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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원정대
배상민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평점 :
나도 소녀시대를 좋아한다. 하지만, <조공원정대>의 삼총사처럼 걸그룹에게 조공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현실세계에 존재하지만, 굳이 내가 즐기는 하나의 판타지를 현실계까지 끌어내릴 필요가 있을까. 배상민 작가의 글은 바로 현실과 이상 혹은 꿈이 부딪히는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타격한다.
모두 8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배상민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을 아주 유쾌하게 읽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 현실을 유머스럽게 풀어낸 작가의 서사 창조 능력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만큼 가볍지 않고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가 구사하는 유머는 독자에게 바치는 작은 “조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조공을 밑천 삼아 작가는 한꺼풀 뒤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서사를 마음껏 풀어낸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우리의 사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한 그런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가 보다. 그저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었던 청년들에게 실업의 위기는 실존적이다. 자기 실업의 원흉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세계경제 악화 때문이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갑자기 임신한 여자친구와의 새출발을 앞두고 무언가 추억이 될만한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소녀시대를 직접 만나 조공을 드려보자는 결의를 다지고 말하지 않고도 ‘통’하는 친구들과 작당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들을 받아들인 도시는 절대 녹록치 않다. 결국 생계와 조공을 위한 선물 마련을 위해 토니, 제리 그리고 티파니라는 이름으로 삼총사는 도시 변두리에 곁가지를 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이유마저 상실한다. 뿌리를 상실한 그들은 아마 이끼처럼 그렇게 도시의 지표에 기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또 다른 경제위기의 여파로 획일화된 행복 추구와 가치판단이 판치는 동일한 세계에서 나는 야생마 같은 할리를 꿈꾼다.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 누군가 사전에 재단한 대로 S대학교, S전자 그리고 S라인을 꿈꾸는 삶은 얼마나 추레한가.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실업, 이별 그리고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경쟁에 내몰린 우리의 초상이 배상민 작가의 증언을 따라 구술된다.
이름 없는 수도권 대학 출신으로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법한 번듯한 직장에 둥지를 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유글레나>에서는 ‘소라’와의 불가피한 이별을 통해 구체화시킨다. 직장과 돈벌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연애도, 결혼도 그리고 육아도 마음껏 할 수 없는 소위 말하는 삼포시대의 비애를 유감없이 시전한다.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수치화해서 알려주는 유사 여자친구 소라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의 엄습 앞에 무장해제당한 화자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상민 작가판 창세 버전 <아담의 배꼽>은 전 인류의 필독서라 할만한 성경의 첫 번째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인간의 첫 번째 사회 조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카인의 눈물겨운 몸부림은 루빌치기라는 확대재생산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자신의 꿈, 아버지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네피림 출신의 나아마를 얻고 신을 만들어낸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아버지/신 되기에 도전한다. 자기만의 신화를 창조하고 싶은 창세 이래 DNA를 통해 유전된 수컷이 가진 꿈의 서술이다. 배상민 작가의 다시 쓰기는 창조신화뿐 아니라 현대판 영웅신화인 슈퍼맨도 아우른다. 다만 이 슈퍼맨은 우리가 늘상 봐온 그런 슈퍼맨이 아니라 대가를 받고 사람들을 돕는 이익창출형 슈퍼 히어로 되시겠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화된 경제위기는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도 피해갈 수 없다는 작가 나름의 분석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인류애를 버린 유사영웅에게 적이 생기는 건 필연적 귀결이리라.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은 바로 <미운 고릴라 새끼>다. 아버지 되기가 그 어느 시절보다 난망해진 시대에 자유연애를 즐기는 콩고의 보노보 원숭이 타령을 하며 룸싸롱에서 계란 프라이 마케팅으로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던 나는 두목의 여자를 건드렸다가 황천길에 나설 뻔한다. 부적절한 매력 때문에 넘보지 말아야할 터부를 깨다가 죽을 뻔한 일도 그렇고, 살기 위해 DNA 유전자를 쫓아 15년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은 신화의 재현의 다름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신의 근본마저 부정당한 마당에 새출발을 위해 계란을 싣는 “나”의 모습은 사뭇 숭고해 보인다. 기본적으로 비극이면서도,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는 적절하게 뒤섞인 유머의 조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다룰 수 있는 소재로 이런 재밌는 이야기의 얼개를 짜낸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너무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조공원정대>에 대한 나의 (독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지속적인 창작활동으로 보답해 줬으면 좋겠다.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