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 - 미국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
폴 S. 보이어 지음, 김종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1492년) 이후 꿈을 좆거나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한 유럽인들에 의해 건설된 미국이라는 나라는 후발주자의 위치였지만 건국(혹은 독립) 후 1세기 가량이 경과했을 무렵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식 후 소련과 함께 냉전시대를 이끌었고 현재는 중국의 급부상으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지위를 위협받고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건재하다. 


세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고 한국과도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의 미국이기에 이 나라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를 읽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는 총 9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장에는 인류의 조상이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1만 5천 년 전부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과 유럽인들의 이주를 짧게 담고 있으며 마지막 9번 째 장에는 1968년부터 2011년에 걸친 시기의 미국이 마주한 문제점과 그에 대한 대응책을 서술하고 있다. 




초창기 미국은 독립전쟁(1775 - 1783)을 거치며 미연방으로 결속되기 전까지 유럽의 이주민들에 의해 구성된 느슨한 연합체였다. 17-18세기 미국의 동부 해안가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서부로 진출해 나갔으며 그 과정에 토착민(인디언)과의 마찰이 발생했고 가끔은 우호적으로, 대부분은 무력을 사용해 그들을 제압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식민지 쟁탈전(1756 - 1763)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영국은 신대륙 동부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식민지로부터 만회하려했던 영국은 설탕세법이나 인지세법과 같은 법령을 제정해 미대륙에 과도한 부담을 안긴다. 이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다 1773년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내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식민지의 12개 주가 연합해 영국에 대항해 승리했고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독립 전쟁에서 연합군을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입하고 비슷한 시기 미국 연방법을 제정해 미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주(state)를 하나로 결속시킨다. 미국의 동부 해안가로부터 시작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지애나 주를 구매하고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 주를 할양받음으로써 영토를 서쪽으로 넓혀갔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남서부 지역의 영토를 획득함으로써 현재의 미국과 유사한 국경을 손에 넣게 된다. 


미 연방은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결속이 다져지긴 했지만 미 북부와 남부는 경제적으로 이념적으로 다소 차이를 갖고 있었다. 북부가 주로 농업과 목축 등에 의존했다면 남부는 목화와 담배에 의존하고 있었고 북부는 진보적 성향이었다면 남부는 보수적 성향이 강했다. 미국이 독립하며 주도적으로 연방을 이끌었던 북부는 자연권 사상을 표방하며 노예제에 대한 회의감을 표했지만 미 연방의 유지를 위해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 때문에 노예제는 유지되고 있었다.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노예제를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심화되다가 1861년 남부주들이 남부 연합을 결성해 북부 연합으로부터 탈퇴하면서 독립 전쟁이 터진다. 4년에 걸친 치열한 전쟁에서 북부 연합이 승리함으로써 노예제가 폐지된다. 


내전이 끝난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 20세기 초가 되자 유럽의 산업 강국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둔다. 산업화는 물질적 번영을 선사했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자면 빈부 격차, 천민 자본주의, 인종 주의, 남녀 차별 등의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자성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정치인들도 여기에 관심을 쏟게 됐다. 노동자와 소외 계층에 대한 배려를 수반한 정책들이 펼쳐졌고 규제 되지 않는 기업들에 대한 감시와 처벌도 강화되었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중립을 표방했다. 여러 국가의,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이 중립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해 보였다. 그러나 1915년 독일의 잠수정이 미국인이 다수 탑승한 여객선을 침몰시킨 데 대해 미국이 항의하자 독일은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아 1917년 미국이 참전하게 된다.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해결을 위해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당시 미국 대통령)은 전범국에 대한 과도한 배상을 요구에 실망하고 소련의 공산주의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이 때 처음으로 윌슨에 의해 상설 국제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후 미국 경기는 잠시 호황을 누렸다. 1920년대 자동차, 라디오, 가정용 전자제품들이 끊임없이 생산되었고 건설도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소비가 줄고 생산품은 남아 도는 상태가 이어졌고 1931년 전세계에 찾아온 디플레이션으로 대공황이 발생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루즈벨트에 의해 뉴딜 정책이 시행됐고 공공 부문에서 각종 사업이 진행되면서 대공황은 점진적으로 회복되었다. 뉴딜 정책으로 어느정도 회복된 미국의 경기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완연한 회복을 보인다.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고 호황을 누렸으며 여성과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사회참여 기회도 확대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럽과 소련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반면 본토에 영향을 받지 않은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전후 동맹국이었던 영국, 미국, 소련은 흩어졌고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의 확산에 힘썼다. 미국이 소련의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맞서면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이 두 강대국은 군비경쟁에 돌입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냉전의 결과로써 한국전쟁으로 발발한다. 한국 전쟁이 1953년 종결된 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움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핵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속에 소련과 미국은 한 발씩 물러나는데 동의한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소련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한다.

미국은 전후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렸지만 빈부격차, 인종 차별, 이민자 문제 등은 심화되었다.

남북전쟁 후 명목상으로는 노예제가 폐지됐지만 사회 곳곳에, 특히 남부주들에서는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졌고 이에 대한 저항이 거세진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차별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며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전국적으로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고 1957년과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되었다.

1960년대 냉전의 폐혜는 베트남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베트남에 의한 베트남 통일이 '도미노 효과'를 불러오리라 두려워 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예상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전쟁은 장기화됐고 미군은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전시위가 미 전역에서 진행됐고 그동안 억눌렸던 억압을 쏟아내듯 인종차별과 빈부격차 등에 대한 시위도 잇따랐다. 정치적 인종적 소요가 한창이던 혼란기에 젊은이들은 기존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 록 음악에 심취하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머리를 기르고 환각제를 복용하는 등 반문화(counterculture)에 빠지기도 한다.


1970년대에 들어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반전시위도 잠잠해졌으나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이듬해 닉슨 대통령이 사임했다. 1973년 벌어진 제 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서 미국은 이스라엘 측에 섰고 아랍은 미국으로 석유수출을 금지하면서 석유파동이 발생했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실업률은 급등했는데 이는 198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회복될 수 있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반 세기를 거쳐온 냉전이 급격히 종식된다. 그러나 2001년 알케에다에 의한 9.11 테러로 미국 본토가 침략받는 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미국과 이슬람 세력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2008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같은 해 금융위기의 발생은 미국의 경기를 악화시켰고 경기 회복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이 보여준 급성장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핵무기, 환경 문제, 기근과 기아, 질병 문제 등 국제적 공조가 필요한 사안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역활의 확대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 '폴 S 보이어'는 미국사를 훑어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의 말미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길을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한다. 미국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미국이 도전 앞에서 보여준 정치적 회복능력과 창조적 대응 능력은 미국을 세계적 강대국으로 이끌었다. 부침이 있었지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확대시켰고 공익을 촉진시켰다. 이것은 시민의 정치 투쟁과 행동주의에 힘입은 바가 크다. 미국이 가진 성격과 미국이 이룩한 성과로 미루어보아 미국이 일시적 패권에 그치기보다 더욱 오래 국가의 위대함을 떨칠 것으로 전망한다.


근현대 세계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미국의 역사는 짧은 시기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에 수록된 많은 이슈들을 얕게나마 알아봄으로써 미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미국이 현재 안고 있는 문제들 즉, 인종 차별, 빈부 격차, 이민자 문제, 국론 분열 등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한국도 겪고 있거나 겪게 될 문제라 보여진다. 이런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지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현명한 대처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값진 교훈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미국사>는 미국을 이해하는 데, 미국사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며 이 책을 통해 보다 넓은 미국사 혹은 세계사를 공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짧은 시간에 축약된 미국사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기에 알맞은 책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스마르크란 이름은 근대 유럽사를 접할 때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그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국을 건설했고 내치와 외교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독일이 강대국으로 발돋음하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접했던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의 생애가 걸은 길을 동행하여 근대 유럽사를 들여다 보고 싶어 <지금, 비스마르크>를 읽게 됐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의 전기라 할 수 있는 책으로 비스마르크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그가 정치에 입문하고 외교적 역량을 펼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1815년 명문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영어, 프랑스어, 펜싱, 승마, 수영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청년 시절은 모범생이라기 보다 방탕한 일탈을 즐기며 보냈으며 법대를 졸업 후 여러 지역에서 공직에 종사했지만 단순무료하고 수직적 일처리에 싫증을 느끼고 사퇴와 재임을 반복하다 184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산으로 물려받은 쇤하우젠 영지에서 수리조합장 직을 얻어 낸다. 수리조합장은 엘베강의 범람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독립적인 공직이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47년 32세의 비스마르크는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해 평생의 반려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고 통합의회의 의원자격을 획득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뛰어든다.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프로이센의 주도적 위치를 구축하려는 비스마르크의 노력은 비스마르크가 가진 냉철함과 외교적 수완의 비상함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의회에서 보수적 입장에서 정국과 정책을 변론하거나 비판한 비스마르크의 달변은 보수의원들 뿐 아니라 정적들에게조차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1848년 발생한 '3월 혁명'으로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된다. 왕정 타도를 기치로 발생한 3월 혁명에 의해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소위 보수파는 잠시 수세에 몰렸는데 비스마르크는 특유의 언변(문체)을 이용해 언론을 이용해 상대 정치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왕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수파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당시 독일은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왕국들이 느슨하게 엮여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의 수뇌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보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조차 보수인 비스마르크는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염원하던 통일이란 프로이센이 프로이센다움을 잃지 않고 프로이센이 큰 양보를 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만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1850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맺어진 '올뮈츠 협약'은 프로이센이 연합(통일)을 포기하며 국경지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항목을 담고 있어 연방 국가로의 통일을 원하는 국민들과 정치인들로부터 빈축을 샀고 왕과 보수파가 곤란에 처했는데 비스마르는 같은 해 12월에 열린 의회에서 '전쟁이란 애궂은 프로이센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모는 중차대한 일로써 정치인들의 가벼운 말로 시작될 수 없음'을 강조한 명연설로 왕과 보수파를 위기에서 구해내 큰 주목을 받는다. 덕분에 이듬해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외교관 직에 (외교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비스마르크가 임명된다. 


1851년부터 1862년까지프랑크프루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11년을 보낸 비스마르크는 각국의 상황과 이해관계 그리고 주요 인물과 그들의 속내를 냉철히 분석해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크림전쟁(1853년)은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간의 분쟁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변모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참전을 독려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중립을 주장했고 종전 때까지 참전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입장에서 크림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실익이 없을 뿐더러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높이는 것이기에 피한 것이다.

1857년 황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왕세자에게 왕관이 돌아가면서 비스마르크의 입지에 변화가 생겻다. 황후가 된 아우구스타가 비스마르크를 꺼려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임지를 옮겨야 했다. 사실상 좌천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리고 이어진 파리에서의 근무는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위정자들과 내정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1862년 프로이센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왕과 보수당의 정책이 위기에 몰렸다. 왕 빌헬름 1세는 군대개혁을 필두로 한 자신의 정책을 유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를 전격적으로 수상과 외무 장관에 임명한다.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한 의회와 내각의 대립을 중재하고자 노력했고 왕과 내각의 의견을 자유주의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해명하고자 했다. 결과는 의회의 반대로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적어도 과거 비스마르크에게 각인돼 있던 극단적 보수주의자라는 오명은 벗게 됐다. 대외적으로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막는데 치중했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연방 내 입지를 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단기 목표는 독일 연방을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권리를 갖고 통치하는 것이었고 장기 목표는 프로이센이 주축이 된 독일 연방의 구성이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주도권 경쟁은 필연적으로 양측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협상으로 다다를 수 있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없음이 확실해지자 1866년 독오전쟁(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이 발발한다. 해를 넘기지 않고 짧게 진행된 독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완승함으로써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시켰으며 비스마르크가 염두에 뒀던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연방 구성을 얻을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발빠르게 움직여 독일 연방을 구성하고 연방 헌법을 입안하였다. 이렇게 대두된 연방에서 비스마르크는 첫 번째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독일 연방은 북부 독일에 한정된 불완전한 통일이었기에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독일 연방의 수뇌부들은 온전한 독일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의 내실을 다지고 온전한 독일 통일을 위한 발판을 다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남부 독일을 독일 연방으로 끌어들여 독일의 완전한 통일, 즉 독일 제국 건설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독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부차적 이득을 취하려 했던 프랑스는 예상과 달리 프로이센이 너무 빨리 승리함으로써 쓴 맛을 다셔야 했으며 스페인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새로운 국왕을 선출함에 있어 자신들이 탐탁치 않아하는 인물을 프로이센이 지원하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프랑스는 1870년 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충족시키고 실리를 얻기 위해 프로이센에 선전포고 후 즉각적으로 전쟁에 돌입한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북부와 독일 남부는 프랑스에 대항해 공동전선을 펼쳐 응대했으며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같은 다른 나라들이 전선에 투입될 겨를을 주지 않고 빠른 승전을 거듭해 파리를 함락했다. 독일 연방은 1871년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채결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물어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한다. 대프랑스전의 승리를 계기로 독일의 북부와 남부는 통일에 대한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고 이를 기회로 독일 제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비스마르는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으로 임명된다. 


비스마르크는 이제 제국의 내정과 더불어 국제관계에 힘을 쏟았다. 신생 제국에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주변 강대국들에 트집잡히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외교에 공을 들였는데 특히 독일 연방에 패해 분루를 삼키며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가 다른 강대국들과 연합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적의 공격이 예상되어 미리 선제공격 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독일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억지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쉬워 보일 때 커지며, 전쟁이 어려워 보인다면 사라진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전쟁 은 일어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입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제국 의회의 설립, 통일 화폐의 발행, 제국 은행 설립, 법인과 주식회사 설립의 자유화, 제국 언론법,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을 통해 시민 사회의 출현을 앞당겼고 자본주의, 자유경쟁,계급사회의 재편에 이바지했다. 전후 독일 제국의 경제상황은 호황을 넘어 과열에 이르렀는데 1873년 결국 금융권과 기업이 줄도산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당시 금융권과 주식회사에 관여하는 유대인이 많아 독일인의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호황이 갑작스레 끝나자 제국의 경기는 장기둔화에 빠질 기미를 보였고 비스마르크는 직접 경제사안들을 챙기며 상업과 조세 정책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나갔는데 특히 보호관세의 도입으로 국내 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했다.

소위 문화투쟁이라 불리우는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갈등도 비스마르크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가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국가 전반에서 교회의 권력을 유지/확장하고자 했고 독일 제국에서는 이를 표방하는 정당까지 등장해 상당한 인기를 얻고 수십 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가톨릭 사회로의 역행도, 신생 제국의 분열도 원치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세력과 가톨릭 정당이 지나치게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견제했다. 1878년 문화투쟁의 상징이던 교황 비오 9세가 타개했고 그 뒤를 이은 레오 13세가 교권의 완고한 주장이 아닌 타협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문화투쟁이 사그라질 때까지 비스마르크는 교회에 대한 압박을 가했으며 이후 점차적으로 완화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1880년대에 이미 산업재해보험,  의료보험제도, 연금제도, 그리고 상해보험 등을 도입함으로써 국민의 복지향상을 꾀했다.

외교는 비스마르크가 공직에 몸을 담은 이후로 시종일관 공을 들인 분야이다. 불가피하게 오스트리아와 그리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긴했지만 그의 방침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880년대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이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전쟁의 발발을 무마한 그의 외교력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의 신념은 그가 1888년 제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언급한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신 외에 세상에서 두려운 것은 없다."는 광오한 자심감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평화의 유지가 최고의 승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1888년 프로이센에서 제국까지 오랜기간 독일을 통치한 빌헬름 1세가 91세로 서거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는 병약한 몸으로 몇 개월을 카이저(황제) 자리에 앉아있다 사망했고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되었다. 빌헬름 2세는 재능은 있으나 인내가 없고 자신이 주목받는 정국을 원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는 양립하기 힘들었다. 또한 빌헬름 2세의 곁에 있는 조언자들은 대부분 비스마르크의 정적인지라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많은 사안들에 대해 의견이 충돌했고 결국 1890년 비스마르크는 타의에 의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독일 제국의 창설자로서 찬란한 조명 아래 퇴장해야 했을 비스마르크의 퇴임은 초라하고 급하게 처리되었다. 20여 년 동안 프로이센을 위해, 독일 제국을 위해 동분서주한 위대한 인물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비스마르크>를 통해 살펴본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이라는 이미지에 담긴 '철(iron)'과 '혈(blood)'처럼 강경일색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언변을 바탕으로 한 위기관리 능력이 출중했고 좋은 기회를 포착하는 재능도 뛰어났다. 전략적 목표를 염두에두고 유연한 대응으로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국내와 국제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주 등장하는 무력에 기대기 보다 가능한 한 협상과 외교로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이 목표지향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며 특히 그가 남긴 몇몇 어록은 '참 말을 저렇게도 잘하는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가 세운 목표를 완수하고자 압박을 가하거나 당근을 주거나 또은 애둘러 돌아가는 모습에서 비스마르크가 지닌 상황판단 능력과 기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추진했던 수많은 정책들은 받아들여져 독일 제국에 흡수된 것도 많지만 의회와 왕가의 반대로 무산된 것 또한 그만큼 많음을 알게 됐다. 몇몇 책에서 비스마르크가 독재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의 활동 가운데 일부에 편향된 판단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스마르크의 삶에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근대화를 보게 되고 그의 업적을 상기해보면 그가 남긴 흔적(유연한 외교, 산업육성, 사회보장제도, 노동과의 권익 수호 등)이 현대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비롯해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많은 독자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인류가 지나온 길을 대략적으로라도 추적하고픈 욕심을 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 어디인지까지 거슬러 오르지 않더라도 대략 3천 년(기원전 1천 년부터) 정도의 세월을 거치며 인간이 행하고 이룩한 굵직굵직한 발자취들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인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반복되는 역사의 오점들을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지성들이 언급했다시피 우리가 읽는 역사는 승자 중심의 기록이며 권력자와 역사가의 입김이 가미된 가공품이다. 축적된 기록이 방대할수록 여기서 파생되는 저작 또한 증대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서양을 대표하는 로마사와 동양을 대표하는 중국사가 가장 많이 연구되고 다양한 저작이 쏟아져 나오는 듯 보인다. 반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세계사의 변방으로 취급되고 자주 언급되는 순간조차 로마사와 중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로 한정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중앙아시아사>에서 언급되는 중앙아시아는 몽골 초원과 만주에서부터 볼가강에 이른는 지역이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만나 교차하는 가교 역활을 수행했고 로마, 페르시아, 그리고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지역이다. 그럼에도 내 독서와 공부의 부족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역사에 관한 개괄적 이해가 크게 부족했는데  <중앙아시아사>라는 책을 접하며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 것을 좋은 기회이자 행운이라 생각한다. 


<중앙아시아사>는 총 9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목민의 기원에서부터 현재  중앙아시아의 상황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를 축약해 다루고 있다.


유목민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 간 의견이 분분하고 그 시기 또한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략 기원전 4000년경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상당수의 유목민이 활동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목민은 주로 씨족이나 부족단위로 구성되어 말과 양 같은 가축을 거느리고 계절과 환경에 따라 이동했다. 본래 식용으로 사육되던 말이 이동수단과 전투수단으로 발전하면서 유목민의 기마술은 크게 발전했다. 한정된 초지를 두고 유목민 집단 사이의 갈등에서 밀리거나 유목생활을 더이상 영위할 수 없는 부족은 오아시스 주변 등에 발전한 도시에 정주하게 됐다. 유목민과 정주민은 교역을 통해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도 했지만 서로를 침략하는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이들 유목민과 정주민 사이의 영향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뛰어난 기마술을 갖춘 유능한 전사집단이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키루스와 그의 후손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중앙아시아의 서부 지역을 복속시키기도 했지만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기원전 3세기에 몽골에서 출현한 흉노는 주변의 유목민들을 병합하거나 몰아내고 중국제국과 대치했다. 흉노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한 유목민족은 이후 유라시아의 전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흉노는 지속적인 정복활동을 통해 지배영역을 넓혀 나갔지만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이르자 강력한 중앙 행정체제가 부재한 느슨한 부족연맹 형태로 존속하던 흉노 제국은 한제국과의 끊임없는 분쟁과 내부분열로 세력이 약화되고 분열되었다. 결과적으로 흉노의 흥망은 몽골과 중국 변경 지역의 유목민들을 서쪽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흉노에서 파생됐다 여겨지는 훈족이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기존의 서방 유목민족인 고트족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했고 5세기 서로마제국의 멸망에 기여한다(저자 피터 B 골든은 훈족이 여느 저서에 쓰인 것과 달리 그리 흉폭하지도 않았고 로마제국의 쇠망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한제국과 흉노의 쇠망 후 흉노가 지배하던 지역에 북위, 유연, 헤프탈이 등장해 세를 과시했으나 6세기 중엽 등장한 돌궐(Turk, 투르크)에 의해 패망한다. 돌궐은 만주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으며 최초로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유라시아 횡단국가를 건설했다. 돌궐 제국이 팽창해 유럽에 가까워지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며 이 세 제국은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하였다. 돌궐 제국이 장악한 광대한 영토는 수많은 부족 집단의 연맹체제로 유지됐는데 부족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공물과 전리품이 필요했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었다. 돌궐 제국의 성근 부족연맹은 내분이 심했고 7세기 당나라의 부상으로 돌궐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자 돌궐 제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7세기 말 돌궐 제2제국이 힘을 얻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8세기 중엽 위구르인에 의해 패망하였다. 위구르 제국은 약 1세기 가량(7세기 중엽에서 9세기 중엽까지) 돌궐의 영역을 통치하며 쇠약해진 당나라를 수탈했는데 9세기 중엽 키르키즈인에 의해 멸망했다. 


7세기 무함마드가 전파한 이슬람교는 급격히 세를 확산해 중동을 넘어 중앙아시아로까지 전파되었는데 9세기에 등장한 사만 왕조는 페르시아의 학문과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서돌궐이 장악하던 지역까지 지배력을 획득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이슬람교가 널리 성행하며 중앙아시아는 투르크계와 이란계(페르시아계)가 뒤섞여 다양한 문화를 창출해 냈다. 


돌궐의 영역이였던 지역은 몽골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다양한 세력(국가)이 등장하고 사라졌는데 사만 왕조가 몰락하자 셀주크 제국이 뒤를 이었고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이 멸망하자 화라즘이 융성했다. 화라즘과 같은 시기 중앙아시아의 중부는 거란 족의 유민들이 세운 카라 키타이가 장악하고 있었고 보다 동쪽의 만주와 몽골 지역은 금나라가 위치했다.


11세기 몽골은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 느슨한 부족 연맹으로 구성된 유목민 집단이었다. 칭기스 칸(테무진)은 1160년대에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징기스 칸이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해 용맹한 전사로 성장한 칭기스 칸의 주변으로 그를 따르는 젊은 용사들이 모였고 징기스 칸은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묶고 씨족 부족 사회의 전통을 없애고 자신에게 복종할 군대를 양성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3세기에 이르자 몽골의 세력은 거대해졌고 칭기스 칸은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해 동쪽으로 고려에서 서쪽의 화라즘까지 진출하였다. 1227년 칭기스 칸이 죽은 후에도 그의 뒤를 이은 칭기스 칸의 아들들은 정복전쟁을 지속해 유럽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서아시아로는 시리아에 이르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중국까지 평정하며 원나라를 세웠다. 


몽골 제국의 팽창은 인재와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으며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꾸준하게 이어진 후계자들의 권력 다툼과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 간의 반목으로 인해 전성기의 힘을 잃고 쇠퇴해 여러개의 국가로 쪼개진다. 화약의 발달은 활과 화살에 의존하는 유목민들의 위상을 끌어 내렸다. 신무기(총)를 도입하려고 시도한 유목인들에게는 그런 류의 무기를 제조할 역량이 부족했고 구매할 여력도 없어 군비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16세기 러시아 제국이 등장해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하고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자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서쪽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됐고 17세기 만주족이 중국에 청 제국을 세워 세를 키워나감에 따라 동쪽으로부터의 압박도 받게 되었다. 쇠퇴했거나 분열돼 있던 중앙 아시아의 국가(부족)은 두 제국의 확장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제국과 청 제국이 각각 서와 동에서 팽창해 서로 조우하게 되는데 제국의 국경은 네르친스크조약(1689)과 캬흐타조약(1727)으로 확정된다.


19세기에 들어 청 제국이 내부적 혼란과 실정으로 힘을 잃어간 반면, 러시아 제국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는 카자흐, 키르기즈, 투르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을 침공해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엄청난 영토를 속국으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고 그 여파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1917년 두 차례의 혁명을 거쳐 공산당이 집권하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관활하던 수많은 속국(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1991년 해체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던 중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중앙아시아사>는 3천 년 이상의 중앙아시아 역사를 3백 페이지 가량의 한정된 공간에 축약하고 있고, 어족에 따른 분류나 명칭이 익숙치 않아 기본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가 어떤 과정으로 성장하고 변모하였는가의 골자를 접하게 된 점은 '중앙아시아사' 자체 뿐 아니라 이후 세계사를 읽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유럽의 역사(로마사 등)와 중국사를 이해하는 데 중앙아시아사가 필요하듯 중앙아시아사를 이해하는 데 주변 지역의 역사의 이해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중앙아시아사>를 읽으며 단절된 역사의 연결고리를 발견한 듯 했고 그동안 여러 역사서를 접하면서도 뭔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유럽과 동아시의 역사가 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흘러왔음을 살피게 되었다. 


PS) 글을 읽고 아주 간략하게 리뷰를 작성하는 것조차 버거울정도로 광대한 역사적 사실이 산재해 있는 곳이 중앙아시아라는 점을 알았다. 책의 후반부에 나열된 수많은 참고문헌과 색인으로 이 300페이지 분량에 책에 얼마나 많은 연구가 담겨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고 <중앙아시아사>를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던 이번 기회가 나중에 세계사를 읽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고대~근대 편 - 마라톤전투에서 마피아의 전성시대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수명은 일백 년이 안되지만 인간이 쌓아온 업적의 기록은 적어도 수천 년이다. 그 가운데 어떤 인물이 행한, 또는 행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역사가 바뀌게 된다.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는 중요한 순간에 잘못된 선택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에서 우행이 낳은 웃지못할 순간의 기록을 101가지로 추려 소개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고대~근대 편>은 기원전 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발생한 50가지 에피소드를를 다룬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특정 시기 특정 인물의 선택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왕이 외세의 침략에 대응해야 하는 순간에 그릇된 판단이나 착오로 하지 말아야 할 공격을 감행한다든지 공격해야 할 공격을 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와 본인의 흥망이 결정되는 찰나를 그려낸다. 역사에 가정이 의미있는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는 매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선택의 순간에 내린 결정이 반대로 이뤄졌더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붙인다. 왕과 장군처럼 중요한 인물의 행동이 부른 결과가 후대의 역사를 결정지었듯 만약 그들이 반대되는 행동을 취했을 때 발생할 나비효과로 세계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저자들은 로마제국이 고트족을 홀대하지 않았더라면, 아즈텍이 코르테스를 공격했더라면, 영국의 헨리 8세의 이혼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승락했더라면, 프랑스와 7년 전쟁을 마친 영국이 미국에 좀 더 관대했더라면, 독일군이 오지도 않을 러시아 군을 기다리며 허송세월하지 않았더라면 등 이미 발생한 중요한 선택(오판)이 부른 패착을 알림과 더불어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상황을 기반으로 이어졌을 법한 역사를 추측한다.


제목에 쓰인 '흑역사'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 책에 소개된 에피소드는 모두 부정적 상황으로 이어진 것들이다. '옳음은 강자의 이익에 복무한다.'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는 역사의 격언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면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에 소개된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내린 결정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한 아쉬움을 저자들은 해당 주인공들이 반대의 선택을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긍정적 요인을 추적해 보는 재미를 통해 해소하는 것 같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역사적 사건을 알아가는 동시에 반대적 상황이 불러올법한 역사의 변화를 읽으며 다양한 관점을 경험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기에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세계사를 시대순으로 찬찬히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지만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주요 사건을 단편적으로 접하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현재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지구라는 공간은 방대하고 인구도 엄청난데 선조들이 남긴 발자취를 모두 좇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굵직굵직한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한다. 게다가 강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은 흥미를 유발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장점이 있으므로 짜투리 지식을 쌓기에도 요긴하다.


근현대 세계사가 서양을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에 수록된 에피소드는 서양인과 서양에서 발생한 사건이 주를 이룬다. 후에 아시아 역사의 줄기를 바꾼 괄목할만한 사건과 인물을 다룬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과 비슷한 부류의 책이 발간되길 바래본다. 마지막으로 몇 개 안되는 비서양 에피소드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것이 있어 짧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흑역사 017,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린 히데요시의 패착'은 일본의 최고권력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국의 분란을 해소하고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하기 위해 해외원정을 결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가까운 조선을 침략해 단기간에 압록강변에 이르는 엄청난 성과를 내지만 이순신 장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보급로가 끊겨 곤란에 빠진다. 애초 목표로 삼았던 중국까지의 진출은 요원해지는 상황에 처한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 협상을 하지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무산된다.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 때도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은 패퇴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건강이 악화되면 이듬해 사망한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후 쇄국정책을 펼쳐 일본의 개방은 3백 년 이후로 미뤄진다. 저자는 만약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이라는 전략을 택하지 않고 국내의 입지를 다지며 개방정책을 펼쳤더라면 일본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고 일본이 동북아의 패자의 지위를 꿰찼을 수 도 있었을 것으로 전망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적 사료에 리비우스 자신의 문장력을 가미해 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146년까지 3차례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운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도시 국가로 출발해 주변국을 병합하며 세력을 키우던 로마가 3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로마의 세력권을 크게 넓혔다는 점에 있다. 포에니 전쟁이 있기 전에도 로마는 상당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주로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된 수준으로 시칠리아나 스페인 그리고 갈리아 일부 도시와 동맹을 맺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쥔다. 특히 농업과 상업이 번창한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는 이어지는 로마의 원정(갈리아, 트라키아,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지원하는 창고가 된다.


3차례의 포에니 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전개를 보인 것은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등장, 그의 앞을 막아서는 많은 로마의 인재들, 한니발에게 결정타를 날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그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들의 피와 땀으로 장식돼 있다. 세계사에서 2차 포에니 전쟁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여러가지 이유와 특색은 로마의 부흥기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던는 점 외에도 한니발의 가족사(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이끌었으며 로마에 패해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고 죽는 날까지도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잊지 않았다), 당시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한다는 무모한 전략을 실현한 최초의 전쟁, 기병의 유용성을 돋보이게 한 전쟁, 로마의 본토에서 장기간 이어진 전쟁, 그리고 로마인의 정신과 기상이 돋보이는 전쟁이라는 것들이 한데 모여 2차 포에니 전쟁을 역사적으로도 극적으로도 돋보이게 만든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어린 한니발이 아버지 하밀카르를 따라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굴욕적인 조약을 수락해야 했던 하밀카르는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나 이를 완수하지 못하고 생을 다한다. 아버지부터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주입받았던 한니발은 성년이 되고, 군대를 통솔하는 역량을 키우고, 이베리아 반도 내의 전쟁에서 연이은 승리를 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때가 됐다고 생각한 그는 기원전 219년 로마의 동맹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한다. 거센 저항에 부딪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됐지만 결국 사군툼을 정복했다. 한니발이 사군툼을 공격했다는 보고를 받은 로마는 사절단을 파견해 한니발과 카르타고 측에 항의했으나 한니발과 카르타고 정부는 1차 포에니 전쟁 후 맺었던 조약 위반을 시인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로마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사절단으로부터 카르타고의 뜻을 전해들은 로마는 곧바로 전쟁준비에 착수한다.


로마의 대응이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아는 한니발은 카르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 누미디아족 등으로 구성된 병력을 꾸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대원정을 준비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의 영토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향한다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한니발의 게획은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고 다닌 용맹한 병사들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쟁의 승리와 영광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을 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해 결국 기나긴 원정길에 오른다. 한니발의 행보를 보고 받은 로마는 2명의 집정관(코르넬리우스와 셈프로니우스)에게 군단을 맡기고 한니발을 저지하라 명한다.


한니발은 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싸움을 수행하며 알프스를 향해 나갔고 로마 정규군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연안이 아닌 내륙으로 진군해 알프스에 이르렀다. 수많은 병사와 수레, 그리고 코끼리까지,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니발은 강행하고 성공한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토에 도착해 포 강 유역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때 로마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또한 포 강 근처에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 상대의 전영을 정찰하기 위해 기병대와 함께 나왔던 한니발은 우연히도 같은 목적으로 나온 코르넬리우스와 마주치게 되어 전투가 발생한다. 기병대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니발이 승리했고 코르넬리우스는 부상당해 간신히 전장을 탈출한다. 이 때 코르넬리우스를 구출한 자가 그의 아들이었다. 스피키오.


회전은 아니였지만 첫 교전에서 참패한 로마군은 진영을 뒤로 물리고 셈프로니우스의 합류를 기다린다. 셈프로니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합류해 한니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작은 교전에서 승리한 후 자만심에 들떠 성급히 공격에 나서고 결과는 참패로 이어졌다. 두 명의 집정관의 연달은 패배로 로마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217년이 되자 새로운 집정관으로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가 선출되었다. 갈리아에서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플라미니우스는 곧장 전장으로 이동해 한니발 군과 조우한다. 트라시메네 호수 근처에서 벌어진 양 군의 충돌은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으며 특히 로마군에 치명타를 입혔다. 집정관이자 군단의 총사령관인 플라미니우스의 전사는 로마군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플라미니우스의 위기를 전해 듣고 출정한 세르빌리우스의 기병대마저 참패하면서 로마의 근심은 깊어졌다.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해 로마의 방위를 강화하고 국난에 대응하고자 했다. 파비우스의 전략은 대규모 교전을 피하고 지연 전술을 이용해 시간을 벌어 병력을 충원하고 타국에서 전쟁 중인 상대방의 보급을 차단함으로써 승리를 거두거나 적군을 물러가게 만들고자 했다. 그의 전술은 냉철한 판단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내 효과를 발휘해 한니발을 조급하게 하고 곤궁하게 만들었지만 파비우스의 전술의 진가를 모르는 젊은 장교 및 로마 시민들은 파비우스를 비겁하다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파비우스는 자신의 전략을 고수한 덕분에 로마군의 피해를 줄이고 지원군을 늘려 군단의 규모를 키웠다. 반면 한니발의 세력은 처음 피레네 산맥을 넘어설 때의 1/3 이하로 줄어 있는데다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늘 불안한 실정이었다.


파비우스가 독재관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뒤 기원전 216년 임명된 두 명의 집정관은 파울루스와 바로였다. 그 중 바로는 시민들의 인기에 영합하여 집정관의 위치를 꿰찬 자로 전면전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귀족들이 한니발을 막을 수 있음에도 공연히 전쟁을 지연시키는 중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 군을 지휘하게 되면 쉽게 한니발을 제압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파울루스와 교대로 군단을 통솔하게 된 바로는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한니발이 전장으로 삼은 칸나이에서 카르타고 군을 섬멸하고자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결과는 로마군의 굴욕적인 참패로 이어졌다. 당시 군단의 사정이 갈수록 나아지는 로마군과 달리 줄고 있는 병사를 충원할 대책이 없고 식량을 비롯한 각종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던 카르타고 군은 얼마간의 시간만 지나면 군사들의 자발절 탈영이나 배신으로 자멸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는데 바로가 정면에서 맞대응 해준 것은 한니발 입장에서 너무 감사할 일이었다.


칸나이 회전에서의 대패는 궁지에 몰렸던 카르타고 군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준 반면 로마는 현직 집정관인 파울루스와 여러 전직 집정관과 법무관 등의 고위 관료가 전사했고 5만이 넘는 군사를 잃어 치명타를 입게 됐다. 로마의 입장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 할만한 점은 한니발이 칸나이 회전에서 대승한 기세를 몰아 바로 로마로 진격했더라면 준비가 안된 로마마저 점령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한니발은 노고에 지친 병사를 쉬게 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로마에게 다시 일어설 시간을 주었다.


칸나이의 대패를 전해들은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이제 더 이상 군단도 없고 지휘관도 없으며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압박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져 그곳으로 함대를 파견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로마의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로마는 패배와 현재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책을 논의했다. 도시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지휘관과 군단을 다시 모집하였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때 모인 군단에는 미성년자와 노예 그리고 사형수까지 포함돼 있었다는 점은 로마의 절박한 상황을 말해준다.


로마의 대패로 이탈리아 반도 중남부의 몇몇 지역이 로마와의 동맹 관계에서 이탈해 카르타고에 붙었다. 한니발은 로마로 진격하는 대신 캄파니아 지방을 온전히 정복하여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카푸아를 제외한 캄파니아의 많은 도시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충실히 이행했고 한니발에게 항복하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 수성에 전념했다. 한니발은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회유로 그들을 달래봤지만 대부분 허사로 끝났다. 결국 카르타고 군은 겨울이 오자 공성전을 다음해로 미루고 카푸아로 들어갔다. 카푸아에서 보낸 겨울은 카르타고 군에게 독이 되었는데 거친 환경에서 끊임없이 싸워오던 전사들에게 도시가 주는 향락은 전사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고 나태하게 만들었다. 카푸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강철같던 정신과 육체는 사라지고 같은 군대라고는 믿기 힘든 방종한 군대로 변모했다.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을 때, 이 도시들을 로마와의 동맹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카르타고의 노력과 동맹을 수호하고자 하는 로마의 노력이 부딪혀 이탈리아 중남부는 흡사 내전이 일어난 것처럼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이탈리아 본토가 한니발과 로마군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시기 스페인, 샤르데나, 시칠리아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한니발이 다져놓았던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권은 로마의 스키피오 형제에 의해 와해되었고 샤르데나 또한 로마에 반기를 든 움직임이 제압되어 로마가 우세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로마를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줬던 시라쿠사의 히에로가 기원전 215년 사망하고 그의 손자 히에로니무스가 권력을 잡자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손을 잡았다. 여기에 더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도 참전의사를 밝힘으로써 로마가 감당해내야 하는 전선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이탈리아 본토는 물론이고 스페인, 아프리카 북부, 그리스 서부, 시칠리아 등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배권이 작동하는 많은 나라에서 전투가 지속되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공방이 펼쳐졌는데 한니발은 대부분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 밖의 지역은 엎치락뒤치락하거나 로마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한니발이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 할지라도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지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시칠리아와 스페인에서 승기를 잡아야 했다. 기원전 215년 히에로니무스가 암살되자 카르타고 지지세력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고 이를 카르타고가 지원하면서 히에로 왕의 통치동안 로마와 굳건한 동맹을 유지했던 시라쿠사는 혼란에 빠졌다. 로마군에 의해 폭동은 진화되었으나 일시적인 평화였고 카르타고군은 시칠리아 곳곳으로 장소를 옮기며 로마와 싸웠다.


기원전 212년 스페인에서는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스키피오 형제를 제압함으로써 스페인에서의 카르타고의 지배력을 높였다. 기원전 211년 푸불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티키누스 전투에서 부상당했고 스페인에서 전사한 스키피오의 아들)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스페인의 사령관으로 지원한다. 스키피오는 수년에 걸쳐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도시들을 점령하고 여기에 더해 아프리카까지 진출한다. 기원전 206년 카르타고에 기마병을 제공해 주던 누미디아와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지는 로마의 충실한 아군을 획득한다.


기원전 207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한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약중이던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군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 보낸 전령이 로마군에 포획됨으로써 그의 계획이 들통났고 이를 이용해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의 부대를 향해 진격하자 하스드루발은 퇴각하고자 했지만 길을 잃고 시간을 허비하느라 시기를 놓쳤고 결국 하스드루발은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일전을 감행했다. 결과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하스드루발은 그의 아비 하밀카르의 위명과 그의 형 한니발의 용맹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싸웠고 승기가 기운 상태에서 로마군의 한가운데로 돌진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한니발에게 하스드루발의 죽음은 일개 장수의 죽음 이상의 충격이었다. 카르타고 측에 합류한 이탈리아 도시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원은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한계가 있고 그들이 언제 변심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데다 로마측에 충성하는 도시들 또한 건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선전하고 승리한다 할지라도 결국 그의 자원은 로마군에 비해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약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이용한 자는 스키피오였다.


스페인을 평정한 스키피오가 이탈리아 남부와 아프리카 북부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며 압박을 넣자 위기를 느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소환했다. 기원전 203년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카르타고로 귀환한 한니발은 스키피오라는 젊은 용장과 마주할 운명에 놓인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에서 벌였던 티키누스 전투와 칸나이 전투에서 죽을 위기를 넘긴 인물이고 한니발과의 전투를 통해 전략과 전술을 배웠기 때문에 어찌보면 한니발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강화가 실패하자 기원전 202년 자마에서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대군이 격돌한다. 로마군은 연이은 승리로 기세가 높고 훈련이 잘돼 있었던 반면 한니발의 군대는 급조된 용병 위주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이미 승기는 로마로 기운데다 한니발의 전술 전략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스키피오였기 때문에 전투의 변수도 크게 작용하기 힘들었다. 한니발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승리는 로마에게 돌아갔고 자마회전을 통해 길었던 2차 포에니 전쟁도 막을 내린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부터 결말까지를 다룬다. 주목할만한 점은 리비우스가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객관적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마치 대하드라마를 써내려가듯 문장을 썼다는 점이다(이런 감흥을 느끼게 한 것은 역자인 이종인의 공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리비우스 로마사 3>을 읽는 내내 역사서의 딱딱함보다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로마사에 관심이 많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몸젠의 <몸젠의 로마사> 등을 읽고 있지만 <리비우스 로마사>가 주는 흥미와 재미는 이들 이상이라 여겨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기를 다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역사적 사실과 소설을 혼합해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면 <리비우스 로마사 3>은 역사설 사실만으로 이런 재미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승리로 이끈 다양한 요인이 있고 그것은 역사가나 독자의 주관에 따라 달리질 부분이다. 내가 생각하는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은 3가지이다. 첫 번째는 로마인의 정신이다.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로마는 분명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로마인들의 애국심은 국난 극복이라는 공통 과제에 임해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는 단결력을 보여줬다. 국가를 위해 기꺼이 복무했고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전쟁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사유재산을 꺼내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 전투에 돌입하면 집정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투혼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고 설령 패배했다 하더라도 금새 털어내고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이것은 후기 로마가 쇠망의 길을 걷을 때 보였던 행보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라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로마가 만들어 놓았던 동맹체계의 견고함이다. 로마의 중심인 라틴연맹 뿐 아니라 많은 도시 국가들이 로마가 가장 불리할 때 조차 로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로마는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배신했던 도시조차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 제국으로서의 풍모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적기를 놓친 한니발의 실책과 카르타고의 분열된 모습이다. 1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진행된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어떤 형태로든 의견을 모으고 공통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의 형태를 조화롭게 갖춘 체계라고 호평하기도 하는 로마의 체제는 실패하는 경우조차 단결된 모습으로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한니발이 맹활약하던 시기에도 불규칙한 지원으로 한니발의 원정을 뒷받침하지 못했으며 결정된 지원도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에 가정처럼 우스운 게 없다고 하지만 만약 한니발이 칸나이 회전을 마친 직후 로마로 진격했더라면, 초반 3년 가량 로마가 패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해 카르타고로부터의 지원이 확실히 이루어졌더라면, 하스드루발의 전령이 한니발을 만났더라면 등 한니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쉬운 대목이 참 많기도 하다.


많지는 않지만 <리비우스 로마사 3>을 비롯해 현재까지 로마사를 읽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로마사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로마가 장악한 영역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광대한 지도가 요구되는데, 인터넷 창을 열고 독서하면 편하긴 하지만 늘 그런 환경에서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몇개의 로마시대 지도를 프린트해서 보는 게 편할 때가 많다. <리비우스 로마사 3>에도 맨 뒷편에 이탈리아 지도 3장이 삽입돼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고 별도의 지도를 같이 보는 게 유용하다. 그리고 로마사를 읽다보면 생소한 인명과 지명에 많은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천 년 로마 제국이 유구한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인명은 이름, 가문이름, 부친의 성이 같이 나열되기 때문에 길고 낯설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사가 진행될수록 몇몇 가문이 주로 회자되어 더 헷갈리므로 이름과 성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로마사는 언제 읽어도 재미를 준다. 인류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로마,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남은 로마, 그리고 그 제국을 거쳐간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역사적 지식과 함께 교훈을 남긴다. 많은 로마사를 다룬 저작들이 참고하는 <리비우스 로마사>를 늦게라도 읽을 수 있었음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