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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로베르토 볼라뇨 전작 읽기에 도전하고 있다. 작년 말에 그의 메타 소설 <2666>이 출간되었을 때, 주춤하던 볼라뇨 읽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냉큼 사서 읽기 시작했지만, 어마어마한 분량과 미지의 독일 작가 아르킴볼디를 추적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2666>의 두 번째 권까지 읽고 나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심정으로 볼라뇨의 초기작 <팽 선생>을 읽었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으로 처음 시작한 볼라뇨 읽기를 하면서 그의 작품 모두가 걸작은 아니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특히나 이번에 읽은 <팽 선생>은 더더욱.
실존했던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 소설 <팽 선생>은 1938년 프랑스 파리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데카당스하던 시절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볼라뇨와는 달리 당시 시대 배경에 무지한 독자로서 볼라뇨의 저작 의도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당시 파리에서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던 페루 출신의 시인 세자르 바예호의 죽음과 관련된 일단의 사건을 볼라뇨는 소설에서 재구성한다.
우선 화자는 제목에도 등장하는 최면술사 피에르 팽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베테랑 용사로 연금 생활자다. 한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쿠데타로 촉발된 인민전선 합법정부와의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8년,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 점증하는 파시즘의 위협이 당시 프랑스의 어느 병원에서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어가던 망명시인 세자르 바예호의 죽음과 묘하게 중첩된다. 지인이었던 레노 부인의 부탁으로 바예호를 치료해 보려고 하지만, 의사들의 집요한 방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페인 남자들’의 반협박에 가까운 매수에 팽 선생은 그만 넘어가고 만다. 이 과정에서 금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는 지식인의 유리알 같은 지조의 단면이 엿보인다.
현실과 비현실적인 상황을 넘나드는 최면술사 팽 선생의 위험한 줄타기에 솔직하게 몰입할 수가 없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가 없었다면(사실 가능하면 역자 후기는 읽지 않으려고 한다) 이 소설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소설 <팽 선생>을 통해 로베르토 볼라뇨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이다. 차라리 오독이라도 뚜렷한 내러티브가 보인다면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겠지만,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최면술사의 기묘한 체험이 주를 이루는 소설에서 지향점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볼라뇨의 <안트베르펜>에 이은 두 번째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스타일이나 문체 혹은 내러티브에 대한 작가의 지향점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음의 한 가지 변명이 될까 모르겠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파시스트 플뢰뫼르보두의 등장, 한 때 멘토로 생각하던 리베트 선생에 대한 피에르의 팽의 신랄한 비난 그리고 기욤 테르제프와 이렌느 졸리오퀴리의 기묘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에 연관된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피에르 퀴리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타살이었다는 플뢰뫼르보두의 주장과 그의 영매 분야 연구 이야기는 일견 황당해 보이기도 한다. 과연 플뢰뫼르보두의 주장이 사실일까? 아니면 흔하디흔한 음모론일까.
살아생전에 오직 세 권의 시집만을 출간한 세자르 바예호가 사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처럼, 그의 죽음을 다룬 소설 <팽 선생>을 쓴 볼라뇨 역시 그와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특히 다른 나라 언어로 쓰인 문학 작품에 야박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미국 시장에서 볼라뇨 신화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렇게 볼라뇨는 <팽 선생>에서 앞으로 그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주제인 파시즘의 점증하는 위협, 예술과의 복잡한 관계 설정, 비밀조직, 질병, 외로움 그리고 세상과 타협한 인간 군상의 모습 등에 초점을 맞춘다.
어느 개인의 죽음(세자르 바예호)을 당시 팽창하던 파시즘의 위협과 상대적인 민주적 질서의 붕괴 혹은 개인이 누려야할 자유의 소멸에까지 연결시키는 사고의 확장은 나같이 평범한 독자에게는 확실히 쉽지 않은 과제인 것 같다. 이조차도 로베르토 볼라뇨가 <2666>과 <야만스러운 탐정들> 같은 걸작으로 명성을 날리지 못했다면 그의 초기 작품 <팽 선생>과 만날 일도 없었으리라. 개인적으로 전작읽기에 도전하는 볼라뇨의 작품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