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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그 유명한 사메지마 형사가 등장하는 <신주쿠 상어>(제목 한 번 기가 막히게 뽑았다) 이전에 오사와 아리마사에게는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이 있었다. 주인공은 방년 17세의 사이키 류, 고3인 이 녀석은 공부해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무슨 요행수로 도쿄대에 입학할 궁리만 한다. 사이키 인베스티게이션의 사장이자 아버지 료스케는 이런 아들을 말릴 생각은 안하고 맞담배질도 마다하지 않고, 알바로 애용한다.
어쨌든 실력은 인정받았는지 이런 사이키 듀오에게 일감이 주어진다. 동남아 라일 왕국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올 예정인 미오 왕녀를 호위하라는 주문이다. 어떻게 감을 잡았는가? 그렇다 17살 동갑내기 류와 미오의 달달한 로맨스가 이 탐정물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 중의 하나다. 미오 왕녀 아버지 국왕은 암에 걸려 임종이 다가오면서 왕위계승권 문제로 온 나라가 법석이다. 천연자원 부국인 라일 왕국의 유력한 왕위계승자를 노린 암살단이 그녀의 일본 입국과 동시에 활동을 개시한다.
아, 한 가지 깜빡했다. 미오 왕녀의 어머니는 일본 출신 하나코 여사로 미오 역시 어머니의 모국어에 능통하다. 그러면 그렇지, 그 정도 설정 없이 탐정물을 쓸까! 공항에서부터 불의의 독침 공격을 받은 미오 왕녀를 료스케는 의외의 장소로 피신시킨다. 바로 친구가 운영하는 러브호텔이다. 사이키 부자의 철통 보안에도 불구하고, 미오 왕녀를 노린 공격은 멈추지 않는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저격수 드릴과 폭발물 전문가 퓨즈까지 그녀의 목숨을 노리고, 라일 왕국 정글에 위치한 카마르 교단이라는 비밀종교집단까지 미오 왕녀에게 덤벼든다. 자, 이 철부지 탐정 알바는 어느새 사랑에 빠져 버린 미오 왕녀를 구해낼 것인가.
장르물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에는 일본 경제에서 버블이 터지기 직전의 자신감이 배어 있다. 1980년대 세계 경제를 주무르던 일본 기업의 엄청난 흑자 행진에 힘입어 쇼와시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점령하려던 동남아 제국에 경제협력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진출하던 일본의 모습이 읽혔다. 일부다처제 국가의 국왕이 일본이 왕비를 맞아, 왕녀를 낳고 그녀가 어머니의 나라 일본으로 유학을 온다는 설정이 이 점을 뒷받침한다. 영국이 자국의 식민지 국가였던 나라들을 영연방이라는 이름의 큰 테두리에 엮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변종이라고나 할까.
면허도 없는 고등학생 사이키 류가 다양한 차종을 모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고도로 훈련된 킬러들과 라일 왕국의 비밀경찰과 맞서 싸우는 장면은 영화 <다이 하드>에 나오는 브루스 윌리스 찜 쪄 먹을 만한 허풍이다. 게다가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입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첫눈에 반하다시피한 순진한 왕녀를 구하기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라일 왕국의 정글로 뛰어드는 건 정말 현대판 돈키호테의 다름 아니다. 하긴 일본에서 라일 왕국으로 가기 전에 며칠 집중적으로 들은 미군 방송으로 영어 실력을 늘리는 걸 보면 사이키 류의 도쿄대 진학이 마냥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개인적으로 주인공 사이키 류보다 더 눈길을 끄는 캐릭터는 바로 그의 아버지 미스터 사이키 료스케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어떤 수를 내어, 척척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에선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원래 아들 류가 자신의 보조 역할이었는데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사이드킥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역시 연륜이 주는 경험은 철부지 아들 류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작가 오사와 아리마사는 탐정물의 공식에 충실하면서 영화 <로마의 휴일>을 연상시키는 달달한 청소년들의 로맨스는 물론이고, 정글에서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게릴라를 맛보기로 첨가하고 비밀종교집단까지 아우르는 스케일에 그만 반해 버렸다. 철부지 알바 탐정의 활약이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속도감 넘치는 전개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