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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평점 :
수소폭탄, ICBM, SLBM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니는 가상의 무대를 상정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어제 독서 모임에서 만난 미국 친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공포를 안고 50년도 살았다고 대답했지만, 되돌아온 그의 대답은 북한이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네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무섭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독서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의 역사사회학자 이반 자블론카가 쓴 <레티시아>를 읽었다. 서두에 말한 폭력이 국가를 상대로 한 거시적 차원의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반 자블론카의 르포르타주 <레티시아>는 2011년 1월 18일~19일에 벌어진 레티시아 페레라는 개인에게 벌어진 폭력적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전 프랑스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사건의 단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 완벽할 순 없겠지만, 저자의 이런 시도로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의 전개는 이렇다. 프랑스 낭트 근처 포르닉이라는 마을에 사는 이제 막 성인이 된 18세 소녀 레티시아 페레가 실종, 납치 그리고 살해되었다. 범인은 곧 잡혔는데 32세의 누범자 토니 멜롱이었다. 문제는 유력한 용의자인 토니 멜롱의 비협조로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담당건사 자비에 롱생을 필두로, 프랑스 전역에서 동원된 유능한 헌병대(우리와 달리 헌병대가 사건의 중심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를 필두로 해서 과학수사팀이 나서서 납치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레티시아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2월 1일 시신의 일부분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저자 이반 자블론카는 교차방식으로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들의 삶의 배경을 동시에 추적한다. 실비 라르셰와 프랑크 페레 사이에서 태어난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아버지의 프랑크 페레의 부인 실비에 대한 폭력 문제로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게 됐다. 아버지는 전과자가 되었고, 엄마 실비는 정신병원에 수용되게 된다. 어쩔 도리 없이 위탁가정에 맡겨진 제시카와 레티시아에게 행복이 드리워졌으면 좋겠지만, 그녀들의 아버지를 대신하게 된 질 파트롱 또한 천사의 가면을 쓴 악마였다.
위탁을 맡은 파트롱 씨는 소녀들에게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면서 엄격하게 규칙을 준수할 것을 명령했다. 본색을 드러낸 악마는 손녀벌 되는 소녀들을 성추행했다. 저자는 19세기 이래 공화국 프랑스에서 시행되어온 불우한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제도가 과연 그들을 가난과 불행에서 구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 묻는다. 또 한편으론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혹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엘리트 교육이 그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질문한다. 가난한 가정 출신 아이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이 되는 건 아닌지, 그들을 미래에 사회 하부 구조 노동을 담담할 그런 노동자로 재생산하는 게 아닌지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계급제도에 대한 의문은 저자가 역사사회학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타자는 가해자이자 어려서부터 각종 범죄를 섭렵해온 누범자 토니 멜롱이다. 그 역시 불우한 가정 출신으로 절도와 폭행으로 교정시설을 들락거리며 수년간 동네 악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쌓아왔다.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추적하겠다는 저자의 결심대로 미디어에서 자극적으로 묘사한 대로 냉혈하고 악랄한 살인범으로 그리는 대신 중립적인 입장으로 그를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떻게 한 명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런 악랄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저자가 전개해가는 기술을 도저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리고 엄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범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교정 제도가 사회 도처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증가하는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 역시 돈 그러니까 정부 예산 집행의 문제겠지만, 낭트 지역 사법과 교도행정을 맡은 절대 인력의 부족으로 재판을 맡은 판사들과 보호감찰관들의 살인적인 업무과중으로 토니 멜롱 같은 누범자에 대한 감찰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쩌면 레티시아 같이 억울한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중요한 제3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건 바로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다. 강경 보수주의자로 내무장관 출신 사르코지는 낭트 지역 사법관들에게 레티시아 사건의 책임을 돌렸다.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관용과 화합 대신 증오와 분열의 씨앗을 국가지도자가 정치적 이유로 뿌린 것이다. 이제 전대미문의 파업으로 사법관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레티시아 사건은 전국적인 이슈가 되기에 이르렀다.
레티시아 사건이 진행되던 와중에 질 파트롱의 파렴치한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범죄자들을 가혹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가 알고 보니 불쌍한 소녀들을 오랜 시간 동안 착취해온 포식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복잡하게 얽힌 간단치 않은 사건이기에 어쩌면 이반 자블론카가 오랜 시간을 들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데 뛰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반 자블론카는 우리 지구별에서 18년이란 짧은 시간을 살다 간 레티시아에게 온갖 종류의 고난을 안겨 준 같은 성(性)의 남자로 실로 부끄럽다는 기록도 빠트리지 않는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혼자 세상을 날게 되었지만 불행한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게된 소녀의 삶을 애도하며 홀로 남아 열심히 살고 있는 쌍둥이 언니 제시카 페레를 응원한다는 저자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 자블론카가 사건에 연루된 워낙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들을 다루다 보니, 몇몇 부분에서는 일반독자로서 흥미를 잃기도 했다. 하지만 르포르타주의 후반으로 가면서 저자가 세심하게 다룬 포르닉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감정이 마치 흡입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방대한 작업을 훌륭하게 마무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