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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입문 ㅣ 니체 아카이브
베르너 슈텍마이어 지음, 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20년 9월
평점 :
'니체'라는 이름은 다양한 곳에서 자주 회자되는 익숙한 대상임에도 그 이름 곁에는 '어려운 철학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같은 평전이나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니체의 말>처럼 니체의 사상을 발췌한 서적을 읽으면 니체의 사상에 쉽게 다가갈 듯 하지만, 막상 니체의 저작을 읽으면 그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것 조차 버겁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니체 입문>의 저자 '베르너 슈텍마이어'는 나처럼 니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독자를 위한 해결책으로써 니체의 삶을 돌아보고 니체의 철학하는 방식과 태도를 알려주고자 한다. 니체가 살아온 길을 아는 것은 니체의 사상이 태어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니체의 철학 방식과 태도에 대한 개괄적 이해는 니체의 저작에 접근할 때 안내자 역활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너 슈텍마이어는 니체의 생예를 서술하는데 백 페이지 가량을 할애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12살인 1856년 최초의 철학 논문 <악의 근원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김나지움과 대학에서 교육을 받는 중에도 니체의 사고는 열려 있었고 다양한 저작을 작성했고 이 가운데 몇몇은 니체 사상의 초기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1869년 25세의 나이로 바젤대학 문헌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강단에 선다. 문헌학과 교수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니체는 철학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았고 철학자로서 강단에 서길 원했다. 니체는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피아노 연주를 잘했고 종종 작곡을 하기도 했으며 바그너(리하르트 바그너, 1813-1883)와 친밀히 교류했다.
자신을 쇼펜하우어(1788-1860)의 신봉자라 말한 니체는 진정한 철학자란 사고를 자유롭게 하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해 고독과 싸우고 싸우며 끔찍한 진리에 직면할 수 있을만큼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75년 니체를 괴롭혀왔던 고질적인 건강문제(안과적 문제와 두통)가 악화돼 고통이 심해지자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로부터 한발짝 멀어져 '혼자인 삶과 혼자서 가는 길에 열중'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은 여러번 반복되는데 니체는 이 고통을 자신의 사고를 깊게 하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니체가 발표한 저작들이 사회적 관심을 끌며 니체를 추종하는 무리가 생긴다. 1878년 삐걱거리던 바그너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스스로를 더욱 고독으로 몰아붙여 진정한 철학자로 거듭나고자 한다. 익숙한 삶으로부터 해방되고, 존경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조차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자 교직에서 물러나 방랑을 떠난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저작으로 써내려간다.
니체는 건강 문제와 더불어 대인관계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특히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깊이 빠졌던 여인 '루 살로메'에게 청혼해 거절당한 것과 누이 동생 엘리자베스와의 불화는 그를 힘들게 했다. 힘든 상황이 주는 고통은 철학자로서의 니체를 성숙시켰고 고난스런 시간을 보내며 훌륭한 저작을 집필했다.
1889년 니체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으며 특히 심각한 정신적 문제가 병행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즈음 니체는 더욱 유명해지고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된다.니체는 1889년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병석에서 보내다 1900년 8월 극심한 독감과 발작으로 생을 마감한다.
누이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어머니로부터 저작권을 비롯한 니체의 권리를 강제로 양도받아 자신의 잇속을 챙긴다.
니체의 삶은 고독해지는 과정이였다. 자신이 강의하던 학문(문헌학)을 버리고 그가 동경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버렸으며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던 바그너와 그의 문화 개념을 버렸다. 마지막에는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친구들마저 버렸다. 니체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로부터 해방될 때 정신적 자유가 자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철학자는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철학을 한다고 생각했다. 생리학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아픈 상태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해방되어 더 큰 건강을 추구하는 과정에 철학이 싹튼다고 여겨, 자신의 고질적인 병과 정신적 고통을 기꺼이 감내했다.
니체는 고유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는데 적합한 문체를 추구하고 만들어냈다. 철학적 사유에 따라 문체를 달리했다. 니체의 특징적인 세가지 형식은 아포리즘 저서, 철학시, 노래다.
기존의 서술방식을 벗어나 아포리즘이나 시같은 형식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경우 자신의 말을 들어줄 독자의 수가 줄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기술방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오히려 자신의 사유를 따라잡을 수 있는 독자를 선별하는 경향을 보였다.
니체의 글은 각각이 독립적인 형태로 존재하면서 다른 글과 연결된다. 다만 전개과정이 연속적이지 않고 생략된 부분을 따로 설명하지 않아 그 연골고리를 찾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다. 니체가 아포리즘을 즐겨 사용한 것은 생리적인 고통(시력저하와 두통 등)으로 오랜시간 집중해 집필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환경과 자신의 글이 개방적으로 존재해 독자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니체가 바라는 독자는 신중하고 섬세한 자이다. 자신은 해야 할 말을 천천히 하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천천히 읽히기를 바란다. 니체가 원하는 신중한 독자란 예측하지 못한 것들에 접했을 때 놀라지 않는 사람이고, 섬세한 독자란 자신의 말에 담긴 의미를 파고 들어 더 이상 분화할 수 없는 개념화에 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저작을 성급히 읽고자하는 독자는 절망감에 빠질 것이라 예견한다. 니체가 의도한 바에 따르자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깊이 사색할 수 있는 환경에 빠져 자신의 저작을 곰곰히 곱씹으며 읽어야 비로소 글에 담긴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니체가 살았던 19세기는 이전 개념을 대체할 다양한 사조가 등장하는 시기였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제국주의 등이 대체제로 대두되었으나, 니체는 이러한 사조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치 않았고 방향 상실을 극복하는 길은 '문화의 고양'을 통해 가능하다 믿었다. 그리고 그 후보로 그리스 문화를 꼽았다. 그리스 문화가 가진 깊은(또는 혹독한) 사유를 바탕으로 제시된 철학과,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본성을 자극해 보다 위대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경쟁을 고귀하게 여겼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 동조하였으며 소크라테스를 경계로 심연을 들여다보던 철학이 논리라는 표면에 국한된 철학으로 퇴행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 질서는 논리라는 환영에서 벗어나 보다 심연을 볼 수 있을 때 정립될 수 있다고 여겼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현실에 대한 환영만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환영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만약 인간이 환영의 방향 설정을 이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삶 또한 강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종교, 도덕, 논리, 인식, 학문 언어, 믿음, 이상 등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앎으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기존에 존재하는 환영에 둘러싸여 있으며 자신의 본질을 살피기 위해서는 모든 환영에서 벗어나 자신 안에서 토대를 재구성해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여겼다.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기존의 모든 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닌 현존하는 모든 환영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앎과 새로운 삶을 추구했다. 그 과정은 인간이 생존을 넘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자하는 의지를 얻는 길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 단계인 위버멘쉬로 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니체를 읽고자 노력한 것은 여러번이다. 보통 책을 펼치면 마지막 결론까지 보는 편인데, 니체의 작품은 내 이해력을 크게 상회해 읽다 포기하곤 했다. 오래 전 단테의 신곡을 펼쳤다 덮었다 반복하다 아직까지 읽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니체는 알고 싶지만 선뜻 다시 손을 뻗기 어려운 주제이다.
베르너 슈텍마이어의 <니체 입문>을 읽어보니 왜 내가 니체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알게 됐다. 독서를 하기 전 어떤 위인이나 작품에 대한 평전을 읽는 걸 일부러 꺼려하는데 그건 내가 느끼는 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감상에서 벗어나더라도 해당 위인의 작품을 통해 주관적인 무언가를 얻는 것이 독서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일부러 줄거리조차 보려하지 않는다. 이런 오만한 생각으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내게 니체는 어려움 그 자체에 불과했다. 그가 적은 글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방정식의 개념을 모르는 초등학생이 수학의 정석을 손에 쥐고 읽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아마 슈테판 츠바이크의 <니체를 쓰다>나 베르너 슈텍마이어의 <니체 입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난 평생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접근조차 못했을 것 같다.
이제 <니체 입문>에서 저자가 전해준 니체의 본질에 대한 생각(베르너 슈텍마이어 자신도 니체에 대한 본질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한 행위라고 말한다)을 통해 니체가 어려운 이유와 니체의 사유가 추앙받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을 따름이다. 이 토대가 니체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길 희망한다.
언젠가 다시 니체를 읽고자 할 때 <니체 입문>을 다시 읽고 개념을 잡은 후 접근하려 하고 니체의 작품을 읽는다면 니체가 권한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정독하고 집중하고 생각하며 읽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시도해야 할 듯하다.
나와 같이 니체를 알고 싶지만 어렵거나 두려워서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에게 <니체 입문>이 안내자 역활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