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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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장기 여행을 홀로 갔었다. 그런 여행을 하다 보니 내 뜻대로 모든 일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40일짜리 첫 번째 호주과 홍콩 해외여행에서 절절하게 경험했다. 그 다음부터는 일정에 연연하지 않는 그런 초연한 여행자가 됐다. 그러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스케줄도 잡지 않고, 구름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가는 구도의 길에 올랐다. 내게는 떠나는 것이 중요했지, 어디에 가서 무얼 보고 먹고 자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다혜 씨의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나의 그런 숨겨둔 여행본색을 펌프질하는 책이었다.

 

그동안 내가 낭만의 정점은 며칠씩 걸리는 긴 버스여행 중 어느 휴게소에서 산 프렌치프라이를 먹으며(아마 맥주도 함께였겠지) 해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참으로 영화 <베티 블루>의 어느 장면같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 때 쓴 일기를 뒤져 보면, 아니면 그 때 모아둔 영수증을 찾아 보면 어디쯤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시 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여행 중에 읽겠다고 문고본 책을 소중하게 들고 다녔다. 물론 여행 중에 다 읽지 못했다. 너무 재밌는 일들이 많아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나저나 된장 맞을, 왠 놈의 책 이야기가 여행에세이에 이렇게 많은 걸까. 책 구매를 자극하는 솜씨가 북칼럼니스트답다. 에세이집에 등장하는 책들을 검색해 보느라 책읽는 속도가 거북이 걸음이다. 순간, 여행에세이를 빙자한 책 소개 에세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물스물 피어오를 정도다. 최근에 나왔다는 하야시 후미코의 <삼등여행기> 그리고 <방랑기>가 궁금해졌다. 이 정도라면 선수로군.

 

나도 여행 좀 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다혜 작가에겐 당하지 못할 듯 싶다. 게다가 나이가 드니 예전에 하던 식의 자유여행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에 철들고 나서 처음 해본 패키지 여행은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심적으로는 영 마땅치 않았다. 왠 놈의 라텍스 가게와 선물샵에 그렇게 가는지. 결국 나도 라텍스 베개를 하나 사고야 말았다. 안사면 왠지 눈치가 보여서? 모르겠다. 지금도 베개는 잘 쓰고 있다. 자유여행과 현지 패키지를 겸한 여행이 최고의 조합이 아닐까 싶다. 문제는 현지어, 작가처럼 일본어까지 능통할 순 없어도 국제공용어라는 영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그나마도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책을 바리바리 싸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해외여행에 나서게 되면 자투리로 멍 때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게 되니 그 때 책을 펼치면 아주 유용하겠지 싶지만, 동행이라도 있다면 그와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하니 책 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작가 양반은 홀로 하는 여행을 즐긴다는 것일까?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원래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는 현지 음식 맛보기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길 바쁜 여행자에게 현지 맛집을 찾아가는 건 곤욕스러운 일일 따름이었다. 지금은 모바일이 워낙에 발달해서 즉석에서 바로 바로 찾아갈 수 있지만 나의 마지막 장거리 여행이었던 비엔나 여행길에서는 민박집 주인장에게 뫄뫄해서 슈니첼 맛집을 찾아간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수십년 동안 허름한 슈니첼 하우스에서 비엔나 돈까스를 튀겨온 오스트리아 아줌마의 손님 접대는 융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원한 맥주까지 한 잔 곁들이니 사방을 돌아다니느라 고달팠던 심신의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함께 했던 이들도 모두 만족했던 것 같다.

 

로마에서 만난 어느 건축을 공부하던 커플은 하루에 쓸 비용을 50유로로 정하고 두달에 걸친 유럽 일주를 하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던 숙박비 20유로를 빼고 나면 30유로로 버텨야 한다는 건데, 곳곳에서 물어야 하는 박물관 입장료나 교통비, 점심값 그리고 저녁에 즐기는 맥줏값 등등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장거리 여행에서는 숙박비 부담이 많기 때문에 주로 한인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는데, 니스에서는 이도저도 귀찮아서 그냥 하룻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알려 주는 나름 저렴한 호텔을 이용했던 것 같다. 돈이 없어서 적은 비용으로 하는 여행이나,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현지 맛집을 섭렵하고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여행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말지어다라고 쿨하게 정의하는 작가의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제각각 여행에 나서는 목적과 이유가 다른 만큼, 여행의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게 옳고 그르다는 없지 않을까 싶다.

 

현지 빈대붙기에 대해서도 경험이 있다.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로마에서는 신부로 유학 중이던 사촌형이 살던 이탈리아 수도원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다. 주방에서 일하시던 아주머니는 내 턱을 부여잡고, 신부 사촌형과 턱이 닮았다며 애정을 과시해 주시기도 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그날 저녁에 사촌형에게 공짜 맥주를 실컷 얻어 마셔서 참 좋았다. 그 다음에는 밀라노에서 성악 유학 중이던 사촌 동생네 집에 가서 밀린 빨래도 하고 덕분에 스위스 루가노 호수 구경도 했다. 녀석의 음식 솜씨가 좋았는지 처음 알았다. 그 때 잠시 들린 스위스 아웃렛에서 사촌 제수에게 뭐라도 좀 사주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도 그 땐 돈이 없어서. 물론 나도 지인에게 부탁받은 이를 거둔 적도 있다. 어학연수 시절 알던 지인의 남자 후배가 내가 살던 도시에 들렀는데, 이성이라 같이 자기가 그래서 나한테 부탁을 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나는 흔쾌히 거둬줬다. 뭐 그런 게 인지상정 아닌가.

 

언제나처럼 한 권의 여행 에세이를 다 읽고 나니 나도 그냥 떠나고 싶어져 버렸다. 목적지도 없이 여권과 비행기표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갈 자신이 있다. 여행을 하다 보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발짓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첫 장거리여행을 홀로 해서 그런지 간이 많이 부었나 보다. 물론 여행하면서 기차를 놓쳐 경찰서 앞에서 노숙도 하고 그런 고생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나의 여행들은 좋았다. 그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의 인연도 좋았고.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지금으로선 어느 리조트에 가서 하염 없이 책이나 읽으면서 멍이나 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 책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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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3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돈이 없고 시간만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둘 다 없어져 버렸다.‘ 이 구절 반전입니다. ㅋㅋㅋ 지금은 ‘돈은 있고 시간이 없어서‘가 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돈도 시간도 없습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죠. ㅎㅎ

레삭매냐 2017-08-23 14:0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맞고요...

원래 말쌈 대로 돈은 있고, 시간은 없다라고
쓰려고 했으나 생각해 보니 둘 다 없더군요.
그래서 솔직하게 썼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