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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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로 일하던 미국 여성이 스위스로 여행을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골격근 마비를 거쳐 결국 전신 마비에 이르게 됐다. 한 번의 여행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금세 낫는 병이라면 모르지만 어언 20년을 병마와 싸워야 한다면, 주변에 있는 이들과 통섭은커녕 연락도 쉽지 않았으리라.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불현 듯 나타난 친구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달팽이였다.

 

초반의 전개는 정말 절망 그 자체로 다가온다. 건강함을 잃는 순간,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먹고 마시는,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영위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동작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도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순간, 저자 엘리자베스 토마 베일리의 친구가 숲에서 잡아다준 달팽이 한 마리는 그야말로 인생의 전환기를 마련해 주었다. 연체동물이자 복족류의 한 없이 느리게 사는 동물의 상징인 달팽이 한 마리가 어떻게 전신마비 환자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달팽이 안단테>는 그 과정을 아주 느리게 그리고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역시 어떤 상황에도 적용된다고 믿고 싶다. 저자의 날카로운 관찰은 그녀의 삶에 슬며시 침투해온 달팽이뿐만 아니라 자기 그녀 주변의 인간관계도 그대로 꿰뚫는다. 자신을 찾아오는 건강한 사람들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 같은 병자들이 의미하는 불확실성, 상실 그리고 죽음의 백척간두가 연상시키는 두려움이라고 적확하게 지적한다.

 

병세의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면서, 저자와 한 계절을 보낸 이름조차 짓지 않은 달팽군(암수 한 몸이니 적절하지 못한 별명이려나)이 무언가 사각거리며 먹는 소리에서 아마 이 책의 원제를 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었던가. 자신처럼 병원체에 감염되어 느리게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와 무려 5억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해오면서 포식자와 잔혹한 환경에 느긋하게 적응해온 달팽군의 그것이 다를 바가 없노라고 그녀는 담담하게 진술한다. 자신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 달팽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진 저자는 다양한 방면의 연구와 관찰 그리고 자문을 통해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친구가 흰입술숲달팽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일본의 하이쿠와 19세기 다양한 연구 기록을 남긴 박물학자들이 큰 도움이 됐음은 불문가지다.

 

한 없이 느려 터진 걸음으로도 다른 동물들에 붙어 하룻밤 사이에 놀라운 거리를 이동할 수도 있고, 포토벨로 버섯을 즐겨 먹으며 습지에서 여름잠을 좋아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4년 동안이나 겨울잠을 잘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관찰을 통해 치료 방법이 없는 경우에 인간도 휴면 상태에 들어가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의견도 저자는 조심스럽게 제시한다. 나도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크로코스모스>에서 농밀한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한 달팽이는 암수한몸으로 심지어 자가 수정도 가능한다고 한다. 그러니 짝이 없더라도 저자의 달팽군처럼 무려 118마리나 되는 새끼를 낳을 수도 있단 말이다.

 

경계 없는 자유를 갈망하던 저자는 달팽군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물론 병세가 조금씩 호전되어 가면서 병이 심각하던 시절처럼 지속적으로 녀석을 관찰할 수 없었기도 했지만, 모름지기 살아 있는 생명체는 원래 자기가 있던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달팽군과 117마리의 새끼 달팽이들을 원래 발견했던 숲으로 놔주고, 나머지 한 마리도 결국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외롭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라면, 한 마리쯤 데리고 있을 법도 한데 저자는 신념에 충실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달팽군으로부터 위로를 받아 이렇게 멋진 글을 썼다면 너무 빤한 인간 승리 스토리텔링이려나.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는 법이다. 후천성 미토콘드리아병/진드기매개뇌염에 감염되어 삶의 최전선에서 물러난 저자에게 달팽군의 존재는 특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없이 느리게 기어가는 달팽군의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보는 귀중한 시간이야말로 빠름증후군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달팽이 안단테>는 짚어준다.

 

 

[뱀다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을 비롯해서, 달팽이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이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 기회가 되면 구해서 하나하나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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