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와 어둠의 공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4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지음, 진일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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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함께 현대 오스트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읽었다. 지금은 내륙국가가 되었지만, 한 때 중부 유럽의 패자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절 북극해를 정복하겠다는 야심만만한 포부를 가지고 북극 탐험에 나섰던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작가는 실화에 요제프 마치니라는 가공의 인물이 1세기라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무엇에 홀린 듯,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여정을 좇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위에 따른 구성을 선보인다.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침탈이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후반,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시 이웃 나라들이 자원기지와 상품시장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식민지 개척에 배가 아팠다. 그나마 독일은 태평양과 동아프리카에 보잘것없지만 그런대로 식민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한 때 프로이센 제국을 위협하던 오스트리아는 손에 쥔 카드가 아무것도 없었다.

대항해시대 이래 젖과 꿀이 흐르는 미지의 동인도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탐험가들의 꿈은 16세기 휴 윌러비 경의 ‘죽음의 무도’ 이래 멈추지 않았다. 함선 테게트호프 제독호의 공식 지휘관으로 황실의 후원을 받아 원정대를 이끈 해군 출신 카를 바이프레히트 중위와 그 일행에게는 전인미답의 북극을 정복하겠다는 개인적 야심도 있었겠지만, 그 배경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그런 절박함이 배어 있진 않았을까.

북극의 바다에서 겨울나기란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이들은 무모한 도전에 나선다. 얼음에 갇혀 두 번의 겨울을 나면서 그들은 사방에서 죄어오는 유빙과 빙하, 만성적인 식량부족 그리고 혹독한 추위를 체험한다. 신선한 고기를 얻고 유일한 오락을 위해 북극곰 사냥도 망설이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자그마치 67마리의 북극곰을 해체했다고 한다. 훗날 화가로 변신한 율리우스 파이어가 영국탐험가 프랜시스 크로지어 대위의 최후를 묘사한 그림에는 북극에서 난파한 선원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극곰이 등장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왜 이런 시련을 감수하고 북극 바다로 달려갔을까? 도대체 왜? 경제적 보상이나 조국의 영광이라는 명분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용감한 탐험가이면서도 동시에 빼어난 기록가이기도 했던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시시각각 좁혀 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북극 바다에서 느끼는 절대 고독과 정체불명의 매혹적인 침묵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두운 대지와 차가운 빙하에 대해 율리우스 파이어가 남긴 문학적 묘사는 대자연에 대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인류의 케케묵은 알고리즘이다.

변변한 통신 수단도 없었던 시절,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빙하에 갇혀 추위와 식량부족에 고통 받던 오스트리아 원정대에게 북동항로를 통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바닷길을 찾는다는 애당초의 목표 대신 당장 생존투쟁이 우선이었다. 나중에 평가되었지만, 이들의 노력이 훗날 아무런 의미도 없고 무역항로로서도 가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란스마이어의 말대로 희생 없는 신화가 있었던가. 빙하에 포위된 원정대원이 환각과 섬망 때문에 현실과 광기가 엇갈리는 순간에 대한 묘사 역시 소설에 칼날 같은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진지하고 조용한 연구자 스타일의 지휘관 바이프레히트와 열광적인 탐험가 파이어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역시 무한한 시간과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바이프레히트 원정대가 1874년 8월 24일 노바야제믈랴 부근에서 러시아 포경선에 구출되는 장면이다. 지도에서 백색으로 표시된 미지의 땅을 찾겠노라는 사명감에 죽음을 무릅쓴 이방인에게 러시아 선원이 경의를 표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희생을 통한 구원,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낸 사나이들이 받아 마땅한 보상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란스마이어가 다루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무도 알 수 없었던 잊혀진 역사적 사건은 트리에스테 출신 ‘돈키호테’ 요제프 마치니의 등장에 힘입어 부활한다. 작가가 교묘하게 끼워 넣은 마치니는 소설에서 과거를 추적하는 시간 여행자다. 현재 마치니가 펼치는 끈질긴 추적으로 과거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탐험기는 생명을 얻는다. 시공을 뛰어넘는 과거와 현재의 탐험은 묘하게 서로 공명한다.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인터뷰에서 보통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데 5년에서 7년이 걸리는데 최근에는 2~3년으로 줄이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저작활동은 내적 투쟁의 결과란다. 책을 쓰면서 내내 “내가 끝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란스마이어의 신작을 만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납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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