은 온전하고 풍요로워진다고 주장했다. 신화는 내적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칼 융의 주장에 따르자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지역, 다른 전통을 가진 문화로부터 창조된 신화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신화가 실제 역사가 아닌 허구에서 비롯됐음을 고려한다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신화들이 갖는 유사성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 정신, 즉 보편적 상상력이 내재돼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의 신화도 유사성을 띠고 있다. 기독교가 에덴동산을 설정하고 그곳에 선악과 나무와 뱀을 등장시키듯, 불교는 세계의 중심에 세계수 나무와 뱀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존재로써 기독교는 두 천사를, 불교는 두 수호자를 설정한다. 뱀과 나무 그리고 영생의 정원 이미지는 불교와 기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신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수메르 문명이나 여러 원시부족의 미술과 의례에 나타나고 있다. 신화는 실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다양한 신화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이다.


신화는 의례를 동반한다. 신화가 상상의 산물일지라도 정신에 깃들면 실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실존의 가치를 키우고 견고히 하자면 그에 걸맞는 격식(의례)을 필요로 한다. 동물, 식물, 대지, 천체, 인간 자체 등 인간의 숭배 대상은 달랐지만 각각에 맞는 의례를 치뤘고 의례를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높이고 결속을 다졌다.


동서양의 신화와 문화는 세대를 거치며 다른 형태로 발전해왔다. 서양의 문화가 개인의 자아실현과 개성에 초점을 맞춰 성장한 반면, 동양의 문화는 개인의 욕구를 억누르고 사회가 제시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추는 것을 미덕으로 강조한다. 신화도 동서양이 다른 형태로 발전하는데 동양의 신이 순환의 고리를 관리 감독하는 입장에 서있었다면 서양의 신은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세상을 만들고 죄를 벌하는 입장에 서있다. 서양의 신은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반면 동양의 신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내면을 살펴 해탈하라고 권한다.


사랑과 전쟁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신화적 사랑은 인간에게 재미와 감동 뿐 아니라 교훈을 주는 경우가 많다. 신화를 전쟁의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이용해 신의 의지를 실행한다는 구실로 참혹한 전쟁에서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전쟁이란 결국 승자와 패자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데 이 때 신화에서 오는 믿음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신화는 의식과 무의식의 상징으로 구성되는데 의식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고 무의식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신화를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개개인의 내면을 다스리고 사회를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잔혹한 범죄행위나 전쟁에 대한 면피도구가 될 수 있다. 


신화는 문화와 상호적으로 작동한다. 신화가 문화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문화가 신화에 깃들기도 한다.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본능을 지닌다. 탄생 후에는 해당 사회가 갖는 질서에 따라 자신을 적응시켜 나간다. 특히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해 미성숙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익히는 사회질서가 인간의 삶에서 지배적 위치를 가진다. 내외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자극(신호)은 인간으로 하여금 반응을 요구하고 반응의 성향은 대부분 사회질서에 의존한다. 신화는 인간의 삶과 동떨어져 존재한다기 보다 '문화적으로 조건화되어 발산되는 신호의 구성체'로 볼 수 있다. 이런 패턴이 세대를 거듭해 진화할 때 문화적으로 결정된 신호에 대해 인간의 신경계에 문화적으로 각인된 반응을 초래하게 된다(생득적해발기구 - IRM, Innate Releasing Mechanism). 


현대인의 삶에 있어 신화가 제시하는 이상향이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신화는 인간의 문화에 깃들어 상보적으로 성장해왔고 부모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건전한 신화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유발하고 부정적 에너지를 통제하는 신호로써 자녀세대가 발전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신화가 올바르게 작동하면 인간은 우주에 대한 경외감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당대의 지식과 과학 그리고 신화를 접할 이들에 부합하는 세계관을 선사하고, 개인이 속한 사회의 도덕질서와 사회규범을 승인하고 각인하며 정신적 균형을 심어주어 인생을 바로 살 수 있게 도와준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에게 신화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여러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신화는 허구의 상상물을 넘어 인류의 지혜와 인류 문화를 쌓아올린 주춧돌이었다. 신화는 사회에 맞게 진화할 것이며 진화의 방향은 특정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비추어 일깨워주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은 여러 지역의 신화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신화의 배경과 내용은 간략히 서술하면서 그 신화가 갖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집중한다. 특히 동서양의 신화가 보이는 차이가 어떻게 문화의 차이로 이어지는가를 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 살피고 있다. 저자 '조지프 캠벨'은 물질주의가 만연해 인스턴트 문화가 득세하고, 고전적 문화는 퇴보하는 사회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는 신화와 그에 걸맞는 의식은 인류 문명의 발달과 함께 세대를 거듭하며 복잡해지고 정교해졌으며 문화을 발전을 이끌었음에 주목한다. 신화는 인류에게 종교적 의미를 넘어 가치관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화에 깃든 선조들의 지혜를 이해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여긴다.


르네상스 시대와 근현대를 거치며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리라는 믿음이 컸던 시기가 있었고 심지어 신화와 종교의 붕괴를 예상한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신화와 종교는 단지 진실에 기반한 믿음이라기보다 인간 사회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더불어 문화를 만든다. 급변하는 사회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든 세계는 반동적으로 어느 때보다 신화와 종교의 역활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신화를 만나는 시간>은 서유럽과 동양의 신화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근동과 인도의 신화 그리고 소수민족의 신화를 두루 다루고 있다. 신화에 대한 상식의 폭을 넓히고 신화가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내면의 추스림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되새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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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입문 니체 아카이브
베르너 슈텍마이어 지음, 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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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는 이름은 다양한 곳에서 자주 회자되는 익숙한 대상임에도 그 이름 곁에는 '어려운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같은 평전이나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니체의 말>처럼 니체의 사상을 발췌한 서적을 읽으면 니체의 사상에 쉽게 다가갈 듯 하지만, 막상 니체의 저작을 읽으면 그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것 조차 버겁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니체 입문>의 저자 '베르너 슈텍마이어'는 나처럼 니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독자를 위한 해결책으로써 니체의 삶을 돌아보고 니체의 철학하는 방식과 태도를 알려주고자 한다. 니체가 살아온 길을 아는 것은 니체의 사상이 태어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니체의 철학 방식과 태도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니체의 저작에 접근할 때 안내자 역활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너 슈텍마이어는 니체의 생예를 서술하는데 백 페이지 가량을 할애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12살인 1856년 최초의 철학 논문 <악의 근원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김나지움과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중에도 니체의 사고는 열려 있었고 다양한 저작을 작성했고 이 가운데 몇몇은 니체 사상의 초기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1869년 25세의 나이로 바젤대학 문헌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강단에 선다. 문헌학과 교수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니체는 철학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았고 철학자로서 강단에 서길 원했다. 니체는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피아노 연주를 잘했고 종종 작곡을 하기도 했으며 바그너(리하르트 바그너, 1813-1883)와 친밀히 교류했다. 

자신을 쇼펜하우어(1788-1860)의 신봉자라 말한 니체는 진정한 철학자란 사고를 자유롭게 하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해 고독과 싸우고 싸우며 끔찍한 진리에 직면할 수 있을만큼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75년 니체를 괴롭혀왔던 고질적인 건강문제(안과적 문제와 두통)가 악화돼 고통이 심해지자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로부터 한발짝 멀어져 '혼자인 삶과 혼자서 가는 길에 열중'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은 여러번 반복되는데 니체는 이 고통을 자신의 사고를 깊게 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니체가 발표한 저작들이 사회적 관심을 끌며 니체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긴다. 1878년 삐걱거리던 바그너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스스로를 더욱 고독으로 몰아붙여 진정한 철학자로 거듭나고자 한다. 익숙한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존경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조차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자 교직에서 물러나 방랑을 떠난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저작으로 써내려간다. 

니체는 건강 문제와 더불어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특히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깊이 빠졌던 여인 '루 살로메'에게 청혼해 거절당한 것과 누이 동생 엘리자베스와의 불화는 그를 힘들게 했다. 힘든 상황이 주는 고통은 철학자로서의 니체를 성숙시켰고 고난스런 시간을 보내며 훌륭한 저작을 집필했다. 

1889년 니체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으며 특히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병행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즈음 니체는 더욱 유명해지고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된다.니체는 1889년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병석에서 보내다 1900년 8월 극심한 독감과 발작으로 생을 마감한다.
누이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어머니로부터 저작권을 비롯한 니체의 권리를 강제로 양도받아 자신의 잇속을 챙긴다.




니체의 삶은 고독해지는 과정이였다. 자신이 강의하던 학문(문헌학)을 버리고 그가 동경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버렸으며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던 바그너와 그의 문화 개념을 버렸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친구들마저 버렸다. 니체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로부터 해방될 때 정신적 자유가 자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철학자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다. 생리학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아픈 상태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해방되어 더 큰 건강을 추구하는 과정에 철학이 싹튼다고 여겨, 자신의 고질적인 병과 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다.


니체는 고유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는데 적합한 문체를 추구하고 만들어냈다. 철학적 사유에 따라 문체를 달리했다. 니체의 특징적인 세가지 형식은 아포리즘 저서, 철학시, 노래다.
기존의 서술방식을 벗어나 아포리즘이나 시같은 형식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경우 자신의 말을 들어줄 독자의 수가 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기술방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오히려 자신의 사유를 따라잡을 수 있는 독자를 선별하는 경향을 보였다.


니체의 글은 각각이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면서 다른 글과 연결된다. 다만 전개과정이 연속적이지 않고 생략된 부분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 그 연골고리를 찾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다. 니체가 아포리즘을 즐겨 사용한 것은 생리적인 고통(시력저하와 두통 등)으로 오랜시간 집중해 집필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환경과 자신의 글이 개방적으로 존재해 독자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니체가 바라는 독자는 신중하고 섬세한 자이다. 자신은 해야 할 말을 천천히 하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 니체가 원하는 신중한 독자란 예측하지 못한 것들에 접했을 때 놀라지 않는 사람이고, 섬세한 독자란 자신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고 들어 더 이상 분화할 수 없는 개념화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저작을 성급히 읽고자하는 독자는 절망감에 빠질 것이라 예견한다. 니체가 의도한 바에 따르자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환경에 빠져 자신의 저작을 곰곰히 곱씹으며 읽어야 비로소 글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이전 개념을 대체할 다양한 사조가 등장하는 시기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제국주의 등이 대체제로 대두되었으나, 니체는 이러한 사조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치 않았고 방향 상실을 극복하는 길은 '문화의 고양'을 통해 가능하다 믿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 그리스 문화를 꼽았다. 그리스 문화가 가진 깊은(또는 혹독한) 사유를 바탕으로 제시된 철학과,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본성을 자극해 보다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경쟁을 고귀하게 여겼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 동조하였으며 소크라테스를 경계로 심연을 들여다보던 철학이 논리라는 표면에 국한된 철학으로 퇴행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 질서는 논리라는 환영에서 벗어나 보다 심연을 볼 수 있을 때 정립될 수 있다고 여겼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현실에 대한 환영만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환영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환영의 방향 설정을 이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삶 또한 강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종교, 도덕, 논리, 인식, 학문 언어, 믿음, 이상 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앎으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기존에 존재하는 환영에 둘러싸여 있으며 자신의 본질을 살피기 위해서는 모든 환영에서 벗어나 자신 안에서 토대를 재구성해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여겼다.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기존의 모든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현존하는 모든 환영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앎과 새로운 삶을 추구했다. 그 과정은 인간이 생존을 넘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하는 의지를 얻는 길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 단계인 위버멘쉬로 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니체를 읽고자 노력한 것은 여러번이다. 보통 책을 펼치면 마지막 결론까지 보는 편인데, 니체의 작품은 내 이해력을 크게 상회해 읽다 포기하곤 했다. 오래 전 단테의 신곡을 펼쳤다 덮었다 반복하다 아직까지 읽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니체는 알고 싶지만 선뜻 다시 손을 뻗기 어려운 주제이다. 


베르너 슈텍마이어의 <니체 입문>을 읽어보니 왜 내가 니체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알게 됐다. 독서를 하기 전 어떤 위인이나 작품에 대한 평전을 읽는 걸 일부러 꺼려하는데 그건 내가 느끼는 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감상에서 벗어나더라도 해당 위인의 작품을 통해 주관적인 무언가를 얻는 것이 독서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일부러 줄거리조차 보려하지 않는다. 이런 오만한 생각으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내게 니체는 어려움 그 자체에 불과했다. 그가 적은 글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방정식의 개념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수학의 정석을 손에 쥐고 읽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아마 슈테판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나 베르너 슈텍마이어의 <니체 입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난 평생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접근조차 못했을 것 같다. 

 

이제 <니체 입문>에서 저자가 전해준 니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베르너 슈텍마이어 자신도 니체에 대한 본질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행위라고 말한다)을 통해 니체가 어려운 이유와 니체의 사유가 추앙받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을 따름이다. 이 토대가 니체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길 희망한다. 

언젠가 다시 니체를 읽고자 할 때 <니체 입문>을 다시 읽고 개념을 잡은 후 접근하려 하고 니체의 작품을 읽는다면 니체가 권한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정독하고 집중하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시도해야 할 듯하다. 


나와 같이 니체를 알고 싶지만 어렵거나 두려워서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에게 <니체 입문>이 안내자 역활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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