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잠수함
이재량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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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내가 사는 동네 주변에 자리 잡은 안산이 나오고, 물왕저수지 그리고 시흥 목감 같은 정겨운 지명이 등장해서다. 맨하탄이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낯선 지명보다 훨씬 귀에 착착 감기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무언가 비틀즈의 노래가 삽입된 반세기 정도된 애니메이션과의 연관성 정도라고 해두자.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난 재밌는 소설이 읽고 싶었을 뿐.

 

소설 <노란 잠수함>은 내레이터이자 철학과를 졸업하고 육봉 1호를 몰고 시흥과 안산 일대에서 야릇한 동영상 유통과 판매업에(때로는 의약품도 취급한다) 종사하는 목포 출신 이현태(29세) 청년과 베트남 참전용사 출신 애국보수 김난조옹과 나해영옹 그리고 도발적인 십대소녀 모 모양이 안산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4인조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출발한다. 이거 인적 구성부터 심상치 않으니 가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정도로 성급하게, 화들짝 1부가 끝난다.

 

모든 욕망은 측은지심의 발현이다

 

아니 그런데 왜 그들은 부산으로 향하는가? 현태 청년은 안산 인근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의 용의자이자 연쇄살인마로 지목되어 쫓기는 지명수배자 처지가 되었고, 치매와 장애 노인은 그런 그를 협박해서 육봉 1호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한다. 역시 베트남 시절 동지 오만수 노인에게 배를 사서 노년을 보낼 거라나. 모모양은 철물점을 하는 멍키스패너 아버지로부터 도주 중이다. 노인들은 현태 청년에게 보수로 백만원 정도를 제시했지만,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설의 취약점이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 현태 청년은 아무리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예로 섭마린’에 등장하는 그들만의 페퍼랜드 찾기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이 지점에서 별 한 개를 아무래도 깎아야지 싶다.

 


육봉1호팀의 실질적 리더라고 할 수 있는 김난조 옹은 지병까지 안고 있다. 약장수 모모양이 긴급하게 콩알을 섞어 만든 정글주스로 기력을 차린 그들은 옥산휴게소와 김천을 거쳐 마침내 부산에 도착한다. 물론 문제가 쉽게 풀릴 리가 절대 없다! 도박에 빠진 오만수 노인은 동지들의 피같은 돈을 한방에 꿀꺽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을 시흥에서 자신의 영업을 협박해서 갈취하던 형사까지 등장해서 그들을 뒤쫓기 시작한다. 소설은 어느 잔잔한 로드무비에서 일대 액션이 난무하는 활극으로 변신을 감행한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감추고 싶은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이 터무니없는 로드무비를 찍게 된 김난조-나해영 용사들에겐 반세기 전 베트남에서 얻은 치명적인 사랑에 얽힌 사연이 숨어 있었다. 바로 그 점이 이번 활극을 유발시킨 동인이었다. 김난조옹은 나해영 일병을 대신해서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걸려 허벅지를 날리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나해영 일병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결혼해서 낳는 아이마다 죽는 비극을 당했다. 자신의 몸이 망가진 건 문제도 아니었던가. 낯선 남국의 지옥에서 조국 건설을 위해 젊은 날의 자신들을 희생한 참전용사들은 그후로도 지긋지긋한 PTSD에 시달려야 했다. 오늘도 아스팔트를 누비는 애국보수 노인들이 측은해 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베트콩이 은신해 있다는 정보에 초토화가 된 지옥 가운데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수이진에서 만난 타잉과의 시간들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빛나는 순간이었고 오늘까지 그들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두 노인의 이야기들이 국가적인 차원의 서사라고 한다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현태 청년의 이야기는 개인의 서사다. 어머니가 죽고 세상에 의지할 데라곤 아버지 밖에 없지만, 아버지와 겪게 된 불화의 원인을 추적하다 보니 고향을 등진 현태 청년의 스토리도 눈물겹기만 하다. 독자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눈물의 서사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유머가 부족하지도 않다. 초반의 영화 <부기 나이트>까지 등장해서 핑크빛 무드를 조성하더니, 후반에 가서 활극이 펼쳐질 무렵에는 정말 빵빵 터지고 미친 사람처럼 큭큭거릴 정도로 극한으로 밀어 붙이는 내러티브의 힘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종반에서는 마치 싸이키델릭한 애니메이션(예로 섭마린의 영향 탓일까)의 허무한 결말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되리란 것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찬란히 빛나는 순간을 가슴에 품고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는 김난조옹과 나해영옹의 마지막 길은 판타지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정처없이 이상한 그룹에 미련 없이 투신한 모모양의 참여도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면 이들과 함께 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동영상업자와 두 노인네로 구성된 팀의 칙칙함을 털어주기 위한 배치였을 진 몰라도 2박 3일간의 짧은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어제 받아서 24시간이 채 되지 않을 상태로 읽을 정도로 소설의 뛰어난 가독성은 높이 평가해 주고 싶다. 어서 빨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내러티브도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재밌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마저 다 읽고 다시 루터로 돌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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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 15: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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