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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상점
조경환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3년 6월
평점 :
북경오리 요리를 먹어 보았는가? 트레이에 잘 조리된 오리고기가 실린 카트를 길다란 식당 주방장 모자를 정갈하게 쓴 요리사가 끌고 나와, 전병에 싸서 소스에 바로 찍어 먹을 수 있게 오리고기를 발라주는 모습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서비스가 끝나고 요리사가 돌아가기 전에 팁을 주어야 하지만 말이다. 이 장면에서 요리는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시식하기 전에 보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조경환 작가의 <북경상점>은 수백년 역사를 가진 북경(베이징)에서 노자호라 불리는 한다하는 상점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를 독자에게 풀어내준다.
역시 예상대로 도시 투어의 기본은 역시 먹거리 기행이라는 말처럼 작가는 북경에 가면 누구나 한 번 꼭 먹어봐야 하는 북경오리 전문점 이야기로 상점기행을 출발한다. 북경 제일의 오리요리 전문점이라는 <전취덕>이 일번타자로 등장한다. ‘천하제일루’라는 명성이 부끄럽지 않게 가게 앞에 줄지어선 손님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겨 있다. 역시 학자답게 <전취덕>의 유래에서부터 ‘덕’자의 필획이 하나 빠진 사연을 추적하는 장면에서는 감탄이 절로 피어났다. 그렇다고 상점 소개에 꼭 필요한 위치나 단가 그리고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독자를 위해 무얼 먹으면 되는지까지 자세한 소개가 줄줄이 이어진다. 과연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전취덕>의 오리요리는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던 강희건륭 연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맥 요리 전문점 도일처 이야기도 일품이다. 산서성 출신 왕서복이라는 이가 세웠다는 도일처의 자랑거리인 소맥 요리는 만두 비스무레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752년 당시 황제였던 건륭제가 직접 소맥 요리를 맛보고 그때까지만 해도 현판이 없던 가게에 <도일처>라는 현판을 직접 하사하면서 가게가 흥했다고 했던가. 가게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청동 조각상을 보며, 역시 대륙 스타일이지 싶었다.
차 한 잔에도 정성을 다하는 중국인들의 면모가 엿보이는 오유태찻집을 비롯해서, 왕족과 대신들의 신발을 짓기 위해 2100번의 바느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내연승, 100% 수작업만을 고집한다는 모자전문점 성석복 그리고 한 번에 8,000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쇄양육(양고기)을 접대할 수 있다는 동래순 등 북경 상가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전문 대로와 대책란 거리에 포진한 유구한 역사의 ‘노자호’들과의 만남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우정을 제외하고는 못 자르는 것이 없다는 왕마자 상점의 ‘검은 호랑이’ 가위는 정말 탐이 났다. 언제 북경에 가게 될진 모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가위만큼은 꼭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짜장면이 된 북경식 원조 작장면 이야기에선 귤이 회하를 건너 탱자가 되었노라는 고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어지간한 맛집 블로거를 뺨치는 요릿집 소개도 일품이었다.
조경환 작가의 상점방문기를 읽으면서, 어떤 상점이든지 단순하게 좋은 물건을 취급하고 친절한 서비스로 고객을 접대한다는 기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20세기 기술문명의 시대가 속도전 같은 생산시대였다면, 21세기는 바야흐로 개별적 소통을 중심으로 한 소비시대로 규정할 수가 있겠다. 새로운 소비시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작가가 초점을 맞춘 서사(스토리텔링)이 아닐까? 모주석(마오쩌둥)과 주총리(저우언라이) 그리고 좀 더 시대를 올라가 강희제와 건륭제 그리고 곽말약의 에피소드가 얽힌 가게라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왜 작가는 이 책에 소개된 노자호를 중국식 이름이 아닌 한자 독음으로 굳이 표기하는지 궁금했는데, 말미에 실린 글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중국에서 100% 수작업으로 칼을 만드는 명장(名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제는 세계 G2 국가로 성장한 중국에서 만든 제품이 싸구려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장인 정신이 빚어내는 정성이 깃든 상품에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됐다. 북경마니아의 ‘노자호’ 순례기를 통해 그동안 모르고 있던 중국의 비물질 문화유산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