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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이런 아이러니라니. 내가 처음으로 만난 조르조 바사니의 책은 <성벽 안에서>였는데, 처음으로 읽은 책은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조르조 바사니 선집(총 6권)으로 출간되고 있는 시리즈 두 번째인 <금테 안경>이었다. 굳이 적은 분량 때문이라기 보다, 그냥 그전에 다 읽은 책 다음에 무얼 읽을까 하다가 때마침 옆 자리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책의 저자 소개를 보면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로 이탈리아의 도시 “페라라”와 “유대인”이라고 제시했는데, 개인적으로 한 가지 키워드를 더 추가하고 싶다. “반파시스트”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던 도중에 프리모 레비의 책을 두 권이나 읽었다. 조르조 바사니가 1916년생 그리고 프리모 레비가 1919년생이니 동시대의 같은 나라에서 벌어진 일을 체험한 두 명의 청년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비교해 가며 읽는 체험은 특별했다. 전자가 전전의 1938년을 기점으로 이탈리아 내에서 <인종법>이 시행되던 시기를 다루었다면, 후자는 무솔리니의 몰락 이후 반파시즘 활동에 나섰다가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차이점 정도라고 해야 할까.
소설 <금테 안경>의 화자는 올해 스무살 난 청년 “나”다. 짧은 단편은 나의 시선으로 페라라 출신 저명한 이비인후과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의 삶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된다. 베네토 출신으로 페라라에 자리잡은 파디가티 선생은 독신으로 페라라 부르주아 사회에서 뛰어난 의술과 훌륭한 인품으로 명망을 쌓은 인사다. 극장의 어둠과 연기 속을 가로 지르던 파디가티 선생이 쓴 금테 안경 특유의 광휘를 묘사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읽었다. 화자는 페라라에서 볼로냐로 통학하는 학생이었고, 통근 기차에서 파디가티 선생을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 비록 두체(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이긴 했지만 모든 평화로워 보이는 시절, 하지만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장 나의 가정을 덮치게 될 폭풍은 유대계 이탈리아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게 될 인종법의 시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디가티 선생의 성적 정체성이었다. 조르조 바사니는 페라라 전체가 나서 파디가티 선생의 신붓감을 구해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정작 본인의 고사로 실행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괴상망측한 소문 때문이라고 은근하게 복선을 깔고 들어간다. 전자가 나를 기존에 아무런 제한 없이 누리던 각종 자유의 박탈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페라라 사회의 사실상의 지배계급이었던 부르주아 사회로부터의 냉혹한 추방을 상징했다. 소설을 통해 알게 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페라라의 유대인들이 초반에는 두체를 지지하고,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전언이다. 그들은 정말 당시에 자신들의 행위가 훗날 치명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한편 소설의 무대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페라라 도심에서 여름휴양지 리초네로 공간이동한다. 화자 “나”의 가족 역시 페라라의 다른 부르주아들처럼 리초네에서 긴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문제는 파디가티 선생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델릴리에르스를 파트너로 해서 알파로메오를 타고 휴양지에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볼로냐행 통근열차에서 파디가티 선생을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던 바로 그 델릴리에르스가 아니었던가. 가뜩이나 가십에 굶주려 하던 리초네의 작은 페라라 부르주아 공동체에 이렇게 좋은 먹잇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한다. 그 대표주자 중의 한 명은 변호사이자 정치인의 부인인 라베촐리 부인이다. 파디가티 선생의 면전에서 노골적인 모욕주기를 마다하지 않고, 파디가티 선생과 델릴리에르스를 ‘신혼부부’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그녀를 통해 바사니는 점잖은 부르주아들의 위선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우스꽝스러운 신혼부부의 파국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드리아 해의 리초네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델릴리에르스와 파디가티 선생의 관계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유명한 영화 <베니스에서 죽다>를 바로 연상시킨다. 영화에 비해 덜 노골적인 시선이긴 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던 여름이 끝나고 페라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인종법 통과 소식에 어머니는 실신지경에 이른다. 앞으로 페라라 유대인 공동체에 어떤 암운이 드리울지 모르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화자는 파시즘을 찬양하는 친구 니노 보테키아리와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다시 게토로 내몰리는 이교도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한동안 잠잠했지만 언제라도 수면 위로 부상할 수 있는 반유대주의 광풍은 파디가티 선생이 직면해 있는 일반인들의 동성애 혐오와 궤도를 같이 하기 시작한다. 연인을 잃고 낙담한 마음에 페라라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파디가티 선생과 함께 하게 된 유대인 청년의 대화는 그래서 더 슬프게 다가온다.
처음 만난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 <금테 안경>은 나른한 분위기 속에 언제라도 태풍이 몰아칠 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대한 조짐들을 품고 있다. 이미 유럽 대륙을 뒤덮기 시작한 ‘거대한 광기’의 전조라고 해야 할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불관용의 시대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는 현실 앞에 무기력한 군상들을 나열한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거대한 광기 앞에 인류가 자랑하는 지성과 인품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래서 어어떤 이들은 프리모 레비처럼 저항의 길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절멸 수용소행을 체념하듯 받아들일 지도, 또 어떤 이들은 파디가티 선생처럼 스스로를 포기하는 길을 선택할 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선택지도 행복한 결말과는 명백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바사니가 펼쳐 보이는 페라라 이야기를 좀 더 읽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