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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무덤의 남자
카타리나 마세티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 같은 수작(秀作)을 만날 때가 있다. 지난 주말에 우연히 집어든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가 그랬다. “옆 무덤의 남자”라 직관적으로 여성작가가 쓴 글이겠거려니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북구의 나라 스웨덴에서 날아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달달한 로맨스 소설은 봄날에 슬그머니 기지개켜는 연애감정처럼 그렇게 슬그머니 찾아왔다.
레퍼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어느 날, 묘지의 무덤에서 만난 서로 태생과 배경이 상이한 두 남녀가 티격태격 치고받는 가운데 사랑을 꽃피워 간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위의 간략한 요약에서 나왔듯이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이다. 여주인공 데시레 발린은 최근에 남편이자 조류학자인 외지란을 자전거 교통사고로 잃어 매일 같이 묘지를 찾는다. 그 옆 묘지에 영면한 어머니를 찾아 꽃을 심는 “탱고왕” 벤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두 주인공 모두 사랑하는 이를 상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런데 왜 하필이면 묘지에서 싹트는 로맨스라니, 배경이 낯설고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사랑은 그야말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까라는 말로 넘어가자.
쇠똥 냄새가 그윽하게 나는 시골에서 스물네 마리의 젖소와 씨름하며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천연기념물’ 벤니와 세련된 도시에서 자크 라캉의 철학을 논하며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며 남편과 논쟁하기를 즐겨하는 데시레의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데 문득, 그 반대의 경우를 상정해 보며 혼자 미소 짓는다. 도시 남자가 시골 여자를 만나면 그림이 어떨까 하고 말이다. 하긴 그렇게 된다면 전형적인 막장 드라마의 재벌 2세 스토리로 흐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찾아든다.
어쨌든 데시레와 벤니는 상대방을 품으려는 노력 대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주고, 상대방의 양보를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아니 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이기적이었던가? 단 하루라도 자신이 돌봐 주면 안되는 젖소들과 자신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골 농장을 팔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희멀건 새우’의 품에 투항하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벤니의 결심은 새우의 ‘바캉스 미소’를 보는 순간 봄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쑥쑥 낳아 주고, 소젖을 짜거나 건초 더미를 날라주는 일을 거들고 푸짐하고 맛좋은 미트볼을 만들어 주길 바라는 벤니의 기대를 데시레는 도저히 채워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야말로 ‘난자가 공중제비’를 돌며 원하는 벤니를 놓치고 싶지 않는 데시레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카타리나 마세티의 ‘he said, she said’ 스타일의 교차서술로 형상화된다.
이 재미진 소설을 읽으면서 호모 사피엔스 종의 남녀라는 개체는 어쩌면 지구인과 화성인처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시크한 도시여자의 전형 데시레에게 쇼핑은 백화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 카탈로그로 하는 것이고 나중에 대금만 지불하면 된다고 철썩 같이 믿는 벤니의 촌스럽기 짝이 없는 선물이 먹히는 게 정말 경이로웠다. 다만, 연애의 과정에서 ‘자극’은 일회성일 뿐 반복은 아니라는 점을 벤니가 몰랐을 뿐이다. 데시레가 골라주는 셔츠를 입고 다니다가는 수많은 프러포즈를 받게 될 거라는 벤니의 푸념에 섞인 유머는 최고였다. 다만, 그 프러포즈의 주체가 여자가 아니라는 남자일 거라고.
<옆 무덤의 남자>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공간인 스웨덴을 배경으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이러저러한 갈등을 그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마당에, 시골 농장을 지키며 가업을 잇겠다는 전업농부 벤니의 사고가 어쩌면 고루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생을 농장 일만 하며 살아온 벤니가 데시레의 서식처인 도시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데시레는 벤니의 중학교 시절 성적표를 보고 나서, 그의 뇌관을 폭발시킨다. 자신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으며, 상대방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면서도 삶의 어느 순간에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걸 데시레와 벤니는 몸으로 격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한참 책을 읽다 그런데 카타리나 마세티가 어쩌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평범한 연애소설을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는 성찰에 다다랐다. 호모 사피엔스는 홀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 아니면 남녀 간에 서로 극복할 수 없는 그 놈의 지긋지긋한 성격 차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저 사랑하고 싶다는 그들의 감정이 아닐까 추론해본다. 상실로 정형화된 과거를 뒤로 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사랑의 묘약은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그렇게 우리는 ‘슬기로운 (도구의) 인간’[Homo sapiens]이기 보다 ‘사랑의 인간’[Homo amor]가 되고 싶은 거겠지.
아, <옆 무덤의 남자>는 결말의 알쏭달쏭한 데시레의 황당한 제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데시레와 벤니의 2차전이 곧 출간될 속편 격에 해당하는 <가족무덤>(가제)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그러니 기대하시라. 아, 그리고 보니 나도 라캉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나는 시골쥐에 속하는 호모 사피엔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