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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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에서 꾸준하게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대산세계문학총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때로는 엄청난 분량 때문에(최근에 출간된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혹은 정말 처음 듣는 생소함, 그것도 아니라면 읽기 시작했지만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하는 다양한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 실패작으로는 에른스트 윙거의 <대리석 절벽 위에서>을 꼽을 수 있다. 다닐로 키슈의 책도 호기심에 사기는 했지만 아예 펴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니 중국 3대 문호로 손꼽히는 바진 선생의 신간 <휴식의 정원>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냉큼 사기는 했지만 독서는 요원하게만 느껴지던 차에 어제부터 읽기 시작해서 이틀 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아직까지 바진 선생의 다른 작품들과 만나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200쪽 조금 넘는 분량이라 다른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없었다고나 할까. <휴식의 정원>은 기본적으로 바진 선생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문인 라오리의 시선을 통해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청두에서 있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한 바구니에 꿰어 담아 만든 이야기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전쟁에 대한 일화는 공습경보 한 차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대후방이라고 칭하던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의 침략이 미치지 못하는 쓰촨 지방의 청두가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십 수 년간을 타지에서 떠돌던 소설의 화자 리 선생은 청두에 돌아와 잠시 호텔에 머물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소학교, 중학교 심지어 대학까지 동문한 친구 야오궈둥을 만나게 된다. 부친으로 받은 받은 전답이라는 경제적 바탕으로 특별한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유복한 생활을 누리던 지기에게 리 선생은 식객으로 신세를 지게 된다. 그리고 라오야오가 몰락한 양씨 일가에게 사들인 대저택에 위치한 “휴식의 정원(憩園)”에 머무르게 되면서 보고 듣고 직접 체험한 일들을 독자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역사시대 이래 유력자들이 문인들을 식객으로 보호해왔다. 예나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예술활동과 경제활동을 더불어 할 수 없었기에, 유복한 경제력을 지닌 이들이 예술가들의 예술활동을 지원하는 식객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인 우리의 리 선생은 비록 친구의 집에 얹혀사는 식객이긴 하지만, 염치를 아는 지식인으로 아랫사람들에게조차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리 선생의 인격에 대해 합격점을 주고 싶다.

 

그가 “휴식의 정원”에 들어오게 되는 첫 날, 아름다운 정원에 있던 동백꽃 가지를 꺾어 가려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소년은 저택의 이전 주인이었던 양씨네 셋째 나리의 두 번째 아들로 이름은 한얼이다.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당돌하게 자기주장을 펼쳐 보이는 이 소년의 가계에 얽힌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을 구성한다. 바진 선생은 조금 뜸을 들이면서 휴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얽힌 사람들의 일상과 미스터리를 조금씩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 바진 선생의 페르소나 리 선생의 창작욕을 섬세한 바늘로 찌르듯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은 친구 라오야오의 새부인 완자오화가 등장한다. 조용하면서 동양적 외모를 가진 전형적 현모양처의 화신으로 등장해서, 소설가 리 선생에게 왜 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글을 쓰지 않느냐고 되묻는 당찬 여성상을 들어내 보이는 결기가 인상적이다. 자고로 모든 예술가에는 예술혼을 자극하는 뮤즈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런 점에서 야오 부인은 훌륭한 독자이자 비평가가 아닐 수 없다. 첫만남에서 그녀의 웃음 덕분에 자신의 창작열의 매개였던 ‘알 수 없는 중압감’마저 덜어낼 수 있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그녀에게 들은 자아의 확장이라는 말은 큰 울림으로 작가에게 다가온다.

 

다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청장년의 혈기를 다스려낸 중년의 바진 선생은 인생을 관조하듯 휴식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동백꽃송이, 바닥에 떨어진 사기 주걱 같은 모양의 목련꽃에 대한 단상은 물론이고, 몇 마리의 귀찮은 파리와 모기에조차 섬세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작가의 타인에 대한 진정성과 인도주의 정신은 도박과 축첩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처자식에게 외면당한 양씨 집안의 양멍츠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과 아직 자아를 이루지 못한 십대소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한얼을 도우려는 모습에서 정확하게 포착할 수가 있었다.

 

한편, 늙은 하인에게 들은 미스터리에 대한 호기심이 야수의 날카로운 발톱처럼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야오 집안의 말썽꾸러기인 샤오후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식객인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 친구에게 말하는 수위를 조정하는 장면 또한 일품이었다. 바진 선생이 전개하는 몇 가지 이야기 군상 속에서 적절하게 자리한 균형이야말로 <휴식의 정원>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구성의 화룡점정으로 작가 개인의 일과 생활 그리고 작품마저 공허하고 허무하게 만드는 변화무쌍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싸우며 글쓰기에 매진하는 예술가(자신)의 고뇌까지 얹어 놓으니 그야말로 천의무봉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휴식의 정원’은 중국인들이 이상향으로 품어온 무릉도원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걱정과 근심 없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전쟁이라는 폭력의 극한 속에서도 그런 공간은 가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진 선생은 한 발짝 더 나가 그런 공간이라도 모든 가정이 가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톨스토이의 예언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내 주었다. 또한 작가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포기하지 않는 인도주의 이상(理想)과 희망이야말로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가치라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 번 핍진하게 그려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독서로 부족함이 없다.

 

[리딩데이트] 2014년 12월 21일 ~ 22일 오후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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