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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에 <검은 계단>을 접했을 때, 사실 무슨 내용의 책인지 몰라 읽기가 조금 망설여졌다. 단순한 미스터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내 짐작과는 달리 첫머리를 조금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읽기 시작했을까 하고 바로 후회했다. <검은 계단>은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진 루이 샤를, 루이 16세의 황태자이자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직계 후손 루이 17세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루이스 베이어드는 200년 전부터 이미 미스터리였던 이야기에 실존인물인 프랑수아 외젠 비도크를 기용해서 멋진 틀을 짜낸다.
“괴도 루팡”과 훗날 숱한 탐정의 모델이자 쉬르테(범죄수사국)의 창시자로 알려진 비도크는 당시 이미 전설이었다. 그가 떴다는 말만 듣고도, 범죄자들이 오금을 저렸다는 전설이 책을 통해 확인된다. 하지만, 자그마치 2만 명이나 되는 범죄자를 소탕했다는 비도크만으로는 픽션을 이끌어 가기에 버거웠는지 작가는 엑토르 카르팡티에라는 가상의 인물을 덧붙인다. 엑토르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창녀에게 가산을 탕진하고 하숙집을 운영하며 의과대학에 다니는 쁘띠 부르주아 청년 카르팡티에는 자신이 미처 모르고 있던 과거의 퍼즐을 비도크의 도움으로 채워 넣기 시작한다. 허구와 실재의 묘한 조화는 <검은 타워>를 읽는 키포인트 중의 하나다.
때는 1818년.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의 제정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의 시대를 맞이한 파리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그야말로 수상한 시절을 체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숨 가쁘게 전개된다. 난데없이 발생한 살인사건은 엑토르와 비도크를 잃어버린 역사의 미스터리 “루이 샤를” 찾기로 인도한다. 혁명기간 동안 성난 군중은 절대 군주 루이 16세와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지목된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낸다. 그런데 그들의 왕위계승자인 ‘도팽(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샤를은 어떻게 되었을까? 부르봉 왕가의 유일한 적통 루이 샤를은 악명 높은 탕플 감옥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퇴하고 왕정이 다시 들어서자 자신이 왕세자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공안위원회의 서슬이 시퍼렇던 혁명 시절에는 어림없었던 일이다.
루이스 베이어드는 엑토르의 아버지이자 역시 의사였던 미스터 카르팡티에의 일기를 소설의 곳곳에 삽입해서, 비도크와 엑토르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샤를 랍스켈레”가 사실은 역사에는 1795년 열 살의 나이로 죽은 것으로 기록된 프랑스 왕세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독자의 뇌리 속에 주입한다. 자, 이제 소설은 샤를 랍스켈레가 진짜 루이 17세인가를 밝히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루이스 베이어드는 그 과정에서 사실을 좇는 단서를 조금씩 뿌려둔다. 결정적 증거는 되도록 뒤로 미루면서, 긴장이 증폭된다.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왕세자의 운명에 대한 기술은 삼가야 할 것 같다. 다만, 아버지 카르팡티에가 성공적으로 수행한 모종의 작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은 내버려도 되는 걸까? 그가 혁명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목숨을 걸고 수행한 작전이 사실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혁명주의자의 모두가 평등하다는 대의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루이 17세의 심장 이야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당시 왕가의 전통대로 죽은 왕족의 심장은 분리되어 보관됐다는 것이다. 현대 기술의 총아인 DNA 분석 기법으로 그 심장이 과연 루이 17세의 것인지 오스트리아에 보관한 그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카락 그리고 살아 있는 후손의 혈액 샘플 등으로 비교한 결과, 루이 17세의 심장이 맞는 것으로 지난 2000년 판명이 되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검은 계단>을 읽게 되면 허무할지도 모르겠지만, 역사의 공간에 침투한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