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몇 년 전부터, 어떤 뉴스를 보면서 기어코 속이 상하곤 했었다. 도의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내 생각에는 명확해 보이는데, 다른 얘기들이 나와서였다. 화면 속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잔혹하게 느껴졌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편향된 건지 의심하는 일이 잦았다. 종종 우울했고, 자주 혼자라고 느꼈다. 뉴스 속 사람들은 너무 공격적인 말투로 분노에 차 고함치는 부류와 내 갈길 바쁘니 비키라는 부류 뿐이었다.
큰 흐름이 있는 것 같았고, 그 흐름은 내 기준에서 아주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내 생각은 어디에서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금기였다. 대화 상대를 잘 확인해서 조용히 말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 기뻤다. 마침내 안도했고 고마웠다.
"뒤따라 들어가기 전에 나는 뒤돌아본다. 촛불이 사라진 마루와 부엌의 어둠이 검은 물 속 같다. 촛불의 음영이 번져 있는 방으로 발을 들이자, 난파한 배 아래 공기가 남은 선실로 들어온 것 같다. 밀려들어올 물살을 막듯 나는 어깨로 문을 밀어 닫는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45p
"그들이 살 수도 있었던 쇠털 같은 시간들을 생각했다. 살릴 수 있는 생명들이었고 살릴 수 있는 시간도 충분했는데, 모두 다 무사할 수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그들을 놓쳐 버렸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미카엘라]
"추운 곳에서는 아 씨발 춥다고 웅크리고 더운 곳에서는 씨발 덥다고 웅크린 채로 그런 장소를 이미 일상으로 겪는 삶과 그런 일상으로 내몬 사람들이며 구조를 생각했다." 황정은 <일기> 100p
위 문장에서는 특정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장면 묘사, 심경 고백만 있을 뿐이다. 그런 점이 참 좋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도의 사건이 소재이므로 다른 장면은 들어있지 않다. 분량의 문장도 개인적으로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일 뿐, 작가가 나서서 어떠어떠하다고 설명한 일도 없다.
<쇼코의 미소>에서 몇몇 단편은 정말로 엉엉 울면서 읽었는데, [미카엘라]도 그 중 하나였다. 역시나 뉴스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가족의 모습이 나올 뿐이다. 내 가족에 대한 감정을 타인에게 확장할 뿐이다.
<일기>는 작가의 일기인 만큼 4월의 기억, 매년 4월에 하는 일을 언급한 것은 일부분이다.
사회적 참사. 뉴스에서 오랫동안 다뤄진 이슈, 당위와 부채감과 혐오와 분노, 억울함과 답답함, 무엇보다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진실. 한 사건을 두고 아직도 많은 것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러니 실은 이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일이며, 그런 작품들이 여럿 있고, 각각 의미있는 기록이다. 그럼에도 올해는 유독 문장 몇 개가 떠오른다. 세상이 온통 캄캄할 때, 우연히 만난 반딧불같은 위로들이었다. 슬퍼도, 아니 슬픔을 안고 계속 살아나가라는 토닥임이었다.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미카엘라] 238p
"생은 고통이고 죽음만이 안식일지라도, 생을 향해 걸어나가는 일. 그 걸음을 흉내내자 문득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저 기분이 되살아났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18p
목격한 일에 대해 오래 두고 지켜보았다. 이 일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무엇으로 남겨야 할까.
"동시대인이라는 말의 가장 적합한 정의란 '함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시대를 견디며, 시대를 견디지 못한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 그리하여 어떤 죽음들에 대한 기억을 설명 없이 나누는 사람들. 함께 웃는 사람들이기보다, 함께 웃지 못하는 사람들. 무언가가 좀처럼 웃기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정원<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47p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한강작가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했다. [미카엘라]에서도 내 새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엄마들을 이해한다. 우리가 같이 아파한 일도 사랑에 대한 일이지 않을까. 사랑으로 남도록 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