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플린의 마지막 춤
파비오 스타시 지음, 임희연 옮김 / 가치창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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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에 대한 학기 리포트를 쓴 적이 있다.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을 뒤져 가며 당시 신문에 실린 영화 광고와 리뷰를 참고했고, 또 많은 참고서적을 찾아 공들여 리포트를 썼었다. 그런데 난 정작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는 보지 않았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리포트가 아닌 탓이었을까. 그리고 보니 난 개인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한 편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동안 영화에 미쳐 살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파비오 스타시의 <채플린의 마지막 춤>을 읽으면서 이 ‘소설’(중요한 포인트다)에 실린 글이 사실인지 아니면 작가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구인지 구분할 재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리뷰 쓰기에 앞서 고백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영화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영화는 기존에 존재하던 기술의 종합체였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가 축적해온 기술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빛이 빚어내는 예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19세기 후반에 들어 비로소 실버스크린에 영사기를 돌려 빛의 서커스를 담아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딱 맞춰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출신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등장은 막 시작되던 무성영화 시절 전설이 될 스타탄생의 예고편이었다. 파비오 스타시 작가는 보드빌과 니클로데온 그리고 래그타임 같은 음악이 유행하던 호시절의 찰리 채플린의 미국행에서 다양한 영감을 얻은 모양이다. 미국 여행이라는 통과의례의 과정을 통해 그저 그랬던 코미디 배우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체험하면서 대배우가 되기에 이른다.

 

그전에 앞서 사신(死神)을 등장시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 시절의 찰리 채플린이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죽음과 경주하는 아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그러니까 사신을 웃겨야 채플린은 살 수 있다. 그는 아직 어린 아들 때문이라고 둘러 대지만, 그가 회상하는 그의 삶은 살아남기 위한 질주였던 셈이다. 또 다른 장치로는 찰리 채플린이 영화배우 혹은 감독의 길을 걷게 되는 결정적 원인제공을 한 캐릭터로 만인의 연인이자 희대의 곡예사였던 에스터 노이만과 채플린의 주장대로라면 진짜 영화인 시네마토그래프의 발명가 아를르켕의 로맨스를 등장시킨다.

 

사실 아무리 봐도 허구로 보이는 찰리 채플린의 미국 주유기를 통해 훗날 자신의 무형의 자산이 될 체험 과정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유능한 복서로 다부진 체구의 그가 링 위에서 한 대당 5센트씩 벌었다는 이야기, 먹고 살기 위해 유대인 가게에서 사탕을 팔았다거나 혹은 인쇄소에서 비로소 문학 작품을 만나게 되는 과정, 어느 순간 열독하게 돼서 처음 연출로 데뷔하게 되는 과정에서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그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영국 출신으로 산업혁명 시절을 재현해냈다는 설정 등은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리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젊은 시절의 고난이 대배우가 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는 발명왕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사실은 특허권을 독점하고 이윤창출에 눈먼 자본가였다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영사기 역시 기존에 존재하던 기술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제 막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영화판에서 빛이 보기 시작한 찰리 채플린의 특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고 자신이 굳게 믿는 아를르켕이 사랑한 여인 에스터를 찾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모험에 또 한 번 나서게 된다. 사실 이 여정에서 그가 환상의 여인 에스터를 찾을 수 있냐, 찾지 못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과정 자체가 자신의 자아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성취이기에.

 

찰리 채플린 식 개그에 과문한 탓인지 모름지기 손에 땀을 쥐어야 한 절체절명의 사신 웃기기 시퀀스에서도 그다지 깊은 감흥을 받지 못했다. 작가가 그린 노고에 비해 독자의 제한적인 유머에 대한 상상력 때문이리라. <채플린의 마지막 춤>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 재미를 더하는데, 정작 마지막 롤에서는 너무 진중한 전개 때문에 피날레에 대한 흥미를 급감시켜 버렸다. 우리 모두는 이미 찰리 채플린이 88세가 되던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래 전 리포트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미국에서 볼셰비키로 몰려 추방당하고 타의에 의해 스위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파비오 스타시 작가는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그것 또한 작가의 영역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니 도리가 없다.

 

1세기 전 상황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아 옮긴이 주가 친절하게 등장하는 부분은 좋은데, 어쩔 경우에는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 때문에 책읽기의 흐름이 종종 멈춰지는 불편이 느껴졌다. 그냥 각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기와 엄청난 대성공에 막 진입하던 시절의 기록으로는 좋았지만, 찰리 채플린 삶 전반에 대한 글로는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사실과 허구가 서로 공존하는 소설구성이 어쩌면 평생을 희극 배우로 산 인물에 대한 헌사로 안성맞춤일 수도 있겠다는 감상으로 부족한 리뷰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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