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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프레드릭 배크만의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이하 할미전)을 읽었다. 물론 전작인 <오베라는 남자>도 읽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자면, 배크만 작가는 긴 호흡의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판단이 든다. <오베>에서도 그랬지만, <할미전>에서는 좀 더 긴 호흡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사실 소설의 절반을 읽을 때까지 배크만 작가가 하고 싶은 포인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일곱 살 짜리 주인공 엘사가 돌아가신, 매우 특이하고 정상궤도에서 자주 이탈하시는 할머니가 남긴 미션을 수행하며 깰락말락나라라든가 환상의 나라 미아바스 5개 나라 운운하는 것이 조금씩 못마땅해지려는 찰나에 배크만 작가는 비로소 구글과 위키피디아로 세상을 배우는 손녀딸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긴 일련의 편지들을 통해 할머니의 진심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소설의 진가가 빛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잠깐 엘사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다. 해리 포터와 스파이더맨을 자신의 정신적 멘터로 생각하며 돌연변이 엑스맨들과 자신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제 곧 여덟 살이 되는 당돌한 꼬마소녀다. 엘사는 자신을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맞추기 보다 자신이 ‘싸워서 지킬 만한 무언가’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당당한 환경보호주의자로 가문비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플라스틱 트리를 더 선호한다. 물론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건 기본이다. 냉소주의로 무장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은 덤이다.
모든 동화의 서사가 그렇겠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 제몫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니 이 책을 읽을 분들은 참고하시라.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친딸이자 엘사의 엄마인 울리카를 버려두고 외과의사로 세상을 주유한 할머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순간엔가 문득 아무리 비범한 손녀 엘사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동화가 무조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걸 어떻게 확실할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 특이한 소녀 엘사는 따돌림의 대상이지만, 슈퍼 히어로에 가까운 할머니의 도움으로 미션 수행에 나섰을 때 거의 모든 이들이 엘사를 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엘사가 괴물이라고 부르는 무시무시한 울프하트에서부터 시작해서 주정뱅이 까만치마 여자(혹은 바다천사), 스스로 차지권 조합의 수장을 자처하는 잔소리쟁이 브릿마리, 뚱한 택시운전사 알프, 기가 막힌 비스킷을 굽는 마우드네 그리고 미아바스성의 수호하는 기사 엘사를 보호하는데 목숨까지 바친 워스에 이르기까지 동화와 현실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기가 막히게 멋진 이야기를 빚어낸 배크만 작가의 실력에 감탄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혼가정의 엘사는 새아빠 예오리를 좋아할 수밖에 되리라는 운명적 직감에 엘사는 온몸으로 거부하면서도 엄마 울리카가 반쪽이를 낳으면 자신이 더 외로워질 거라고 두려워한다.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두고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 대한 원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제목에 할머니가 들어가 있어서 소설에서 할머니의 활약을 기대했던 나같은 독자는 적잖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할머니의 역할은 엘사에게 미스터리한 미션을 남겨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꼬맹이 엘사의 마음 씀씀이가 어른 뺨치는 수준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 특유의 동심(엘사는 오보이 코코아를 아주 좋아라한다)을 잊은 것도 아니다. 배크만 작가는 이 두 가지 경계선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이야기를 열심히 이어간다.
사실 핵심적인 본론에 들어가기까지가 생각보다 길어서 좀 개떡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내의 열매는 참으로 달았다. 배크만 작가가 예비해둔 비장의 관계들이 하나둘씩 베일을 벗기 시작하면서 서사에 재미가 더해지고 박차가 가해지면서 전작 <오베>를 찜 쪄 먹을 정도로 소설은 달리기 시작한다. 스포일링을 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만 맛을 보이자면 엘사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어찌 되었던 간에 할머니와 직간접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웃과 인사는커녕 마주치기조차 꺼리는 현대사회는 또다른 소설 <닥터 글라스>의 인용처럼 점점 더 영혼의 진공사태로 진입하고 있는 마당에, 그네들처럼 싸우고 다투고 언쟁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가볍게 읽을 수도 또 다른 차원에서 보면 묵직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할미전>을 다 읽고 나니 확실히 보람은 있었다. 다음 주에는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된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닥터 글라스>에 도전해봐야겠다. 또다른 소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