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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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날에 <캐롤>을 읽었다. 때마침 영화가 개봉해서 그런지 소설까지 세간의 관심을 끄는 모양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본국인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인기를 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녀의 작품들이 속속 영화화되는 걸 보면 작가가 집필한 소설의 가치를 이제야 깨닫게 된 걸까. 그냥 대충 사랑에 빠진 두 명의 레즈비언에 대한 소설이겠거려니 하고 집어든 소설 <캐롤>은 좀 더 복잡한 서사 구조로 독자를 유혹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19살 먹은 테레즈 벨리벳이다. 연극 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며 크리스마스 대목에 백화점 알바를 하던 그녀는 매장에 들른 캐롤과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테레즈에게는 유사 남자친구인 부유한 집안의 리처드 셈코가 있지만 도통 그에게는 관심이 없다. 화가 지망생인 리처드가 결국 자신에게 관심을 끊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리라는 걸 테레즈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시쳇말로 질척거릴 정도로 집착하는 리처드에게서 테레즈는 그의 집착과 단호함이 언젠가 폭력적인 증오로 휘발되리라는 걸 예단한다.

 

테레즈의 경제적 상황은 리처드나 부유한 집안 출신의 캐롤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그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인 반면, 테레즈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대 디자이너 조합에 가입을 목표로 꾸준히 돈을 저축하며 초라한 월세방을 전전한다. 어떤 점에서 보면 테레즈는 자신의 인생의 목표는 뚜렷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서투르기 짝이 없다. 소설의 초반에 나오는 로비체크 부인과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캐롤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도 그렇다. 잘 나가는 하지와 결혼해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캐롤은 이혼에 직면해 있다.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린디의 양육권을 두고 남편을 상대로 소위 사랑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그녀의 삶에 ‘애송이’ 테레즈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한편, 테레즈는 캐롤의 오랜 친구인 애비에게 질투심을 폭발시킨다. 이 모든 것을 일천한 연애경험부족 탓으로 돌려야 할까.

 

캐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테레즈는 정말 순수한 감정으로 그녀에게 빠져 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를 쫓는 애달픈 눈길의 리처드는 분노에 찬 증오를 내뿜는다. 역설적으로 리처드가 그런 행동을 할수록 테레즈의 감정은 캐롤에게 다가서게 된다. 테레즈에게 캐롤과 함께 한 순간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이지만, 리처드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지루하고 고역스러운 시간들일 뿐이다. 테레즈가 리처드를 사랑하긴 했었던가. 어느날 캐롤이 테레즈에게 함께 여행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중서부를 가로 지르는 두 여인의 여로가 시작된다.

 

LGBT의 시대에 시대를 앞서간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 이야기는 매혹적인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니 영화 <캐롤>의 감독도 커밍아웃한 토드 헤인즈다. 게다가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형식까지 갖추었으니 완벽하지 않은가. 한 명은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애송이 처녀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혼소송 중인 상류층 유부녀의 일탈이야말로 영화화하기에 더 없는 소재가 아닌가. 철부지 소녀를 마냥 사랑하는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운 남자. 게다가 그렇게 여행길에 오른 테레즈와 캐롤을 미행하는 탐정까지 등장하니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동시에 소설 <캐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 테레즈가 캐롤과의 사랑을 통해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에 나오는 문장 중에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어”를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모든 사랑은 규정할 수 없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지 않은가. 그저 관용의 눈길로 바라보면 그만인 것을 너무 빡빡하게 대하는 게 아닐까. 타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네들만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에서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긴 여행길에서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무리 없이 그려낸다. 시카고로, 디모인과 워털루 그리고 수폴스로 이어지는 그들의 여로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더 알게 되고,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과정의 순간들을 작가는 인상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 <캐롤>이 언제 발표된 책인지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로 검색해 보니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이 <The Price of Salt>로 1952년에 발표된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나왔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전선으로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서 공장에서 선박을 조립하고 용접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지만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보수적이었다고 하이스미스는 캐롤의 이혼과정에서 테레즈가 캐롤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연서가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는 점을 강조한다.

 

긴 여행을 거쳐 두발로 서게 되는 테레즈의 사랑에 대한 결정은 아름답다.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케팅 문구보다 자주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테레즈 벨리벳의 해피엔딩이 더 마음에 들었다. 긴 명절 연휴에 읽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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