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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평점 :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5년 최고의 책으로 추천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미국 출신 로런 그로프의 세 번째 작품 <운명과 분노>는 확실히 재밌는 책이었다. 인류의 삶에서 배제할 수 없는 결혼과 사랑이라는 테마로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빚어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먼저 소설의 남자 주인공 랜슬럿 ‘로토’ 새터화이트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운명> 그리고 더 놀라운 삶의 비밀을 감춘 마틸드 ‘오렐리’ 요더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분노>를 읽어 보니 여러 매체에서 이구동성으로 빼어난 작품이라는 의견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 <운명>부터 살펴 보자. 플로리다 출신 로토 새터화이트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순수한 영혼이다. 물론 그를 그렇게 만든 배경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유산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어공주 출신 엄마 앤트워넷이 있다. 앞으로 수십년간 우정을 이어나갈 절친 콜리의 쌍둥이 그웨니와 관계하면서 남자가 된 로토는 불의의 사고로 따뜻한 집에서 쫓겨나 북부의 사립학교에서 성장하면서 특유의 매력을 발휘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남자가 된다. 학교에서 엽색가를 지칭하는 ‘호그마이스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력남이었던 로토는 22살 때 운명의 여자 마틸드 요더를 만나면서 180도 다른 남자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아, 그리고 보니 소설의 시작은 이제 막 결혼한 로토, 마틸드 커플이 바닷가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던가. 그리고 보니 결혼한 부부의 생활에 방점을 찍으면서 호그마이스터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섹스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로토와 마틸드는 그야말로 섹스가 없다면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처럼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랑에 전념하는 그런 커플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매정한 엄마 앤트워넷의 절연선언이었다. 며느리의 과거를 알게 된 앤트워넷은 경제적 지원을 끊고, 무명의 희곡 배우를 전전하던 로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공가도를 달리지 못하고, 좌절의 시기를 경험한다. 우연한 기회에 희곡 작가로서 재능을 발견한 로토 마틸드 부부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그런 저런 삶을 이어가던 가던 어느 날, 로토는 마틸드의 과거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아름답고 순수했던 청년 로토에서 24년간의 결혼생활을 겪은 중년남자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실 ‘사자’ 같이 희곡 작가로서 성공을 질주하던 남자 로토의 추락은 부부가 같이 떠난 어느 대담에서부터 잉태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며 남편을 보필한 아내 마틸드에 대한 로토의 사려깊지 못한 발언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며 그들이 묵던 호텔로 돌아온 장면에 대한 묘사는 비록 사랑하는 사이지만 언제고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갈 지도 모를 그런 갈등의 파고가 수면 아래 잠자고 있다는 그런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로토의 죽음 다음 시간을 다루고 있는 ‘드래곤 와이프’ 마틸드의 <분노> 편에서는 로토가 정작 아내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게 전무했다는 점을 전제하고 시작한다. 고향 프랑스에서 끔찍한 사고로 부모에게 버림 받은 오렐리가 파리에서 매춘부 할머니와 보낸 시간 그리고 다시 할머니의 죽음 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는 범죄자로 추정되는 삼촌에게 보내져 미국 사람으로 거듭나고, 대학진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에어리얼 잉글리시라는 미술품 거래상과 장장 4년에 걸친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했다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소설에 대한 나의 흥미가 비로소 안착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로런 그로프 작가는 이렇게 흥미진진한 후식을 준비하기 위해 어쩌면 별다를 것 없는 희곡 작가의 삶을 전면에 배치했던 게 아닐까. 어머니의 후광으로 세상 어려움 없이 살아온 남자 로토의 이야기에 비해, 마틸드의 파란만장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전개는 상대적으로 스펙터클하지 않은가 말이다. 책날개에 적힌 대로 작가가 준비한 ‘폭발적인 서사’가 독자의 시선을 사로 잡는데 걸리는 시간은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강렬했다. 물론 마틸드가 감춰온 삶의 진실들이 한 꺼풀씩 베일을 벗고 독자 앞에 등장할 때마나 예의 폭발적 서사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정교한 스토리텔링은 또 어떤가.
마틸드와 앤트워넷이 로토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암투는 우리네 흔한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고부갈등과는 다른 차원의 서사를 선사하기도 한다. 마틸드의 과거를 아는 앤트워넷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마틸드를 압박하고, 어려서부터 가족의 진정한 사랑이라곤 받지 못한 쌈닭 마틸드 역시 시어머니와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들에 대한 앤트워넷의 사랑을 잘 아는 마틸드는 갖은 핑계를 대면서, 모자의 상봉을 저지한다. 시어머니 역시 아들에게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해 갖은 뒷조사를 마다하지 않지만 어쨌든 최후의 승리자는 불굴의 투사 드래곤 와이프였다. 작가가 준비한 두 가지 비장의 무기가 과연 마틸드가 승자였는지 되묻게 만들긴 했지만 말이다.
같은 남자로서 셰익스피어와 세상의 모든 여자들 중에서 마틸드를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남자 로토가 불쌍했다. 아름답고 순수했던 로토는 15년 동안 자신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주저하지 않았던 평론가 피비 델마의 냉혹한 비평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자식이 없음을 한탄했지만, 사랑하는 아내 마틸드가 낙태를 하고 불임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썼다고 생각하는 희곡 작품들 역시 사실은 아내 마틸드와의 공동 작업의 결실이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그런 철부지 남편이 아니었던가. 역설적으로 마틸드 역시 로토가 언제라도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해야 할까.
로런 그로프의 걸작 <운명과 분노>는 우리가 완벽하게 생각하고 있는 결혼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물론 빼어난 재능을 가진 새로운 작가와 만나는 재미는 덤으로 따라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