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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평점 :
천명관이 돌아왔다. 단언컨대 한국문학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는 <고래>의 작가이니 그의 책을 사지 않고 배길 방법이 없다. 재까닥 그의 책을 주문했다. 두말할 것 없이 단박에 읽었다. 제목이 야릇했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라니. 왜 육체노동자는 달려야 하고, 그의 손에는 칠면조가 들려 있어야 했을까.
2차 세계대전 후, 유래 없는 경제호황을 누린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불가피하게 순환되는 경제 불황과 호황을 번갈아 겪으면서 어느새 1980년대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운사이징이니 아웃소싱, 정리해고니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경제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1997년 IMF와 2008년 유동성위기는 신자유주의 경제론자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만인에 대한 투쟁을 외치는 효율과 경쟁만능주의 시대가 도래가 한 것이다. 이런 구호들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을 휩쓸기 시작했다. 소위 시카고학파라는 불리는 신경제주의 전도사들이 한국 경제를 주무르면서, 우리 사회는 가파르게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인 육체노동자 경구가 생뚱맞게 이방인들의 명절 식탁에나 오르는 칠면조를 들고 거리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결이 조금은 무리수라는 걸 알면서도 문득 그렇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싶었다. 교회에 열심인 아내와 자신을 외면하는 자식들에게 소외되고, 잘 나가던 운짱 시절 그놈의 노름 때문에 차마저 날려 먹은 경구에게 그나마 돈벌이를 할 수 있던 막노동마저 소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과시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 마지막 정의의 수호를 자처해야할 사법적 경계마저 허무는 막강한 능력을 지닌 돈/금전이 없다면 금전만능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발붙일 여지가 없는 법이다.
이어지는 <전원교향곡>은 각박한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귀농을 택한 어느 남자의 실패기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열의 아홉은 실패한다는 귀농에 대해, 철저한 준비 없이 무작정 귀농해서 농사를 짓다가 농사지을 품목에 대한 실패 그리고 인근에 들어선 돼지농장 때문에 한여름에도 악취 때문에 문을 열 수 없게 된 삶의 열악한 환경 등이 줄지어 열거된다. 문득, 성공과 실패가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경쟁만을 요구하는 사회의 생얼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인공 정환의 실패에 사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단 말인가. 그의 아들이 방치해둔 셰퍼드에게 물리는 대사고도 무책임하게 아이를 내버려둔 아이 아빠의 잘못이란 말인가? 지난 4월 진도 앞바다에서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아이들도 모두 유가족들의 책임이란 말인가. 사건 사고에 사회적 책임 대신 개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떠들어 대는 사이비언론의 선전선동이 이제 낯설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소설집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우이동의 봄>은 손자와 할아버지 간의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작가는 왜 아버지를 세대를 건너뛰었을까? 조국 근대화와 민주화에 있어 가장 자랑스러워야 해야 할 세대를 아예 삭제해 버린 게 못내 찜찜하다.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붙이자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하는 법, 나름의 공로도 있는가 하면 작금의 벌어지는 정의롭지 못한 사건의 근원에 자리한 총체적 문제에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지 않은가. 아버지와 아들이 일자리 경쟁에 나서야 하고, 그놈의 다양한 스펙을 갖추지 못해 일자리 경쟁에서 밀려난 청춘들은 비정규직을 연연해야 하는 현실을 누가 만들어냈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작고한 대통령을 실명으로 비난하면서도, 실제 투표에서는 그이가 불쌍해서 찍었단 말로 손자와 화해를 시도한다. 서툴지만, 해빙의 기운이 느껴지는 나름 따뜻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결말을 알고 나면 약간 섬뜩해지는 <핑크>에서도 우리의 육체노동자가 등장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장르적 특성인 미스터리를 차용한 작품으로, 역시나 정상적인 노동에서 소외된 대리운전기사 나는 영하 십도의 날씨에 추위에 떨며 자신의 수중에 몇 만원을 쥐어쥘 콜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만난 손님은 엄청 뚱뚱한 자태에 핑크색 옷으로 감싼 여인이었다. 핑크 여성과 히터도 틀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들추기 시작한다. 늦게 와이프를 만나, 그녀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그만 파산했다는 말에 핑크 여성은 남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남자가 그런 경제적 이유 때문에 소외를 당했다면, 핑크 여성은 순전히 자신이 가진 피지컬한 이미지 때문에 소외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미는 소외란 불청객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번 천명관 작가의 소설집에서 최고로 꼽은 싶은 작품은 바로 <동백꽃>이다. 문학적 클리셰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동백꽃>에는 유자, 동엽 그리고 경숙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가 축이다. 고깃배 몇 척을 부리는 구 회장네 아들인 동엽을 꼬셔 팔자를 펴보겠다는 일념으로 유자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엉덩이를 밑천 삼아 육탄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자신의 절친인 경숙의 늘씬한 몸매와 교태를 이길 수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경숙이 동엽의 아이를 가졌단 소식에 절망의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경숙의 완승으로 끝날 것처럼 두 여자의 임신 레이스는 동엽과 경숙이 ‘사교병’에 걸려 약을 복용 중이라는 소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유자의 입덧이 시작되면서 극적인 반전드라마에 도달한다. 이것저것 다 귀찮아진 동엽이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에, 유자는 배를 타고 떠나는 동엽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장면은 가히 천명관식 해학의 정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막장 드라마식 재미와 염통을 쫄깃하게 하는 반전 그리고 블랙유머 삼종세트가 환희의 축포를 쏘아 올린다.
사회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점점 신분상승의 길이 좁아져 가는 가운데, 양질의 일자리 획득 다시 말해 취업을 통한 사회참여는 난망한 주제가 되고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왜곡된 우리네 삶의 양태가 로또당첨 같은 획기적인 전환이 아니고서야 삶의 어느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불가피하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천명관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그런 운명에 대처하는 각각의 삶을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그 순간이 아니라고 안도할지 몰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책을 통해 만나본 소감이라고나 할까.
<고래> 이후 기대감에 부풀어 천명관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다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준 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작품을 전작읽기한 것도 아니니 전반에 걸친 품평은 지나치다 싶고, 후속작들이 데뷔작만 못하지 않나 짚고 싶다. 앞으로 새털 같은 시간들이 많으니, 계속해서 그가 그리는 정직한 세월의 흔적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