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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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콜로니얼 스타일의 작품을 즐겨 읽는 편이다. 작년에 흠뻑 도취됐던 하니프 쿠레이시를 필두로 해서 제이디 스미스의 책도 읽으려고 사두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엔 진짜 날것 같은 느낌의 책 <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를 만났다. 이 책의 작가인 노바이올렛 불라와요의 데뷔작으로 아프리카 출신 여성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맨부커상 최종 리스트에 오른 작품이라고 한다. 보수적인 문학상이 인정할 정도라면 일단 작품성은 보장된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소설은 로디지아 아니 지금은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라의 두 번째로 큰 도시 불라와요를 첫 번째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빈민촌이라고 할 수 있는 패러다이스(이름 한 번 역설적이다)의 양철집에 사는 달링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다. 이제 열 살 남짓한 달링은 치포, 갓노즈, 스티나, 배스터드, 스브호 같이 엉터리 영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과 부촌인 부다페스트(그녀도 한때 살았던 곳이다)를 습격해서 변비에 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아바 열매를 따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노바이올렛 작가는 한 소녀의 눈을 통해 백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3세계의 그늘을 유머스럽게 표현해내고 있다.

 

대학교육까지 받은 아버지는 남아공으로 돈을 벌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났지만, 돈은커녕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 살기 위해 엄마는 국경을 넘나드는 밀무역도 마다하지 않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낯선 사내를 집안에 들이는 일을 꺼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짐바브웨 일반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면 로버트 무가베라는 희대의 독재자가 통치하는 짐바브웨 국가는 엉망진창이다. 모두가 ‘변화’를 원하면서 투표와 선거라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지만 그들의 원하는 변화는 그들의 지도자가 언제 죽을까하는 고민처럼 요지부동이다. 백인 NGO 요원들이 나눠주는 구호물품을 애타게 기다리고, 자신들의 선행의 대가로 기념사진을 찍겠다가 덤벼드는 그들을 위해 미소 짓는 아이들의 기분이 어떨지 작가는 가감 없이 작품에 기술한다.

 

한편 달링의 친구 치포는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르는 배를 처치하기 선무당 친구의 낙태 시술을 시도하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나서기도 한다. 게다가 저주받은 질병인 에이즈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백인들에 대한 증오는 무고한 이들까지 아랑곳하지 않고 “블랙 파워”라는 기치 아래 폭도들이 날뛴다. 목사인지 심령술사 그것도 아니라면 예언자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레벨레이션스 비칭턴 음보로는 죽어가는 달링의 아버지를 치유하겠다고 터무니없는 액수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어린 소녀 달링은 모든 것이 총체적 난국 상태인 헬조선에 버금가는 헬짐바브웨를 떠나 포스털리나 이모가 자리 잡은 미국 디스트로이드미시겐으로 떠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고대하던 달링의 미국행으로 <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의 2부가 시작된다.

 

가난과 궁핍으로 점철된 짐바브웨에서의 생활도 그랬지만, 아프리카계 흑인이민자가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수십 년을 미국에서 살아도 합법적인 영주권을 얻지 못한 바스코 다 가마 삼촌이나 언어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포스털리나 이모의 고단하기 짝이 없는 삶을 보면서 소설의 주인공 달링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고향에 남은 엄마와 친구들은 젖과 꿀이 흐를 거라고 생각한 미국에 간 달링과 포스털리나 이모에게 달러와 온갖 자본주의 시스템의 산물들을 줄기차게 요구한다. 멜리카(아메리카)에 안착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진력하는 달링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달링에게 제2의 고향이 된 디스트로이드미시겐 캘러머주는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공간일 수밖에 없다. 내 것이 아닌 멜리카에서의 풍요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아웃사이더 서클을 맴돌며 어린 시절 훔쳐 먹던 구아바 맛에 군침을 삼키며 고국에 대한 굶주림을 달래는 달링의 모습에서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의미에서 문화적 융합 대신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21세기 이민자들의 모습을 노바이올렛 불라와요는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불라와요의 자전적 소설 <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는 확실히 재밌다. 한 때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라 불리던 멜리카(하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담보해 줄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에서 새출발을 원하는 이들의 미래는 어쩌면 요양원에서 갇힌 샤카 줄루의 최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너무 암울한 게 아니냐고? 물론 교육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완전한 아메리카나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소설을 통해 작가는 냉정하게 분석해낸다. 달링과 함께 했던 지난 3일은 너무 즐거웠고, 엄혹한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따스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잡아낸 불라와요의 작품에 찬사를 보낸다. 현재 회고록(memoir) 프로젝트 중이라고 하는데, 계속될 노바이올렛의 문학적 행진을 지켜볼 예정이다. 아, 그리고 역자의 번역도 훌륭하고 멋졌었노라고 전해라. “설교에 발동”을 걸고, “강냉이를 털”고 또 “목구멍에 불을 지”른다는 표현은 정말 걸작이었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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