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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류진운 지음, 김태성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말빚이 많은 시절이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핸드폰이다. 예전에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도 약속해서 만나고, 소통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생활 속에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그만큼 말빚이 는 기분이다. 소통의 수단인 핸드폰, 아 이제는 진화해서 모바일 폰 시대라고 해야 하나, 같이 있어도 대화를 나누기보다 온갖 정보와 놀거리, 볼거리들을 제공하는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마치 이런 세태를 예언이라도 하듯 중국 당대 작가 류전윈은 손전화를 매개로 한 멋진 소설을 탄생시켰다.
<나는 유약진이다>라는 책의 제목은 그전에 알고 있었다. 웅직지식하우스에서 꼴랑 5권 발표되고 시리즈가 중단된 중국 당대 작가선 중의 하나였는데, 원래 출간예정 중이라고 했던 나머지 두 권은 아예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 알라딘에서 로쟈 선생의 중국 당대 작가 포스팅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집에서 잠자고 있던 옌롄커 작가의 <풍아송>을 필두로 해서 몇 권의 책을 구해다 읽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는 엄정해서 안 팔리는 책들은 바로 품절 절판의 운명이다. 류전윈 작가의 <핸드폰>도 마찬가지다. 다행이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가 있었다. 아마 난 또 옌롄커 작가와 류전윈 작가의 책사냥에 나서게 될 것 같다. 아니 이미 나서고 있을지도.
역시나 서론이 길었다. 중국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많을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는 그런 후문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 소설이라는 광고 카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 그래? 역시 이 정도는 돼야 호기심을 자극한다. 작가도 한국판 서문에서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의견을 피력했던가. 중국에서 만큼 인기가 없어서 아마 그럴 일은 없었겠지. 암튼 소설 <핸드폰>에서 잘 나가는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인기스타 옌셔우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의 발단이 옌셔우이가 핸드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그때그때 기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그게 아니라 어려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옌셔우이의 성정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은 서방 공업국가들을 따라 잡기 위해 중공업위주의 경제부흥운동인 대약진운동을 무리하게 전개했다가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처참한 실패를 불러왔다. 주인공 옌셔우이의 어머니도 이런 대약진운동의 직접적 피해자였던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그렇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수하에서 자라 도시에서 방송국 PD로 그리고 다시 방송 사회자로 성공한 옌셔우이는 아내 위원지엔과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팜므 파탈 같은 출판사 편집자 우유에와 불장난을 하다가 그만 그 사실이 아내에게 발각되고, 연쇄적인 거짓말 때문에 파경에 이른다. 다시 문제들을 되짚어보면, 옌셔우이의 부주의한 핸드폰 관리가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그의 부정(不貞)과 거짓말이 진짜 문제였다.
옌셔우이의 방송 프로그램인 <진실을 말한다>의 중심을 잡아주는 교수 페이모 역시 선의(?)로 옌셔수이의 거짓말 작전에 참가했다가 문제를 최악으로 치닫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소설 같은 문학세계에서 거짓말이 종국에 가서 가져올 파국은 언제나 예상 가능한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옌셔우이는 지식인 페이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자신은 광대고, 라오페이(페이모) 선생은 공자라는 설명에서 그들의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방송에서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의 일상은 순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지 않았던가. 류전윈 작가는 이런 역설적인 메시지를 작가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핸드폰>으로 류전윈 작가의 책은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소설 작법이 특이하고 작가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있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어떤 결정적 사건을 독자 앞에 툭 던져 놓고, 이미 벌어진 사건의 전개를 어떻게 해서 주인공이 알게 되었는지를 풀어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의 입장에 독자를 대입해서 객체와 주체의 일원화를 추구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현재는 도시사람이 되었지만, 출발은 농촌이었던 중국 사람들의 현실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출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성공해서 모두가 꿈꾸는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뿌리는 시골 고향에 가 있다고 해야 할까. 옌셔우이가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위해 담장을 새로 쌓고 집을 수리하는 장면은 고대 이래로 이어져온 금의환향의 개발시대 버전이지 싶다.
소설 <핸드폰>은 마지막 장에서 산시 성 옌씨 마을에 살던 옌셔우이의 할아버지 옌바이하이가 고향에서 2천여 리나 떨어진 내몽골 커우와이에서 거세일을 하게 된 저간의 사정과 고향에서 보낸 혼인하라고 메시지를 수년 만에 듣게 되어 한달음에 집으로 뛰어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며 막을 내린다. 그전에 고향의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은 옌셔우이는 자동차로 단박에 달려가지 않았던가. 비록 임종은 못했지만. 할아버지와 손자 시대의 간극은 그만큼 엄청나다는 방증일까.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생활에 꼭 필요한 말들만 하며 살았는데, 현대사회에서는 하루에 수천 마디의 말을 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류전윈 작가는 냉정하게 현 세태를 꼬집는다. 예전에 비해 말의 가치를 따지자면,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에는 너무 불필요한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과 달리 사회가 확장되고, 우리생활의 접촉면이 다양해지고 많아져서 상대적으로 많은 말을 하게 된 것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말이 많아져서 삶의 피로도도 높아진 게 사실이 아니던가. 스마트폰이나 이메일을 통해 전달되는 원하지 않는 수많은 메시지의 홍수는 이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 지경이다. 대화와 소통도 좋지만, 모름지기 우리의 선인들은 과유불급이라는 말로 매사에 과함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물론 삶에서 처신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