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대만 출신 작가 핑루의 사회파 소설 <검은 강>을 읽었다. 한중수교 이래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가 된 대만 작가의 글은 싼마오 이래 처음으로 읽어본 것 같다. 싼마오의 책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들이라면, 핑루 작가의 글은 언론인 출신답게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검은 강>은 그래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옆의 신베이 시에 있는 단수이허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노년의 사업가 훙보와 중년 여교수 훙타이 부부가 피해자였다. 범인은 이내 검거됐다. 훙보가 자주 들러던 인근 커피점의 점장 자전이 피의자로 지목됐다. 핑루 작가는 일단 발생한 사건의 전후과정을 파헤치는 전형적인 미디어 스타일의 글쓰기를 도모한다. 화끈하고 자극적인 사건을 하이에나처럼 쫓는 언론에서는 자전을 사갈녀(蛇蝎女: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한 표현)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그녀의 외모까지 범죄형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추론을 이어간다.

 

핑루 작가는 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법정에서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 언론에서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 추리소설클럽 회원의 날카로운 지적, 변호인의 피고인에 대한 애증의 관계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선을 추가한다. 중국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 사건현장을 일부러 찾는다는 장면에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타인의 고통과 비극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구경거리가 되어 버리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기가 막혔다. 그리고 법원 판결문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만하다. 현재 우리도 사법개혁을 부르짖으며 그동안 누적된 적폐 청산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판결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기존의 상례에 비추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결을 기대하는 것이 과연 무리일까.

 

한편, 언론에서 악랄한 범죄인으로 묘사된 자전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다. 문제는 가난이었다. 빚더미에 오른 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노점상과 가정부 생활을 하면서 홀로 남은 딸 자전이 아버지를 욕보인다며 학대를 했다. 자전은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사랑에 굶주린 인생이었고, 주변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추후에 언급되지만, 자전이 훙보의 계략에 빠져 고민하고 있을 때 주변에 절친이 있어 고민을 상담할 수만 있었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되진 않았을 거라는 작가의 분석이 이어진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사람 좋아 보이는 노신사 훙보는 정말 선의의 피해자였을까? 작가는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다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어디까지나 자전의 진술만 맹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미 언론과 사건을 담당한 검찰에서는 이번 사건을 강도살인으로 규정하고 자전을 사갈녀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작가가 보여주는 훙보의 실제 모습은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딸 같은 처녀에게 접근해서 약을 먹이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을 감행한 훙타이는 또 어떤가. 해외유학파 출신으로 자존감이 센 교수 훙타이는 자신의 결혼 실패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혼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지인의 소개로 정체가 불분명한 노년의 남자와 결혼 자체는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선택이었다. 아니 어느 순간에는 충분히 되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훙타이의 자존감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는 것을 부정했다. 자전이 그녀를 찾아와, 훙보의 불륜 사실을 알렸을 때 그를 감쌀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했다면 현재의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훙보는 무일푼이고 아내 몰래 그녀의 계좌에서 돈을 훔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허영으로 가득찬 훙타이는 노년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믿었다. 가령취에, 대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못이겨 하면서도 어느 순간 상대방을 포기해 버린 아내의 심경에 대한 기술 부분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진술이 죽어가는 순간의 훙타이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설정도 놀랍다.

 

훙타이의 선배는 그녀가 브랜드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말했다. 결혼식날 입었던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베라 왕 드레스, 훙보가 죽으면 입어야 한다고 말했던 비비언웨스트의 상복 그리고 결혼 첫날밤을 위해 준비한 많은 란제리 등등. 역설적으로 훙타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자전이 꿈꾸던 것이었다. 카페도 아닌 커피점에서 만난 대학원생 셴밍과 새로운 출발을 꿈꿨지만 교활한 훙보는 결혼해서도 자신과의 만남을 이어갈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 자전의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훙보를 영원히 자신의 삶에서 지워 버리는 것. 사실 훙보가 아내 훙타이의 살해를 계획했다는 것은 재판과정에서 자전의 진술을 통해 드러났다. 문제는 그것을 증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 않은가.

 

핑루 작가는 <검은 강>에서 피상적인 사건의 전개보다 그 내면에 깔린 진실의 추적에 방점을 찍는다. 자전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훙보야 그렇다치더라도, 훙타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물론 그저 부수적 피해라고 치부하기에는 자전이 지은 죄는 크다. 다만 작가가 지적한 대로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 결과 사랑에 대해 왜곡된 관념을 가지게 된 것이 자전의 잘못인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생각해 보게 해주었다. 주변에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의논할 상대가 있었다면 이런 끔찍한 파국은 최소한 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다른 한 축에서는 사건을 자극적으로 몰고 가는 매스미디어의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핑루 작가는 언론인답게 매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진실을 알리되, 개입하지 않는다라는 언론의 순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공영방송 불능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핑루 작가의 <검은 강>은 그런 점에서 대단했다. 핑루 작가는 30여년 동안 많은 작품을 발표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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