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
자크 타르디 지음, 박홍진 옮김 / 길찾기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최근 서해문집에서 출간된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의 작가 자크 타르디의 전작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서관에서 <포로수용소>를 빌려다 읽었다. 프랑스의 국민작가라 불린다고 하는데 국가 최고 영예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거부한 일화도 유명하다고 한다. 아나키스트로서 어떻게 국가가 주는 훈장을 받을 수 있겠냐고 했던가. 예술가의 대단한 의이가 아닐 수 없다.

 

1871년의 대서사시 <파리 코뮌> 이야기도 궁금하지만 당장 구할 수 없으니 일단 <포로수용소>로 만족할 수밖에. 지금은 작고하신 작가의 아버지 르네 타르디의 2차세계대전 참전기와 나치 독일의 전격전으로 프랑스가 항복하고 난 뒤 전쟁포로로 4년 8개월이나 독일 동부의 포메라니아에서 포로생활을 기록한 육성수기다. 타르디 작가는 만화에 나온 모든 내용이 사실에 바탕을 둔 실화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단 한 가지, 자신의 아버지 르네와 장인이 임시수용소에서 잠깐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는 빼고 말이다.

 

타르디의 할아버지도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라고 하는데,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또다른 전쟁으로 참전용사의 아들도 전차병 부사관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전자가 승전의 영예를 드높였다면, 후자는 패전의 불명예를 지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떳떳하지 못했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 세대의 불화는 물론이고, 전선에 뛰어든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지만 소위 앉은뱅이 전쟁이라 불린 시기 동안 프랑스 전쟁지도자들의 무능력 때문에 결국 전쟁에 지고 말았다고 르네 타르디는 그래픽노블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과연 사실이었을지 궁금하다. 전쟁의 최고 책임은 역시 지도자들이 지는게 맞지만, 전선에 투입된 병사들 역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폴란드에서 블리츠크리크(전격전)로 사기충천하고 현대식 무기와 많은 훈련을 통해 단련된 나치 독일군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굳이 탱크가 아닌 전차라 불러 달라고 주문하는 르네 타르디의 전투는 1940년 봄에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다. 그리고 그는 동부 포메라니아의 슈탈라크 수용소에서 전쟁의 나머지 기간을 보내게 됐다. 적에게 패배했다는 열패감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효율과 규율을 강조하는 독일군의 점호와 전쟁포로들은 충분히 굶겨야 하고(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르네는 증언하고 있다), 전쟁으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는 독일 제국에 강제노역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프랑스 작가답게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있는데 특히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공중변소 장면은 압권이었다. 뒤로 팔을 걸고 볼일을 치르는 포로들의 일상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그래픽노블은 시종일관 사실에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해 보려는 작가 자크 타르디의 페르소나인 반바지 입은 소년과 자신의 전쟁 트라우마를 최대한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아들 세대에게 사실을 전해 주려고 노력하는 아버지 르네의 첨예한 갈등이 전면에 그려 넣고 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자가치료하기 위해 르네는 엄혹한 시절에도 불구하고, 독일 전쟁에 기여하지 않기 위해 노동력 제공을 거부했고 귀찮은 점호를 일상놀이처럼 만들었으며 회계업무 처리를 위해 동원되었지만 숫자에 장난을 쳐서 협력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꼴라보’들도 있었노라고 증언한다. 독일제국이 천년 동안 지속되라는 전망이 보일 적에는 자청해서 꼴라보레이션을 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 천년제국의 꿈이 날아가 버리자 어느새 레지스탕스로 변신한 이들도 있었단다.

 

하지만 역시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사랑하는 아내와 떨어져 기약 없는 포로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감옥에 갇힌 죄수도 자신의 형량을 알고 기다릴 수 있는데, 전쟁포로들은 전쟁이 끝나야 집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군대가 무적처럼 유럽대륙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고향으로 돌아겠다는 그들의 바람은 헛될 꿈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포로에 대한 형편없는 처우 역시 절망을 가속화시키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똑같은 포로라고 하더라도, 미군의 대우는 달랐다고 하는데 전쟁 초기 어이없는 패전으로 프랑스군에 잡힌 거의 없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미군처럼 대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르네 타르디의 생각인 모양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또다른 형태의 강제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쟁포로인 르네는 알고 있었을까? 그들에게 아주 간혹 가다 허용되는 샤워실이 누군가에는 죽음의 순간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이 배고픔과 추위, 가혹행위에 시달려야 했다는 사실에 난 분노했다. 그리고 자크 타르디가 이 그래픽노블을 통해 명백하게 그리고 있는 반전 메시지에도 적극 찬성한다. 같은 포로로서 자신들보다 낮은 대우를 받는 사람 좋은 폴란드 혹은 러시아군 포로에 대한 연민과 동정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타르디 작가는 아버지 르네의 입을 빌어, 지속적으로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에 지면을 할애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결정은 그들이 내릴 테니까 말이다.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인 분단국가에 사는 사람으로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의 이야기가 남다르게 들리지 않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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