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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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란 이름은 근대 유럽사를 접할 때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그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국을 건설했고 내치와 외교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독일이 강대국으로 발돋음하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접했던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의 생애가 걸은 길을 동행하여 근대 유럽사를 들여다 보고 싶어 <지금, 비스마르크>를 읽게 됐다. <지금,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의 전기라 할 수 있는 책으로 비스마르크의 생애 전반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그가 정치에 입문하고 외교적 역량을 펼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1815년 명문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영어, 프랑스어, 펜싱, 승마, 수영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청년 시절은 모범생이라기 보다 방탕한 일탈을 즐기며 보냈으며 법대를 졸업 후 여러 지역에서 공직에 종사했지만 단순무료하고 수직적 일처리에 싫증을 느끼고 사퇴와 재임을 반복하다 184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유산으로 물려받은 쇤하우젠 영지에서 수리조합장 직을 얻어 낸다. 수리조합장은 엘베강의 범람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독립적인 공직이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47년 32세의 비스마르크는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해 평생의 반려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고 통합의회의 의원자격을 획득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뛰어든다.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프로이센의 주도적 위치를 구축하려는 비스마르크의 노력은 비스마르크가 가진 냉철함과 외교적 수완의 비상함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의회에서 보수적 입장에서 정국과 정책을 변론하거나 비판한 비스마르크의 달변은 보수의원들 뿐 아니라 정적들에게조차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1848년 발생한 '3월 혁명'으로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된다. 왕정 타도를 기치로 발생한 3월 혁명에 의해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소위 보수파는 잠시 수세에 몰렸는데 비스마르크는 특유의 언변(문체)을 이용해 언론을 이용해 상대 정치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왕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수파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당시 독일은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왕국들이 느슨하게 엮여 있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의 수뇌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보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조차 보수인 비스마르크는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염원하던 통일이란 프로이센이 프로이센다움을 잃지 않고 프로이센이 큰 양보를 하지 않는 범주 내에서만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1850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맺어진 '올뮈츠 협약'은 프로이센이 연합(통일)을 포기하며 국경지대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항목을 담고 있어 연방 국가로의 통일을 원하는 국민들과 정치인들로부터 빈축을 샀고 왕과 보수파가 곤란에 처했는데 비스마르는 같은 해 12월에 열린 의회에서 '전쟁이란 애궂은 프로이센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모는 중차대한 일로써 정치인들의 가벼운 말로 시작될 수 없음'을 강조한 명연설로 왕과 보수파를 위기에서 구해내 큰 주목을 받는다. 덕분에 이듬해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외교관 직에 (외교에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비스마르크가 임명된다. 


1851년부터 1862년까지프랑크프루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에서 프로이센의 사절로 11년을 보낸 비스마르크는 각국의 상황과 이해관계 그리고 주요 인물과 그들의 속내를 냉철히 분석해 독일과 유럽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크림전쟁(1853년)은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 간의 분쟁으로 시작됐지만 이내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가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변모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참전을 독려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중립을 주장했고 종전 때까지 참전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입장에서 크림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실익이 없을 뿐더러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높이는 것이기에 피한 것이다.

1857년 황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며 왕세자에게 왕관이 돌아가면서 비스마르크의 입지에 변화가 생겻다. 황후가 된 아우구스타가 비스마르크를 꺼려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임지를 옮겨야 했다. 사실상 좌천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리고 이어진 파리에서의 근무는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 프랑스의 위정자들과 내정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1862년 프로이센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왕과 보수당의 정책이 위기에 몰렸다. 왕 빌헬름 1세는 군대개혁을 필두로 한 자신의 정책을 유보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했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를 전격적으로 수상과 외무 장관에 임명한다.

수상이 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한 의회와 내각의 대립을 중재하고자 노력했고 왕과 내각의 의견을 자유주의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해명하고자 했다. 결과는 의회의 반대로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적어도 과거 비스마르크에게 각인돼 있던 극단적 보수주의자라는 오명은 벗게 됐다. 대외적으로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에서 오스트리아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막는데 치중했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연방 내 입지를 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프로이센의 단기 목표는 독일 연방을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권리를 갖고 통치하는 것이었고 장기 목표는 프로이센이 주축이 된 독일 연방의 구성이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주도권 경쟁은 필연적으로 양측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협상으로 다다를 수 있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없음이 확실해지자 1866년 독오전쟁(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이 발발한다. 해를 넘기지 않고 짧게 진행된 독오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완승함으로써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시켰으며 비스마르크가 염두에 뒀던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연방 구성을 얻을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발빠르게 움직여 독일 연방을 구성하고 연방 헌법을 입안하였다. 이렇게 대두된 연방에서 비스마르크는 첫 번째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독일 연방은 북부 독일에 한정된 불완전한 통일이었기에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독일 연방의 수뇌부들은 온전한 독일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북독일 연방의 내실을 다지고 온전한 독일 통일을 위한 발판을 다지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남부 독일을 독일 연방으로 끌어들여 독일의 완전한 통일, 즉 독일 제국 건설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독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부차적 이득을 취하려 했던 프랑스는 예상과 달리 프로이센이 너무 빨리 승리함으로써 쓴 맛을 다셔야 했으며 스페인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새로운 국왕을 선출함에 있어 자신들이 탐탁치 않아하는 인물을 프로이센이 지원하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프랑스는 1870년 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충족시키고 실리를 얻기 위해 프로이센에 선전포고 후 즉각적으로 전쟁에 돌입한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북부와 독일 남부는 프랑스에 대항해 공동전선을 펼쳐 응대했으며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같은 다른 나라들이 전선에 투입될 겨를을 주지 않고 빠른 승전을 거듭해 파리를 함락했다. 독일 연방은 1871년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채결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물어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한다. 대프랑스전의 승리를 계기로 독일의 북부와 남부는 통일에 대한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고 이를 기회로 독일 제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비스마르는 독일 제국의 초대 수상으로 임명된다. 


비스마르크는 이제 제국의 내정과 더불어 국제관계에 힘을 쏟았다. 신생 제국에 위태하고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주변 강대국들에 트집잡히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외교에 공을 들였는데 특히 독일 연방에 패해 분루를 삼키며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프랑스가 다른 강대국들과 연합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는 예방전쟁(적의 공격이 예상되어 미리 선제공격 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독일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억지력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쉬워 보일 때 커지며, 전쟁이 어려워 보인다면 사라진다. 우리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전쟁 은 일어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입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제국 의회의 설립, 통일 화폐의 발행, 제국 은행 설립, 법인과 주식회사 설립의 자유화, 제국 언론법,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을 통해 시민 사회의 출현을 앞당겼고 자본주의, 자유경쟁,계급사회의 재편에 이바지했다. 전후 독일 제국의 경제상황은 호황을 넘어 과열에 이르렀는데 1873년 결국 금융권과 기업이 줄도산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당시 금융권과 주식회사에 관여하는 유대인이 많아 독일인의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호황이 갑작스레 끝나자 제국의 경기는 장기둔화에 빠질 기미를 보였고 비스마르크는 직접 경제사안들을 챙기며 상업과 조세 정책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나갔는데 특히 보호관세의 도입으로 국내 산업과 노동자를 보호하고자 했다.

소위 문화투쟁이라 불리우는 개신교와 가톨릭교의 갈등도 비스마르크의 골머리를 아프게 했다. 가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국가 전반에서 교회의 권력을 유지/확장하고자 했고 독일 제국에서는 이를 표방하는 정당까지 등장해 상당한 인기를 얻고 수십 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가톨릭 사회로의 역행도, 신생 제국의 분열도 원치 않았던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세력과 가톨릭 정당이 지나치게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견제했다. 1878년 문화투쟁의 상징이던 교황 비오 9세가 타개했고 그 뒤를 이은 레오 13세가 교권의 완고한 주장이 아닌 타협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문화투쟁이 사그라질 때까지 비스마르크는 교회에 대한 압박을 가했으며 이후 점차적으로 완화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1880년대에 이미 산업재해보험,  의료보험제도, 연금제도, 그리고 상해보험 등을 도입함으로써 국민의 복지향상을 꾀했다.

외교는 비스마르크가 공직에 몸을 담은 이후로 시종일관 공을 들인 분야이다. 불가피하게 오스트리아와 그리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긴했지만 그의 방침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1880년대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점이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전쟁의 발발을 무마한 그의 외교력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그의 신념은 그가 1888년 제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언급한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신 외에 세상에서 두려운 것은 없다."는 광오한 자심감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평화의 유지가 최고의 승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1888년 프로이센에서 제국까지 오랜기간 독일을 통치한 빌헬름 1세가 91세로 서거했다. 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는 병약한 몸으로 몇 개월을 카이저(황제) 자리에 앉아있다 사망했고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되었다. 빌헬름 2세는 재능은 있으나 인내가 없고 자신이 주목받는 정국을 원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는 양립하기 힘들었다. 또한 빌헬름 2세의 곁에 있는 조언자들은 대부분 비스마르크의 정적인지라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많은 사안들에 대해 의견이 충돌했고 결국 1890년 비스마르크는 타의에 의해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독일 제국의 창설자로서 찬란한 조명 아래 퇴장해야 했을 비스마르크의 퇴임은 초라하고 급하게 처리되었다. 20여 년 동안 프로이센을 위해, 독일 제국을 위해 동분서주한 위대한 인물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금, 비스마르크>를 통해 살펴본 비스마르크는 '철혈재상'이라는 이미지에 담긴 '철(iron)'과 '혈(blood)'처럼 강경일색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언변을 바탕으로 한 위기관리 능력이 출중했고 좋은 기회를 포착하는 재능도 뛰어났다. 전략적 목표를 염두에두고 유연한 대응으로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국내와 국제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주 등장하는 무력에 기대기 보다 가능한 한 협상과 외교로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했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이 목표지향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을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며 특히 그가 남긴 몇몇 어록은 '참 말을 저렇게도 잘하는구나'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가 세운 목표를 완수하고자 압박을 가하거나 당근을 주거나 또은 애둘러 돌아가는 모습에서 비스마르크가 지닌 상황판단 능력과 기지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추진했던 수많은 정책들은 받아들여져 독일 제국에 흡수된 것도 많지만 의회와 왕가의 반대로 무산된 것 또한 그만큼 많음을 알게 됐다. 몇몇 책에서 비스마르크가 독재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의 활동 가운데 일부에 편향된 판단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스마르크의 삶에서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근대화를 보게 되고 그의 업적을 상기해보면 그가 남긴 흔적(유연한 외교, 산업육성, 사회보장제도, 노동과의 권익 수호 등)이 현대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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