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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강희진 지음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강희진 작가의 두 번째 책을 읽었다.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그의 데뷔작 <유령>을 201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만났다. 리니지 서버에서 벌어진 내복단에 대한 이야기가 얼핏 기억나는데, 올해 새로 나온 그의 작품 <이신>은 400년 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패배의 기록인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작가가 제목으로 고른 <이신>은 주인공의 이름(이씨 왕조의 신하로 살라고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이자, 지금은 다른 왕(청나라의 실질적 건국자 홍타이지)을 섬기는 이신(貳臣)이라는 중의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벌써 제목에서부터 기구한 주인공의 운명에 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소설 <이신>은 인조반정(1623)과 정묘호란(1627) 그리고 병자호란(1636)이라는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는다. 우선 주인공 이신은 광해군의 경호대장으로 쿠데타가 일어나자 끝까지 왕을 호위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왕조 국가 조선에서 사대부가 들고 일어나 국왕을 갈아 치우는 쿠데타가 성공한 경우는 이전의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두 번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실패해서 역모로 규정되고, 연루된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은 졸지에 반정공신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오른다. 어찌 되었건 간에 왕이 되어 백성들을 평화롭게 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17세기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풍운의 시절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 때 거국적인 노력으로 왕조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준 명나라에 대해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하여 사대의 예를 다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명나라는 내부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북로남왜라 하여 외부에서 끊이지 않는 침략으로 국가의 존망이 그야말로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때마침 만주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와 그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중원 공략의 야욕을 불태우며 명나라 침략에 나선다. 이런 격랑의 시기에 조선은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인조의 앞선 광해군은 이런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를 구사하며 발흥하던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광해군 시절의 모든 정책을 부인하며 막강한 청나라를 오랑캐로 무시하며 오로지 천조국 명나라 섬기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 대한 후과가 바로 정묘호란과 뒤이은 병자호란이라는 희대의 국난이었다.
홍타이지의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으로 맹렬하게 저항하는 성들을 우회하여 조선의 수도 한양을 급습하여 결국 남한산성에 갇혀 농성하던 인조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 홍타이지는 우리의 주인공 이신을 조선에 자신의 대리인인 칙사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을 주무르게 된다.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사설이 길었다. 소설의 주인공 이신은 무관의 후예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무예를 배웠지만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철저한 반상제인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출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글공부마저 때려치운다. 인조반정으로 자신의 집안은 물론이고 사랑하던 연화의 집안마저 몰락하면서 평안도 산골로 피신하여 나름 행복한 시절을 구가한다. 이신의 이런 짧은 행복한 시절은 오래 가지 못하고, 정묘호란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고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는 청나라 고관들의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에서 전쟁터에 끌려 나갔다가 황제 홍타이지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면서 인생역전 드라마를 쓰게 된다. 물론 작가의 소설적 상상이겠지만, 역시 그럴 법한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홍타이지의 총신에서 죽을 죄를 지어 사형 당하는 순간, 특별사면을 받아 조선에 파견된 이신은 강화도 공략전에서 오랑캐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수많은 조선 부녀자들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것은 9년 전 압록강가에서 심양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느니 스스로 차가운 물속에 뛰어든 또 다른 죽음의 데자뷰였다. 탁상공론으로 국가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처와 딸들을 지키지 못했던 조선 사대부들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을 모욕하고 내쫓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사대부들은 입으로만 주자의 성리를 논했을 뿐, 실질적인 인간의 도리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녀의 절개를 지키라며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강상죄를 강요했다. 그에 비해 그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과거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겠다는 이신이야말로 비록 사대부는 아닐지라도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의 삶의 유일한 목표가 사라지는 순간 그의 인생유전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만 말이다.
황제의 칙사이자 자객인 이신의 눈부신 활약으로 잇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배후가 인조 임금에 대한 역모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한다. 신권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인조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노회한 권력가로서의 모습이 소설 <이신>에서 다채롭게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척화파의 대표주자 김상헌의 허언을 통해 그의 본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됐다.
영화 <광해>가 승정원일기에 빠진 보름치 부분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소설 <이신>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혼란한 시절에 대한 강희진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정확하게 세월호 사건의 그것과 겹친다. 심리적 트라우마가 완치되지 않은 시점에 만난 소설 <이신>은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더 의미있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