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1
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 북인더갭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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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년의 마지막 즈음에 독일에서 99명의 저명한 소설가, 평론가 그리고 학자에게 20세기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100권을 선정했다. 그 중에서 1위에 오른 작품은 독일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토마스 만이나 프란츠 카프카가 아닌 조금은 생소한 이름의 오스트리아 출신 로베르트 무질이 쓴 <특성 없는 남자>라는 작품이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제치고 당당하게 독일 문학 1위에 올랐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번에 북인더갭을 통해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를 통해 20세기 독일 모더니즘의 고전이 된 예의 작품과 만날 수가 있었다. 아 그런데 모더니즘 소설이라고? 엄청난 분량만큼이나 이 책을 읽을 독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할지어다.

 

오스트리아 케른텐 주 클라겐푸르트 출신의 로베르트 무질은 필생의 역작인 <특성 없는 남자>를 1921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해서 1942년까지 계속해서 썼고, 결국 미완성 원고로 남긴 채 작고했다. 무질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울리히는 명백하게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이전 세기에 유럽 대륙을 질풍노도처럼 누볐던 영웅 나폴레옹을 흠모하며 기병학교에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하였으나, 자신이 그저 한낱 모험을 쫓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번에는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문명을 선도하는 기술자의 길에 도전한다. 기술자로서 자유나 광활한 사유보다 예의 전문성에 매달리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이번에는 수학자가 된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주변환경과 주변 인물들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 울리히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가진 특성을 포기함으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현세의 기쁨을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32살의 청년 울리히를 그의 창조자 로베르트 무질에 그대로 등치해도 무방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문학적 감성보다는 규율 혹은 논리적 사고를 가진 저자가 어떻게 해서 소설가가 되었을까 라는 점이 궁금하다.

 

‘결정적 사유’의 개척자답게 울리히/로베르트 무질은 독자가 기대하는 평범한 서사 구조가 아닌 울리히 개인의 내부에 침잠한 광활한 사유를 무한대로 퍼올리는데 주력한다. 유럽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 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3년 8월, 그가 살던 카카니엔(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수도 빈(Wien)은 다양한 사상, 철학 그리고 예술의 중심지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손꼽히는 프로이트를 필두로 해서, 비트겐슈타인, 클림트, 실레, 쇤베르크로 대변되는 사실상 유럽의 문화수도였다. 수도 빈이 품고 있던 이런 문화적 다양성은 주인공 울리히가 만나고, 소설의 전개에 따라 차례대로 소개되는 주변 인물들과의 접점을 통해 로베르트 무질이 구사하는 사유 속에 그대로 녹아든다.

 

소설 속의 울리히는 스스로에게 현실감각을 박탈하고, 특성 없음을 자신의 캐릭터로 삼기 시작하면서 현세의 어떤 확실한 기쁨을 제거해 나간다. 과연 어떤 특성도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쩌면 특성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성이 되는 건 아닐까? 울리히가 세 명의 부랑아와 마주쳤을 때 모든 사물이 경계(적대)를 통해 존재한다는 사유의 전개도 흥미롭다. 적대적 개념쌍이 아이러니하게도 존재의 이유가 된다니, 발상의 전환이 놀랍기만 하다. 세 부랑아는 그런 차원에서 그에게 적대적 위협이 아닌 ‘구원’이었다.

 

소설의 구심점 중의 하나로 작용하는 저물어 가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자는 다소 모호해 보이는 ‘평행운동’이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카카니엔의 황제가 1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신사조에 대항하는 구질서 회복 운동 정도로 규정해야 할까. 개혁에 반동해서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시대착오적인 모습의 이 운동은 주창자인 라인스도르프 백작 또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없다. 어쩌면 수십년 뒤에 이웃나라 독일의 병합되어 자발적인 병영국가(garrison state)의 원형질을 제공하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앞선 예단일까.

 

개인의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해, 가정, 지인, 병리적 사회현상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로베르트 무질은 끊임없이 사유의 확장을 시도한다. 확실히 서사보다는 사유에 방점을 찍은 그의 기술은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이 또한 이 탁월한 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인 것일까?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읽어 가지만,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자의 복잡한 사유의 전개를 쫓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무질의 사유를 이해하기란 난망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너무 세세한 것에까지 ‘결정적 사유’를 발동시킨다면 독서의 진도가 나가지 않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특성 없는 남자>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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