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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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즉석에서 연극으로 재현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녀의 역할을 바꿔서 두 아마추어 배우가 열연을 펼쳤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책으로 그전에 읽었던가? 다독가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는 모두가 다 아는 유명한 책이어서, 실제로는 읽지 않았으면서 그 내용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다 앍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읽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오 헨리의 단편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어디선가 다 한 번쯤은 접해 본 이야기의 원전이 바로 김욱동 교수님의 번역으로 비채에서 새로 출간되고 있는 <모던&클래식> 시리즈 중 <오 헨리 단편선>에 오롯이 실려 있다.

 

언젠가 김경욱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왜 굳이 장편보다 단편을 고집하느냐는 질문을 들은 기억이 난다. 장편소설 옹호론자 입장에서는 짧은 단편이 장편보다 더 쓰기 쉽지 않겠냐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짧은 분량을 통해 독자의 확실한 시선을 사로잡고, 그들에게 진한 페이소스(pathos)를 남겨 주기 위해서는 단편 소설에 더 내공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난 세기 초 미국에서 화려하면서 강렬한 10년의 작품 활동기간을 보여준 오 헨리야말로 진정한 단편 소설의 대가(大家)라는 호칭이 딱 어울릴 것이다. 우선 그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주로 화려하면서도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는 대도시다. 특히 뉴욕 같은 대도시에는 화려한 전기 불빛만큼이나 어두운 밤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바로 느와르적인 밤거리야말로 도시의 화려함을 대조적으로 더 빛나게 해주는 요소가 아닐까.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로 넘실대는 대도시의 이야기야말로 오 헨리의 화수분처럼 넘치는 소재의 원천이었으리라. 평소에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엄청난 비용의 호텔에 체류하는 귀부인의 꿈을 동경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의 이야기에서, 너무 가난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구하지 못해 결국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야 했다는 그야말로 도시 전설의 비애, 매서운 겨울바람 앞에 매달린 가녀린 이파리에 희망을 거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야말로 세기를 지나도 독자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오 헨리는 그런 감동에 더해 때로는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미한 미스터리로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지방 도시인 테네시 내슈빌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어느 도시 보고서>는 빌 머레이 주연의 <그라운드혹 데이>를 떠올리게 한다. 자기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이 관계한 이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지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때로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독자를 인도하거나 <어느 도시 보고서>처럼 좀 뜸을 들이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테크닉은 역시 고수답다.

 

돈을 털러 왔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류머티즘에 시달리는 고객(!)과 죽이 맞아 한 잔 사겠다고 제의하는 멋쟁이 도둑님의 모습에서 그리고 사업 밑천을 벌기 위해 어느 마을의 말썽꾸러기를 납치했다가 된통 혼이 나고 오히려 아들의 아버지에게 돈을 줘가면서 도로 넘겨주는 희비극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다. 이십년 후에 성공해서 만나자는 어릴 적 친구의 약속에 우선하는 청교도적 정의감은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된 미국적 가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오 헨리의 단편선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 대가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 어느 곳의 독자에게서나 같은 질량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구나하는 점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는 기시감에 준거한 만족감을 그리고 조금 생소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광휘를 발하는 다양한 이야기는 그만큼 매혹적이다. 곁에 두고 생각날 적마다 뒤적이고 싶은 그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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