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사는 집
정정화 지음 / 연암서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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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그리고 소설도 우리는 너무 서울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일단의 공간들은 익숙하다. 인문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하는 연암서가에서 나온 소설집 <고양이가 사는 집>의 정정화 작가는 공간의 중심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한다. 그래서 언양이니 태화강, 희락공원, 작괘천 그리고 자수정동굴 같은 실존하는 지명들은 외국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낯설기까지 하다. 내가 만약에 소설을 쓰게 된다면 관심을 지방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고양이가 사는 집>은 포인트 하나.

 

모두 10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고양이가 사는 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일상밀착형이다. 러시아 여행을 떠나 만난 사람 듬직해 보이는 가이드가 사실은 여행객의 돈을 훔친 범인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화자가 추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산했던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질 않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골인해서 아이를 낳고 작은 행복이나마 이어가고 싶어했던 주인공 엄마의 바람은 가장으로서 책임보다는 게임에 중독되어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들의 모체는 이미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대중에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자극적 현실이 쉬르리얼리즘의 영역을 훨씬 뛰어 넘은 모양이다.

 

<불맛>에서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둬준 은인 아저씨의 젊은 부인 수진을 은근히 사모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묘목 납품 경쟁에서 자신보다 젊고 능력 있는 석규에게 진 아저씨는 엉뚱하게 수진에게 화풀이를 하고, 낫을 들고 석규의 묘목들이 심겨진 밭으로 가 화풀이를 한다. 그 장면에서는 경영을 잘못해서 기울어진 사업탓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정부 들어 교정에 들어간 갑질제거 작전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정작 균열과 붕괴는 외부의 화마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아저씨만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로 보인다 내게는.

 

흑색 토마토라고도 불리는 <쿠마토>는 도망간 엄마의 자리를 대신한 외국 출신 새엄마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중학생 딸이 기술한 이야기다. 쿠마토 농장으로 먹고 사는 아버지에게 잰 솜씨로 수분작업을 하고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고, 한국어 배우기에도 열심인 새아내는 과분할 따름이다. 문제는 그놈의 의처증과 딸내미의 음모로 시작된 가정폭력의 수준이다. 폭력의 단초를 제공한 딸은 불길이 자신에게 닥치는 걸 원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것을 교정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불의가 만연했던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당신을 도대체 무얼 했냐는 작가의 힐난처럼 다가왔다. 더 큰 비극이 발생하기 전에 새엄마의 새출발을 응원했고, 결말은 그렇게 됐다.

 

<뻥튀기 먹는 남자>도 재밌게 읽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춘복은 미꾸리와 메뚜기를 잡아 팔아다가 가족을 봉양하고, 동생들을 교육시켰다. 어린 나이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춘복은 어쩌다 보니 마흔을 훨씬 넘긴 노총각이 되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외국 며느리라도 들이라고 성화인데, 그것이 매매혼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정식으로 결혼할 수도,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봐야 남 좋은 일 시키는 거라며 어머니의 지청구 따위는 잔소리일 뿐이다.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한 동생들이 우연히 만나 살림을 차린 수희보다 나은 게 무엇이란 말인가. 춘복의 속마음을 작가는 한 편의 르포처럼 추적한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돼 할아버지의 가업인 뻥튀기 장수로 나선 성수는 저마다 튀기는 시간이 다른 곡류를 다루는 노하우를 몰라 태워 먹기가 일쑤다. 작가는 사카린을 넣어 튀기는 달달한 뻥튀기 만들기와 춘복이 원하는 사랑의 궤적을 투트랙으로 추적한다. 개인적으로 열 개의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편의 외국소설을 읽었는데, 나는 이렇게 정감이 넘치는 우리 소설을 읽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맛난 꿀떡을 삼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외식을 오래 하다 보면, 구수한 된장국이 먹고 싶어지는 그런 심정이려나.

 

희락공원의 건강음료 파는 아줌마에게 속아 죽은 아내의 기일날 금가락지 해줄 돈 40만원을 털린 김 노인의 스토리는 또 어찌나 애잔하던지. 그러게 살아 있을 적에 잘할 것이지. 아내의 죽음이 아버지 탓이라는 아들의 말에 김 노인은 제대로 대거리도 못한다. 사실이니까. 김 노인의 처지를 동정해 주던 멋쟁이가 알고 보니 사기꾼 아줌마와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은 아예 놀랍지도 않다. 하긴 그녀의 사정도 들어 보면 그럴 만하구나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울산에서 부산에 둥지를 튼 오빠네 집에 놀러 갔다가 멋진 드레스 한 벌 얻어 입고, 못볼 꼴을 보고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동생의 사연은 또 어떤가. 임신까지 한 동거녀를 제자라고 소개하는 품새도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오빠에게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초등학교 교사 올케가 있다는 건 반전이었다. 오빠의 신세는 동생이 잡으려고 놓은 쥐 끈끈이에 잡혀 허덕이는 신세와 묘하게 오버랩이 된다.

 

농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담장>에서는 어디선가 읽은 구제역에 걸린 동물들을 산 채로 파묻는 장면이 그래도 떠올랐다. 그나마 소는 죽여서 묻었는데 돼지들은 산 채로 묻었다고 했던가. 수입쇠고기 때문에 솟값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데 왜 우리 소비자들은 여전히 떨어진 쇠고기값을 체감할 수가 없는 걸까? 도대체 중간 유통에서 챙기는 우리의 이익이 얼마란 말인가 따위은 소소한 질문은 대처에서 들어온 이웃집 형의 아내가 기왓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으면서 땅문제로 유발된 갈등에 파묻힌다. 그렇지 언제나 땅이, 내가 가진 알량한 재산이 문제로구나. 사료값도 되지 않는 소를 위해 녀석의 분뇨를 치우며 1시간이면 할 수 있는 일을 4시간 걸려 하니, 짜증이 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겠지. 엉성한 봉합으로 땅문제는 해결되고 막걸리로 대동단결한 불콰해진 얼굴들을 생각해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

 

표제작 <고양이가 사는 집>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등장한다. 지난 주말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쓴 <액스>에서는 실직한 가장이 냉혹한 연쇄살인마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해 열띤 토론을 가졌었는데 대한민국의 실직한 가장은 신자유주의의 세련된 세뇌를 받아, 구조적 사회모순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모든 성공과 실패를 내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금이나마 가사에 보태겠다고 고무 패킹 끼우는 부업을 하는 아내에게 차마 실직했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가장.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엄혹한 시절, 실업이 곧 가정의 파탄선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나도 내 일자리를 잘 지켜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문학계의 변방에서도 독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가가 열심히 글을 짓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때로는 나 자신을 이야기에 투영시켜 비교해 보기도 하고,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유도 해볼 수가 있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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