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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의 작품 <식인종의 요리책>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마르 델 플라타의 레스토랑 알마센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궁금하다. “좋은 공기”를 뜻한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들어봤어도, 대서양에 인접한 휴양 도시 마르 델 플라타는 또 처음 들어본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조사해 보니, 아르헨티나에서 7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역사로 시작되는 <식인종의 요리책>에는 카니발리즘, 혀끝을 자극하는 요리 그리고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관통하는 다층적 구조를 보여준다.
제목에 나와 있는 “식인종”이라는 말에 넌더리를 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문학적 창조물인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그르누이와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박사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약한 분은 조심하라는 경고는 굳이 한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초반에 등장하는 세사르 롬브로소의 생존에 대한 부분에 제외한다면.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화려한 서사로 레스토랑 알마센과 관계된 롬브로소 가문의 연대기에 쿠데타와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광적인 파시즘으로 얼룩진 아르헨티나 현대사를 교묘하게 배합한다. 마치,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이는 유명한 셰프의 환상적인 소스처럼. 19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건너온 루치아노와 루도비코 카글리오스트로 형제가 남긴 전설적인 요리 레시피가 담긴 요리책에 관한 진술은 흥미진진하다. 그 책이 숱한 영욕을 세월을 거쳐 제 어미의 살을 뜯어 먹고 살아남은 세사르 롬브로소에게까지 전달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소설 같다.
정말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수많은 요리 레시피의 소개와 상상만으로 바로 입안에 군침이 고이게 하는 묘사는 여느 요리를 주제로 한 소설의 아우라를 훌쩍 뛰어넘는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항상 사회주의 진영의 편에 섰던 알마센 오너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온갖 역경을 딛고 불사조처럼 일어서는 레스토랑 알마센은 아르헨티나 민중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광적인 파시즘으로 무장한 군부의 악랄한 탄압에도 알마센의 주방장은 끊임없이 사람들이 원하는 요리를 개발해낸다. 때로는 해산물로 또 때로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고급 육류로.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현란한 미식가의 기호로 ‘더러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암울했던 군부 독재 시기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
유럽과 남아메리카 두 개의 대륙을 잇는 혈연을 바탕으로 한 개연성은 끊어질 것 같은 알마센의 운명을 연장한다. 군부 쿠데타,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개입을 뒤로하고 레스토랑 알마센은 계속해서 전진한다. 시대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마센의 요리는 대중의 미각을 휘감는다. 어쩌면 작가는 요리라는 소재 속에 내재된 개인의 욕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사르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면서 소설은 살인과 미스터리까지 아우른다. 한 개의 소설에서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할 수 있다니 놀랍다.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연대기 작가처럼 허구의 역사를 신중하게 짜깁기하면서 독자를 보이지 않는 그물로 사로잡는다.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결말을 연상시키는 엔딩이 좀 씁쓸했지만, 텍스트의 창조적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작가가 작품 도중에 끼워 넣은 캐릭터인 유보트 승무원 위르겐 베케르가 잠수함 함장에게 눈을 감고 ‘사우어 크라우트’를 만드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가 아들 석봉에게 어둠 속에서 글을 쓰라고 하듯, 함장은 후각, 촉각 그리고 기억에 의존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을 내린다. 위르겐이 알마센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에비타’ 페론의 방문도 빼놓을 수가 없다. 카를로스 발마세다가 창조한 가상현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나 할까. 몬테비데오 앞바다에서 침몰한 독일 포켓전함 ‘그라프 쉬페’의 짧은 등장도 아르헨티나와 나치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말미에 등장하는 세사르의 엽기적인 카니발리즘이 좀 걸리긴 하지만, 올해 상반기에 읽은 최고의 책 중의 하나로 꼽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한다.