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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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마저 읽기 전에 오늘 도서관에 가서 정병설 선생이 역사비평에 기고한 논문을 읽었다. 내가 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게 된 건 순전히 수백 년 전, 누가 봐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을 사이에 둔 두 선생의 논전(論戰) 때문이었다. 지아비 사도세자의 죽음을 외면한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과 정병설 선생의 비판을 담은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읽어야 하지만, 심정적으로 나는 이덕일 선생의 주장에 마음이 간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이덕일 선생은 자신의 원자이자 대를 이어갈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 영조의 콤플렉스의 뿌리를 찾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연잉군이던 왕세제 시절, 집권 여당인 노론에게 택군’(擇君)되어 독살되었다는 풍문에 휩싸인 경종을 대신해서 조선조 최장수 집권 기록마저 갈아치운 군주에 등극한다. 이것이 눈물이 많고,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였던 영조의 첫 번째 콤플렉스였다면 두 번째 콤플렉스는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가 천인 출신이라는 핸디캡이었다(드라마 <동이>의 여주인공 한효주를 생각하면 되겠다).

 

효종 이래 삼종의 혈맥을 잇고, 왕위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후계자 원자의 생산이 영조에게는 꼭 필요했다. 말로는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군주로 선택한 노론의 편이었던 영조는 사십대에 기대하던 원자를 얻는다. 어려서 성군의 재질을 보여주었던 사도세자는 15세부터 대리청정에 나서 영조와 함께 국가경영에 나선다. 하지만, 세자가 소론에 기울었다는 사실을 안 군주의 권위는 도대체 인정하지 않는 채 기득권 유지에만 여념이 없던 노론은 사도세자를 정적으로 규정하고 사사건건 맞서기에 이른다.

 

나주 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으로 조정 내의 소론 세력이 일소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친가인 풍양 홍씨 집안을 대표하는 홍봉한이 주도하는 노론 주도 하의 정국이 전개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임인옥사 시절 역적의 수괴로 지목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영조는 이 결정적인 두 개의 사건을 계기로 세자와 반목하게 된다.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눌 수가 없다고 했던가. 세자의 관서행, 항간에 떠돌던 광태과 난행 같은 속설 그리고 태조-효종의 무인 기질을 이어 받은 사도세자의 친위 쿠데타를 두려워한 영조는 마침내 사도세자를 뒤주 안에 가두어 죽이기에 이른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다. 절대군주에게 언론의 통로가 되어야할 삼사가 모두 노론에게 장악되고,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마저 자신의 당론의 이해 때문에 곡필을 주저하지 않았던가. 군주의 교체라는 방법으로만 정권 교체가 가능했던 시절에, 집권당파와 색깔이 다른 군주의 등장은 멸문지화의 단초였다. 사도세자가 마지막 순간에 S.O.S.를 친 사람은 노론 실력가이자 장인이었던 홍봉한이 아니라, 형수 집안사람인 조재호였다. 홍봉한을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으로 설정한 이덕일 선생은 영조가 죽고 나서, 정조가 등장했을 때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풍산 홍씨들의 적극적인 역모 모의에 초점을 맞춘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광증 때문에 죽였다고 <한중록>을 통해 역설하지만, 이덕일 선생이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에서 전개하는 논리에 따르면 살아생전에 사도세자가 보여준 모습은 도저히 광인의 그것으로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지아비나 국가보다 자기 집안의 안위를 걱정한 노회한 노론 정객의 면모만이 보일 뿐이다. 아들인 세손까지 나서서, 아비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영조에게 읍소하는 마당에 혜경궁 홍씨와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왜 목숨을 걸고 혹은 단식을 해가면서 영조에게 탄원하지 않았던가. 사건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이들의 행동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긴 마찬가지다.

 

임오화변에서 자신의 행동과 홍씨 집안을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이덕일 선생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는 그래서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249년 전에 벌어진 왕실가족의 비극에 대해, 지금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하나의 기록에서 이렇게 상이한 해석을 유추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과 지난 여름에 읽은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통해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인조반정 이래 신하가 왕조국가의 군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게 되면서 신권이 군권을 능가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강성한 신권의 중심은 바로 노론이었다는 것이다. 노론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국왕의 나이가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왕세제를 세울 것을 강요하는 기존의 종법제도에 반하는 당시로서는 대역죄를 범했으며, 무수한 고변과 옥사를 통해 반대파를 살육하고 숙청했다. 택군은 물론이고 살군(殺君) 기도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국왕에게 도달하는 민의의 언로를 틀어막고 왜곡했다. 군주나 백성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아무 의미도 없다지만, 조선조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치세가 그의 할아버지만큼만 되었더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책을 읽게 된 네 가지 이유 중에서 두 개가 풀렸다. 이주한 선생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한중록>을 읽어야겠다. 물론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각 자료와 국역 영조실록과 사실관계를 대차대조해보는 수고도 마다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 사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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