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나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어려서 읽은 헤딘 전기와 1980년대 제작된 NHK의 다큐멘터리 <실크로드> 30부작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도 <실크로드>의 주제음악을 담당한 뉴에이지 음악가 기타로가 연주하는 오카리나의 신비롭고 영롱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이 나왔다는 소식에 보지도 묻지도 않고 일단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사들인 지 한 달 정도나 지나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역사소설 <둔황>에 몰입돼서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노우에 야스시는 주로 산문시를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국내에는 이번에 소개된 <둔황>을 필두로 해서 푸른 이리’ <칭기즈칸><빙벽> 같은 소설이 소개되었다. 전후작가로 일본의 경제부흥이 본격적인 궤도로 접어들던 1950년대 말에 <누란>에 이어 발표된 <둔황>은 우리에게는 천불동 혹은 막고굴로 알려진 둔황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송나라 시대 고관대작을 꿈꾸며 요즘 고시에 해당하는 진사시험에 응시한 32살의 조행덕은 과거의 마지막 관문인 황제와의 전시를 앞두고 그만 잠이 들어 버린다. 그야말로 꿈이 되어 버린 출세의 희망을 접은 행덕은 송나라의 수도 개봉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서하 여인을 구해주고는 알 수 없는 서하 문자가 적힌 천 조각을 하나 받아든다. 이 천 조각의 서하 문자가 그의 운명을 서역으로 향하게 만든다.

 

태조 조광윤 이래 문인우대 정책을 펼쳐온 송나라는 북쪽으로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그리고 서쪽으로 탕구트족(당항족)의 나라 서하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유목민족 국가인 요나라와 서하는 송나라의 변경을 끊임없이 침략했다. 역사에도 등장하는 서하의 지도자 이원호는 송나라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서하의 판도를 넓히는데 전력한다. 서하와 송나라의 대치국면이 일촉즉발로 치닫는 가운데, 주인공 행덕은 서하 문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월경하고 서하군의 포로가 되어 전장에 투입된다.

 

과거시험 공부를 하던 행덕은 전장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사로 탈바꿈한다. 같은 한족 출신으로 서하군의 선봉장인 주왕례, 감주 공략전에서 구한 이름 모를 위구르 왕족 출신의 여인, 과주절도사 조연혜 그리고 우전왕국 출신의 상인 위지광과의 운명적 만남을 통한 행덕의 인생유전을 이노우에 야스시 선생은 소설 <둔황>을 통해 절절하게 그려낸다.

 

한 때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행덕은 한때 사랑한 위구르 여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조국 송나라를 그리워하면서도, 딱히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는 나그네로서의 운명에서 허무주의의 짙은 향기가 났다. 생사가 갈리는 전쟁터에서도 그는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도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주왕례의 이원호에 대한 반란으로 서하군의 침공이 임박한 사주(둔황)의 불교 경전을 보호하기 위해 위지광이 제안한 천불동으로의 피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던 걸까?

 

모두 11장으로 이루어진 소설 <둔황>은 조행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쟁이 휘몰아치던 11세기 서역을 무대로 한다. 한나라 무제 이래, 하서지방의 서역경영은 중원제국의 숙원인 동시에 변방의 토번(티베트)이나 위구르 같은 소수민족에게도 동서교역로 장악이라는 차원에서 꼭 필요한 정책이었다. 서하 왕국의 풍운아 이원호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군사행동을 일으켰고, 필연적으로 송나라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이런 당시의 국지적 분쟁을 바탕으로 해서 조행덕이라는 인텔리겐치아이면서 동시에 로맨티시스트인 가공의 주인공을 기용한 역사소설을 전개한다. 주왕례나 위지광 같은 조연들과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주인공 조행덕은 위대한 인류문화 유산(천불동의 불교 경전)을 보호한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마지막의 11장에서는 20세기 초 실제로 천불동의 불교 경전 발견에 대한 사실을 다루면서, 시대를 앞선 팩션 장르를 선보이기도 한다.

 

소설 <둔황>은 실증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개에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두 마리 토끼사냥에 나선다. 예를 들어, 이원호의 후처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구르 여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주왕례가 어떻게 해서 그녀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리고 위지광이 왜 그렇게 그 목걸이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설명의 부재가 조금은 아쉬웠다. 조행덕의 사주공략전 이후의 모호한 행적도 마찬가지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평이하면서 간결한 문체 덕분에 소설 <둔황>을 통해 책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생소하기 짝이 없는 중세 서하 왕국의 흥망을 통해, 둔황 막고굴의 비전된 경전의 유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오래전에 고려원에서 나온 이노우에 야스시의 <누란>도 이참에 복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새로운 작가의 발견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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