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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십 트루퍼스 ㅣ 환상문학전집 27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상훈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평점 :

"미스터 SF"라는 별명을 가진 업계의 대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SF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다. 제목은 <스타십 트루퍼스>. 이미 폴 버호벤 감독 연출의 작품으로 만나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리지널 소설의 열혈팬들에게는 그렇게 욕을 먹었다지. 책을 읽어 보니 왜 그런 줄 알겠더라. 소설에서 전체적인 줄거리를 채용하긴 했지만, 소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화라고나 할까. 정말 오래된 영화를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밀리터리 SF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스타십 트루퍼스>가 출간된 해는 자그마치 1959년이다. 59년 전에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정말 놀라웠다. 소설은 잘 나가는 부잣집 아들인 후안 자니 리코가 기동보병(Mobile Infantry)의 일원으로 전투강하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전투씬이 연달아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판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사실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거미들과 싸우는 격렬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전쟁터에 투입된 병사의 윤리 철학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듯 싶다.
미래사회는 2년간의 병력을 마친 이들에게만 완전한 시민권(투표권)을 부여한다. 어째 시작부터 좀 이상하지? 바로 전에 읽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처럼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도 전쟁이 일상화된 상황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자니 리코는 친구 칼을 따라 그야말로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지구 연방군에 자원입대한다. 물론 부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말렸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아들에게 그런 호소가 들릴 리가 없지. 입대 동기 칼이나 미녀 친구 카르멘시타 이바네즈와는 달리 반응 속도와 시력이 양호하다는 장점 밖에는 없는 리코는 우리말로 하자면 땅개, 기동보병으로 배속되어 신병훈련을 치르게 된다.
하인라인 작가는 소설의 절반 가량을 신병훈련소 과정에 할애한다. 혹독한 신병훈련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철부지 소년에서 유능한 전쟁터의 살인병기로 변신해 가는 과정에 저자는 방점을 찍는다. 당시로도 거금인 50만 달러 짜리 병사라니, 게다가 강화복으로 무장한 기동보병이 되는 과정은 전혀 순탄지 않다. 전원 자원입대한 이들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어떤 이유도 받아들여진다. 다만 그들에게는 완전한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만 빼놓는다면 말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권리일지 모르겠지만, 또 누군가에는 정말 소중한 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하인라인은 고대 로마에서 병역을 무사히 마친 퇴역병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 이래, 정말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어디 있었던가. 그렇게 가는 거지.
한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의 노골적인 군국주의 혹은 파시즘에 대한 찬양은 비판의 대상이다.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민주적 시민권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시대적인 국가주의 그리고 군대식 규율을 강조하는 점들을 볼 때 충분히 그럴만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 전투에 투입되는 보병들보다 왜 그렇게 많은 지원 병과와 장교들이 필요하냐는 주장에는 일면 동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전쟁이 단순한 전술(tactics)과 병참(logistics)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직접적인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전쟁이 이길 수 있다면 그만큼 수지맞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전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사회에서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비행 청소년(juvenile delinquents)”에 대해서도 엄격한 규율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도식적 사고도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군대에서 하는 것처럼 태형(笞刑)이라도 실시하란 말인가. 이런 물리적 방식의 훈육으로 교정이 가능하다는 발상이 정말 놀랍다. 문득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총기사건에 대항해서 교사에게 총기를 지급해서 무장시키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떠올랐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는 전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펼치는 아무말잔치인가. 다시 한 번 전미총기협회의 로비와 정치후원금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금권정치의 폐해는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어쨌든 하인라인이 구축한 밀리터리 스페이스 오페라 <스타십 트루퍼스>는 대단히 흥미진진한 요소들을 다수 탑재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구시대의 유산이 되어 버린 명예심, 희생과 헌신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가치들로 무장한 소년 자니 리코가 신병훈련과정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무자비한 거미 전쟁을 거치면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아무리 많은 훈련을 했지만 여전히 캡슐 전투강하를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묘사, 수많은 포기의 순간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동료들 간의 끈끈한 전우애, 거미 종족의 습격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몰락으로 잃게 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아들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내러티브는 정말 대단했다. 사관학교에 지원해서 삼등소위로 지휘관으로 실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막중한 책임감에 불타는 사관후보생의 모습은 신병 시절의 리코의 그것과는 천양지차가 아닌가.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동안 SF소설은 찾아서 읽지 않았는데, 한 번 재미를 들리니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경우에는 전반부에는 군인이 되어 시민권이나 따자는 식으로 기동보병이 된 소년의 고군분투기와 윤리 철학에 기반한 내적 갈등 구조가 마음에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후반부에서 이야기가 안정궤도로 접어들면서 호감이 반감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로버트 A. 하인라인과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작가의 다른 걸작이라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읽을 차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